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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산업의 ‘즐거운’ 미래

시계산업의 ‘즐거운’ 미래

바젤 시계박람회(일명 바젤월드) 폐회 전날, 시계·장신구 업체 쇼파드의 공동 사장 카를-프리드리히 슈펠레를 만났다. “시계산업은 아무도 자동차 산업처럼 구제해 주지 않겠죠?” 처음에는 그의 말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싶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니 그 말뜻이 헤아려졌다.

어쨌든 스위스 시계산업은 실제로 사람들을 고용하고 라 쇼 드 퐁과 르 로클르 같은 지역사회의 핵심을 이룬다. 그리고 지금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는 점도 같다. 그러나 디트로이트와 달리 스위스의 시계제조 산업은 적어도 30년 전보다 형편이 나아졌다고 자위할 만하다. 당시 극동산 싸구려 전자시계의 공세에 밀려 고급 수동시계는 설 땅이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스위스 시계산업은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소생해 개인 소지품의 전당에 버젓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스위스 시계의 수출은 1988년 51억 스위스 프랑에서 지난해 170억 프랑으로 증가했다. 이 같은 흐름을 근거로 태그 호이어 최고경영자 장-크리스토프 바뱅은 명품 시계의 장기적인 미래를 조심스럽게 낙관했다.

그렇다고 단기적으로 어려움을 예상한다는 말은 아니다. 한 해 60만~80만 개의 시계를 생산하는 그에게 최대 과제는 경기하강의 영향을 회사 전반에 고르게 분산시키는 일이다. 태그 호이어는 이번 위기에 맞서 아쿠아레이서 500 같은 신제품을 출시했다. 이 브랜드의 특장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근사한 고급 스포츠 시계다.

바젤에서 많이 회자된 또 다른 브랜드는 브라이틀링이었다. 지금까지 브라이틀링은 시계에 들어가는 ‘엔진’을 외부에서 조달했지만 앞으로는 자체 개발한 부품을 사용한 제품도 함께 시판한다. 기존 모델들보다 축적하는 동력의 용량을 키우고 기타 기계적 성능을 보강했다.

영국에서 이 브랜드의 성공을 이끈 주역 프란츠 라로세 백작은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고 전했다. “사람들이 위기에 적응하면서 더 조심해야 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닫는 듯하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운 좋게 바젤의 특급 호텔 스리 킹스의 지하 식당에서 그런 분위기를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위블로의 정열이 넘치는 장-클로드 비베 사장이 중국에서 건너온 일단의 손님에게 비공개 만찬을 베풀어주는 자리였다. 비베가 언어 장벽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매력으로 좌중을 휘어잡으며 분위기를 띄우자 손님(대다수가 위블로 브랜드를 처음 들어본 사람들이었다) 중 다수가 즉석에서 위블로의 상징적인 특대형 스포츠 시계를 주문했다.

근엄한 정장 차림의 중국인 갑부가 고무 시계줄이 달린 흰색의 대형 세라믹 시계를 뽐내며 비베와 함께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광경은 당분간 내 뇌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파텍 필립의 회장인 필립 스턴은 나에게 1958년 첫 번째 바젤 박람회에 참석했을 때를 술회했다(참여업체는 아니었다).

동시에 2건의 면담을 진행하려고 제네바에서 또 하나의 테이블을 차로 실어 날라야 했다고 한다. 지금은 번쩍이는 ‘부스’들이 줄지어 늘어선 모습을 보니 그때와는 분명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중앙 홀에서 100~200m 떨어진 곳의 천막 친 전시공간에서는 그 초창기 바젤 박람회의 느낌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곳에는 장-프랑수아 뤼쇼네, 막스 뷔서, 펠릭스 바움가르텐의 우르베르크, 마크 뉴섬의 아이크팟 등 젊은 시계 제조업자와 중소 브랜드들이 늘어섰다. 한 해 수십 개의 시계만 생산하는 업체 등 이들 소량 생산업자가 전시한 제품은 디자인이 혁명적일 뿐 아니라 가격도 때로는 수십만 달러를 호가했다.

하지만 그들의 부스는 이동 칸막이로 나뉜 공간에 테이블도 달랑 한 개뿐이었다. 이번 박람회는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먹구름이 짙게 깔린 가운데 마지 못해 형식을 갖췄지만 즐겁고 낙관적인 분위기였다. 바로 이런 뜨거운 정열과 정서적 몰입이야말로 스위스 시계산업을 경제위기에서 구하는 원동력이다.

올해 박람회는 방문객 수가 줄고 그들의 태도도 더 신중했다. 그러나 이 마라톤 시계박람회가 끝날 때쯤에는 처음 마음을 졸이며 도착했던 많은 전시업체가 밝은 표정으로 짐을 쌌다. 아무도 시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계산업은 꿈을 팔기 때문에 계속 존속한다. 그리고 평범한 상품은 가격전쟁의 대상이기는 해도 꿈에는 값을 매기기가 훨씬 더 어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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