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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금융’ 뿌리 깊다

‘상생금융’ 뿌리 깊다

탐욕스러운 금융 엘리트들이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것은 사실이지만, 선진국이 오랫동안 닦아 온 금융시스템까지 폄훼해서는 곤란하다. 독일, 일본, 미국 등 선진국의 중소기업 금융 부문은 우리가 배울 점이 많다.

유로화를 상징하는 조형물. 유럽은 중기 금융시스템이 잘 갖춰졌다.

한국 중소기업의 자금 문제는 한국적 금융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미국을 따라 해서도 아니고, 독일과 일본을 배우지 않아서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미국과 영국은 ‘거래형 금융’을 중시하고, 독일과 일본은 ‘관계형 금융’에 특화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인가?

중소기업만 기준으로 보면 관계형 금융은 전혀 구축되지 않았다. 거래형 금융을 추구하지만 이 역시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상태다. 일반적으로 중소기업 자금난의 구조적 원인을 얘기할 때 네 가지가 언급된다.

자금조달이 은행에 과도하게 편중돼 있다. 관계형 금융 약화에 따라 중기 대출이 위축됐다. 은행이 단기 위주로 자금을 공급한다. 대출관행이 공급자 중심이며 지나치게 보수적이다. 네 가지를 하나로 묶으면 ‘금융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자금 조달의 90% 이상을 은행에 의존한다.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희한한 구조다. 이유는 뻔하다. 지역금융 기능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해외 중소기업은 어떨까? 글로벌 경제위기로 어렵기는 국내 중소기업이나 일본이나 독일 미텔슈탄트(Mittelstand : 첨단 제조업 중심의 독일 중소기업)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와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일본 제2 지역은행은 지역 밀착형 경영에 주력

독일과 일본은 중소기업 지원과 소비자 금융을 담당하는 중소 금융기관이 폭넓게 존재하며 대기업 중심의 금융을 보완하고 있다. 독일은 저축은행과 신용협동조합이 중소기업 금융을 전담한다. 또 저축은행 최저자본금의 50%로 설립할 수 있는 신용보증 보험기관이 주 단위, 소지역 단위로 광범위하게 존재해 중소기업에 대한 보증을 제공한다.

중앙정부나 주정부는 신용보증 기관의 보증 채무가 변제되지 못하면 일부 변제 채무를 진다. 일본 역시 지역 기반의 제2 지역은행과 신용금고에서 중소기업 지원을 담당한다. 신용금고는 자본금 9억 엔 이하, 종업원 300명 이하의 중소기업과 지역 주민으로 결성된 협동조합으로 조합원에게만 여신을 제공한다.

제2 지역은행은 국제업무를 하지 않는 지역은행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국제업무를 담당하는 지역은행도 있다). 제2 지역은행은 지역 밀착형 경영을 하며 지방 중소기업이나 개인대출 자산을 운용한다. 일본 제2 지역은행의 예금 총액 및 대출금은 일본 전체 은행의 10% 정도다.

2008년 상반기 현재 일본의 지역 금융기관 수는 신용금고 287개, 신용조합 168개, 지역은행 64개, 제2 지역은행 45개다. 이들 지역 금융기관은 전체 대출의 약 60%를 중소기업에 지원한다. 일본 제2 지역은행과 신용협동조합 등 일본 서민금융기관의 총자산 기준 시장 점유율은 20%를 약간 넘는다. 5%도 안 되는 한국과 다른 점이다.

물론 세계 금융위기로 일본 지역금융 기관도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10월 중소기업의 자금경색과 지역 금융기관의 도산을 막기 위해 공적자금 규모를 2조 엔에서 12조 엔으로 증액한다고 발표했다. 일부에선 이를 두고 지역금융의 한계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후발 선진국인 독일과 일본은 대기업과 대형 은행에서 출발한 관계형 금융이 지역금융과 중소기업으로 이어지면서 선발국을 따라잡는 추격의 기반이 됐다.


특히 독일의 관계형 금융은 뿌리도 깊지만 ‘금융의 다원화’라는 측면에서 부러운 점이 많다. 독일 금융체계는 5대 대형 은행과 150개가 넘는 지방은행, 외국계 은행이 상업은행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 저축은행과 유사한 ‘슈파르카센’은 430개 정도다.

