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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외교로 워싱턴에 한류 전파

김치 외교로 워싱턴에 한류 전파

"This man.” 2001년 3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기자회견장에서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김대중 한국 대통령을 가리켜 이렇게 불렀다. 김 전 대통령의 뛰어난 리더십을 평가하면서 나온 표현이었지만 국내에서는 한바탕 논란이 일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뻘 되는 어르신을 ‘이 사람’ 또는 ‘이 양반’이라고 부르는 건 외교적 결례가 아니냐는 얘기였다. ‘this man’의 속뜻을 놓고도 해석이 분분했다. 부시가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부터 당시 노벨평화상을 받고 세계적 이목이 집중됐던 김 대통령에 대한 경계심에서 나온 의도된 발언이라는 분석까지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한·미 양국 정부는 재빨리 “부시의 털털한 성격에서 비롯된 표현일 뿐 정치적 의도는 없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논란은 쉬 수그러들지 않았다. 정말 부시가 한국을 얕봐서 ‘this man’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당시 주미대사로 정상회담에 배석했던 양성철(70) 전 대사는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부시 대통령의 말을 우리말로 직역해 받아들이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고 돌이켰다. “영어에서 ‘this man’은 적어도 상대를 깔보는 표현은 아닙니다. ‘President Kim’ 같은 공식적인 호칭을 붙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부시의 평소 말투로 볼 때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보다 가벼운 느낌을 주는 ‘this guy’라고 말했다면 문제가 됐겠지만 말입니다.”

실제로 부시는 재임 중 ‘절친한’ 사이임을 과시했던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도 ‘this man’이라고 불렀던 적이 있다. 국제 외교에서는 사소한 어휘선택 하나가 엄청난 외교적 파장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 예였다. 2000년 주미 한국대사로 워싱턴에 부임한 뒤 3년의 임기 동안 양 전 대사는 천당과 지옥을 다 맛봤다.

그는 클린턴 2기 행정부의 말년에 부임해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과 북한 군부 내 2인자였던 조명록 차수가 차례로 평양과 워싱턴을 방문하고 클린턴의 북한 방문이 추진되는 등 역사적 소용돌이의 현장에 있었다. 정치학자로서 소신을 가지고 있던 햇볕정책이 눈앞에서 실행되는 기쁨도 맛보았다.

하지만 이듬해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북·미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됐고 9·11 테러가 터지면서 그 유명한 부시의 “Axis of evils(악의 축)” 발언이 나왔다. 하지만 클린턴과 부시 정권은 무엇보다 “외교적 배려에 있어서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고 양 전 대사가 말했다.

양성철 전 대사가 워싱턴에 있는 동안 국가 안보 문제에만 매달린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재임 기간 중 가장 의미 있는 성과로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에서 김치가 국제식품으로 공인 받았던 일을 꼽았다. 그로 인해 한국은 김치의 종주국으로서 위상을 세우고 국제적인 인지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농림부와 대사관 직원들이 국제식품규격위원회 관련 실무를 담당했지만 그는 워싱턴 정가에서 “김치 외교”를 펼쳤다. “한번은 북한의 조명록 차수의 환영 만찬에 갔더니 테이블마다 김치가 놓여 있어서 놀랐어요. 그 자리에 스탠리 로스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참석했는데 그가 식사 전에 빵 사이에다 김치를 넣어 먹는 거예요. 마치 한국 사람처럼 김치를 잘 먹더군요. 그래서 나중에 제 아내에게 부탁해 직접 담근 김치를 로스 차관보에게 몇 번 보내줬어요.”

양 전 대사는 70년대에 동두천에서 주한미군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에게도 김치를 담가 보냈다. “한국이 아직 분단국가라서 외교력의 절반 이상을 안보 문제에 쏟아야 한다는 점이 늘 안타까웠어요. 문화 외교의 힘을 더 키웠으면 해요.”

양 전 대사는 워싱턴 시절,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조 바이든 현재 미국 부통령, 고 마이크 맨스필드 상원의원 등 미국 정치인들과 폭넓게 교류했고 아시아 소사이어티, 하버드 대학 케네디스쿨, 한국경제연구소(KEI) 등에서 활발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했다. 정치학자 출신으로 초선 국회의원이 정·관계 경력의 전부였던 그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워싱턴 정가에 적응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양 전 대사는 주저 없이 “영어라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수단(survival skill)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회의원 시절부터 그와 교류해온 최남현 코리아헤럴드 주필은 “정책 담당자들과 토론이나 연설하는 걸 보면 흠잡을 데가 없었다”고 양 전 대사의 영어실력을 평가했다. 특히 켄터키 대학에서 오랜 교수 생활로 다져진 영작 능력이 탁월하다고 한다.

최 주필은 “요즘도 양 전 대사가 코리아 헤럴드에 영문 기고를 하고 있는데 그의 글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양 전 대사는 “영어 공부엔 지름길(quick fix)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의 영어 실력도 수십 년 넘게 차곡차곡 쌓인 결과물이다. 전라남도 곡성이 고향인 그는 중학 시절 영어 교사였던 작은 형에게 방과후 수업을 받으면서 처음 영어와 만났다.

“그 당시 학교에서는 에드거 앨런 포의 시나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등 명문들을 다 외우게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방학에는 영문 소설을 작심하고 읽었다. “문고판 셰익스피어 소설이나 한영문이 함께 들어있던 ‘레미제라블’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서울대 정치학과 시절엔 동숭동 캠퍼스 앞에 있던 노점상에서 펄벅 작품이나 에디스 해밀턴의 그리스 신화 같은 영문 소설을 사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가 대학을 다녔던 1960년대에 마침 뉴스위크나 타임지 등 영문 잡지들이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늘 영문 잡지를 팔에 끼고 다녔고, 시내에 나가면 미군 병사들이 그런 양 전 대사에게 말을 걸어오곤 했다. 양 전 대사도 틈만 나면 미군들에게 ‘How are you?’ ‘What’s your name?’이라고 말을 먼저 걸곤 했다.