슈파르카센은 500곳이 넘던 저축은행을 430개로 줄이며 붙인 개별 저축은행의 공동브랜드다. 슈파르카센은 개별 저축은행이 한 기관처럼 운영된다. 슈파르카센은 개별 저축은행과 12개의 주립은행인 란데스방크로 이뤄져 있다.

독일의 저축은행은 기관 수는 줄어들고 있지만 총 자산은 꾸준히 늘고 있다. ‘독일 제조업의 힘’이라고 불리는 협동조합은행은 1300여 곳에 달한다. 과거 독일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저축 예금을 기반으로 중단기 대출만 취급했다. 하지만 현재는 신용 공여와 은행 업무를 포함하는 겸업은행 기능을 한다.

저축은행과 기능이 거의 유사하다. 고객 범위 역시 비조합원까지 거래가 가능하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협동조합의 자산운용 방식이다. 독일의 협동조합은행은 전체 대출금 중 1년 미만이 7~8%에 불과하다. 대출이 중장기적으로 운용된다는 것인데, 국내 은행들 대출 중 만기 1년 이하가 70~80%인 것을 감안하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금융 다원화가 공통점

무엇보다 중요하고도 부러운 것은 이들 독일 금융회사의 시장점유율이다. 2006년을 기준으로 독일 대형 은행의 시장점유율은 전체의 4분의 1이 안 된다. 대신 주립은행인 란데스방크가 27%, 협동조합은행이 약 15%, 슈파르카센이 20%, 지방은행이 12%를 차지한다. 전체 기업 대출에서 시중은행이 전체 기업대출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우리나라와 큰 차이를 보인다.

독일 중소기업은 대를 잇는 지역 금융권과의 협력관계 외에 다중의 안전망을 통해 보호를 받는다. 예를 들어 독일재건은행은 올해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 우리나라 돈으로 약 28조원을 추가 대출하고 신용대출 만기 연장을 통해 중소기업을 지원했다. 주로 설비자금을 대출해주는 독일재건은행(KfW)은 원칙적으로 10년이 융자기간이며 조건에 따라 20년까지 연장이 가능하다.

또한 상대적으로 저금리다. 독일 지역금융의 세 축인 협동조합은행, 슈파르카센, 란데스방크도 KfW의 자금을 많이 사용한다. 이 밖에 지역별로 연방·주정부가 재보증하는 20여 개의 민간 보증은행이 중소기업 후방에서 지원한다. 독일과 일본이 전통적으로 지역금융, 관계형 금융, 제조 중소기업 금융이 강한 나라였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떤가?

미국은 전통적으로 은행이 고객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거래형 금융’ 구조다. 기업 규모별 자금조달 형태도 우리나라와 유사하다. 대기업은 은행권 의존도가 낮으며 직접금융시장을 선호한다. 중소기업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자산 50억 달러 이상의 미국 대형 상업은행은 전체 대기업 대출의 90% 정도 차지한다.

하지만 미국 역시 지역은행, 저축금융지주회사, 독립은행, 독립저축금융기관 같은 지역은행이 폭넓게 발달해 있다. 미국의 서민금융기관은 많이 줄었는데도 전국에 1만 개가 넘는다. 신용평가를 기반으로 한 대출 체계가 일반적인 미국에서도 서민금융기관은 중소기업 대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관계형 금융에 기초한 지역금융도 작동한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미국 전체 중소기업 대출 중 대형 상업은행이 차지하는 비중은 50% 안팎이다. 1억 달러 미만의 중소기업 대출금액 비중은 6~7%, 1억~3억 달러 규모의 은행이 차지하는 비중은 14~15%다. 자본시장 거대화를 추구했던 미국에서 여전히 지역금융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요인은 50년 넘게 지역은행에 대한 법적 보호가 있었기 때문에 지역금융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지역금융을 육성하고자 한다면, 일정기간 보호를 통해 자생력을 키워주는 정책적 판단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선진국의 중소기업 금융은 오랜 기간 중층적이며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독일과 일본이 그렇고, 금융 탈규제를 선도했던 미국와 영국도 마찬가지다. 은행 대형화에 매몰돼 금융 양극화를 방치했던 정부 및 금융당국자들도 이를 모를 리 없다. 문제는 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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