영어를 배우겠다는 목적보다는 “호기심이 많고 외향적인 성격 때문이었다”고 양 전 대사는 말했다. 또 그 시절에는 드물게 미국에서 온 교환교수에게 ‘Nationalism’이라는 영어 강의를 들었다. 첫 강의에 40여 명의 학생이 몰렸지만 곧 대다수가 언어장벽 때문에 수강을 철회했다. 강의를 끝까지 들은 것은 양 전 대사를 포함한 두 명뿐이었다.

“결국 셋이서 넓은 교실을 쓰기도 뭣해 학교 앞 낙산다방에 가서 수업을 하기도 했지요. 엉터리 영어였지만 끝까지 해내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졸업 후 한국일보 기자로 일하던 양 전 대사는 하와이 대학 동서문화연구센터의 장학생에 신청해 미국 유학을 가게 됐다. 처음으로 밟은 미국 땅은 그에게 신천지나 다름없었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8층이었던 화신백화점이었는데 하와이 대학에 가보니 기숙사 건물이 11층이더군요”라며 그가 웃었다. 한국에서 소설로 다진 영어 실력도 현지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처음 1년간 석사 수업과 함께 ‘This is a book’같은 기초회화, 작문부터 다시 배웠어요. 처음에는 고작 10% 정도 들리던 게 점점 귀가 트이더군요.”

전공 수업 시간에 두꺼운 자료나 책을 미리 읽고 1쪽으로 요약하는 작업도 큰 도움이 됐다. 또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교수에게 질문할 내용을 미리 적어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방학 기간 중엔 도스토옙스키나 존 스타인벡 등의 소설에 탐닉했다. 양 전 대사는 자신의 영어에 대해 “절반이 자신감”이라고 말했다.

하와이에 가서 얼마 되지 않아 정치학도답게 동서문화연구센터 학생회 부회장에 출마해 당선됐다(학생 수는 600명 정도였다). “회장은 미국인 학생이 됐으니 부회장은 인터내셔널 학생을 뽑아야 맞다고 생각했지요. 무턱대고 나갔다가 영어 연설을 하라고 해서 황급히 친구의 도움으로 연설문을 작성해 줄줄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1970년 박사과정을 마치고 만 29세에 이스턴 켄터키 대학에서 유일한 외국인 교수로 임용됐을 때엔 젊은 동양인 교수를 얕보는 학생들의 시선을 한동안 의식해야 했다. 학생들은 부러 그의 영어 실력을 시험해보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양 전 대사는 그런 질문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강의에만 집중했다.

“브로큰 잉글리시라도 실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게(get to the point) 중요해요. 외교를 할 때에도 원어민의 발음을 무조건 흉내내기보다 영어 속에서 자신의 출신 문화와 언어적 배경을 당당하게 표출하는 모습이 더 존중을 받습니다.”

요즘도 그는 영어에 끊임없이 “밥을 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영어는 생물(animal)이라 보살펴주지 않으면 금방 퇴화하거든요.” 현직에서 물러난 뒤로 그는 국내외 학술지와 신문 매체에 영문 기고와 강연 활동을 정력적으로 하고 있다. “ ‘서두르지도 쉬지도 말라’는 괴테의 말을 되새기며 마음을 늘 다잡습니다.”

그가 말하는 ‘영어 공부 노하우’


1. 영어는 살아있는 생물이다
우리가 매일 숨쉬고 밥을 먹고 살아가듯이 영어도 끊임없는 보살핌이 필요하다. “난 이제 영어 정복했다”고 손을 놓으면 금방 실력이 퇴보한다. ‘without haste without rest’(서두르지도 말고 쉬지도 마라)라는 괴테의 말처럼 꾸준하게 영어에 ‘밥을 주는 게’ 필요하다. 양 전 대사는 요즘도 영문 집필 활동을 활발히 하며 가족과도 종종 영어로 대화한다.



2. 우리말을 일단 확실히 해라
우리말을 잘해야 영어도 잘한다. 한국인의 중요한 국제경쟁력 중 하나는 바로 ‘한국인이란 정체성’이다. 정체성이 확고하면 외국인들을 대할 때도 자신감이 생긴다.



3. 영어권 문화를
직접 체험해 보라
양 전 대사에게는 5대양 6대주를 여행했던 추억이 소중한 보물이다. 미국, 영국뿐 아니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인도 등 영어가 통하는 나라는 많다. 직접 사람들과 만나 자연스럽게 영어를 사용하는 환경에 노출되는 게 중요하다. 또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진다.
달인의 칭찬 릴레이
양 전 대사는 이문열 등 국내 작가의 유명 소설을 영어로 번역하는 서지문 고려대 영문과 교수와 고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의 통역을 맡았던 박웅서 전 고양문화재단 관장을 영어 달인으로 추천했다.
양성철
서울대 정치학과
미 하와이 대학
정치학 석사
미 켄터키 대학
정치학 박사
1963~65년
한국일보 기자
1970~75년 미 이스턴 켄터키대 조교수
1975~86년 미 켄터키대 부교수·교수
1996~2000년 제15대 국회의원
(전남 곡성·구례, 민주당)
2000~2003년 제18대 주미대사
2003년~ 고려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
현 김대중평화센터 자문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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