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信不立 경영학
無信不立 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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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 열린 제너럴일렉트릭(GE)의 연례 주주총회는 어느 해보다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GE는 올 하반기 배당금을 68% 줄이기로 했다.
이는 1929년 대공항 이후 처음이다. GE 주주들은 드러내놓고 실망감을 표출했지만 꼭 실적부진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적에 대한 정보를 자신들과 공유하지 않은 점에 분노한 것이다. GE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으로 각종 개혁조치를 단행했지만 신뢰가 회복될지 의문이다.
공자는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民無信不立)’고 했다. 신뢰는 생존의 기본 전제라는 이야기다. 전직 국가 수장으로선 14년 만에 검찰 수사를 받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봐도 그렇다.
그는 타고난 승부사다. 숱한 고비를 특유의 승부수로 정면 돌파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견해는 많지 않다.
노 전 대통령이 결백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의 정치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도덕적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GE의 사례에서 보듯, 투자자의 신뢰를 잃으면 기업은 어려워진다.
기업이 투자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투자자는 이를 토대로 해당 기업의 주식을 장기보유 또는 신규 투자하는 ‘선순환 고리’가 끊길 위험이 있다. 안정적 자본 조달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반대로 투자자가 신뢰하는 기업은 불황 속에서도 승승장구하게 마련이다.
상품 판매보다 신뢰 구축을 중시하는 기업으로 유명한 메트라이프 생명의 사례는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정보센터와 게시판·대화방이 결합된 커뮤니티(Life Advice)를 운영한다.
이곳에선 퇴직금 투자·저축 등을 위한 각종 포럼이 열린다. 실적전망·달성률 등 회사 정보도 빠짐없이 공개된다. 그래서 고객과 투자자의 신뢰가 두텁다. 한국 진출 20주년을 맞은 메트라이프 생명이 100만 명 이상의 고객을 보유하고 있는 이유다.
신뢰는 생존의 전제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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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노스이스턴대 리처드 히긴스 전 교수는 자신의 저서 『잘나가는 기업들의 튀는 IR』에서 “위기에서 빛나는 기업들은 대개 ‘불가항력 사유로 실적이 하락할 수 있다’는 점을 미리 투자자에게 털어놓고, 나름의 대응방안을 마련한다”며 “솔직함은 신뢰를 유발하는 핵심 동인(動因)”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런 풍토가 조성돼 있지 않다. 아쉽게도 반대 상황이 더 많다. 실적 전망 ‘뻥튀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단 발표하고 보자는 식이다. ‘연결 재무제표’로 실적전망을 발표하고 ‘연결’이라는 점을 슬쩍 감추는 눈속임 사례도 적지 않다.
시장 조사 연구기관 ‘큐더스IR연구소’가 지난해 IPO 기업 38곳을 대상으로 매출액·영업이익·당기순이익의 전망치 대비 달성도를 조사한 결과, 100% 달성한 기업은 9곳(24%)에 불과했다. 큐더스IR연구소 김승욱 소장은 “주식시장에서 투자자와 기업 사이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은 기업의 성실한 약속이행”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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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에겐 투자자가 신뢰할 수 있는 기업이 얼마나 있을까? 큐더스IR연구소는 최근 투자자(고객)에 대한 기업의 신뢰성을 측정할 수 있는 CSRI 지표(박스기사 참조)를 바탕으로 ‘신뢰도 우수기업 10선(選)’을 발표했다.
대상은 지난해 말 상장기업(1746개) 중 실적 전망치를 발표하지 않은 곳을 제외한 총 385개사. 선정 과정은 총 두 단계에 걸쳐 진행했다. 일단 385곳 중 지난 3개년 실적 달성률(신뢰성)이 90% 이상인 기업을 1차 후보로 선정했다. 이 과정에서 총 64개 업체가 꼽혔다.
평가기업의 17%만이 1차 기준을 통과한 셈이다. 1차 후보 중 분기별 1회, 연 4회 IR활동을 하고, 이를 투자자와 공유한 기업을 선별했다(적극성 및 공정성 평가). 이는 큐더스IR연구소가 지난해 말과 올해 4월 초, 개인 및 기관투자가 200명을 상대로 실시한 ‘기업 IR활동에 대한 투자자 인식조사’에서 나온 결과를 근거로 했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65%가 “IR활동은 분기 1회, 연 4회가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까다롭지 않은 기준 같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이를 통과한 기업은 64곳 중 부산은행·삼성전자·웅진코웨이·LG데이콤·LG화학·제일모직·KT·포스코·한국가스공사·현대해상(가나다순) 등 10곳뿐이다. 이들 10개사의 실적은 대단하다.
지난 3개년 평균 실적 달성률은 96%에 이른다. 시장 평균 82%보다 14% 높다. IR도 적극적으로 했다. 이들의 연 평균 IR횟수는 13회. 시장 평균(5회)보다 2배 이상 많다. 실적 뻥튀기는 지양하고, 양질의 정보를 투자자에게 제공했다는 얘기다. 기업별 활약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부산은행은 3개년 실적 달성률이 평균 95%다.
특히 지난해 매출(3조6350억원)은 전망치(2조964억원)보다 173% 높았다. 당기순이익 달성률도 91%를 기록했다. 투자자에게 기업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기업 설명회 자료 전문을 공개해 투자자의 이해를 도운 것은 대표적 사례다. 삼성전자의 실적 달성률도 빼어나다. 3년 평균 97%를 기록했다.
글로벌 불황이 본격화한 지난해엔 100% 실적 달성률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같은 시기 업종 평균 실적 달성률은 54%에 불과했다.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그에 꼭 맞는 경영전략을 세웠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 회사는 IR도 연 평균 26회 실시했는데, 이는 시장 및 업종 평균보다 각각 21회, 22회 많은 수치다.
특히 기업 설명회를 열 때, 콘퍼런스 콜(전화 회의)을 진행해 직접 참여가 어려운 해외 투자자를 배려한 점이 눈에 띈다. 공사로선 유일하게 우수기업에 선정된 한국가스공사의 실적 달성률은 최고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매출 달성률은 2006년(112%), 2007년(104%), 2008년(148%) 등 3년 연속 100% 이상을 기록했고, 매출·영업이익·당기순이익을 합계한 실적 달성률도 평균 99.7%를 기록했다.
이는 업종 평균 87%를 10% 상회하는 수준이다. 김승욱 소장은 “가스공사는 실적 전망치를 발표하기 전, 급작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변수까지 꼼꼼하게 검토한다”며 “가스공사의 실적 달성률이 높고, 장기보유주가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분석했다. LG데이콤과 KT는 기업 정보를 가장 활발하게 공유한 기업(공공성 부문)으로 꼽혔다.
LG데이콤은 지난 3년간 신뢰도 우수기업 10곳 가운데 가장 많은 81개의 정보를, KT는 이보다 한 개 적은 80개를 투자자에게 제공했다. 특히 LG데이콤은 실적 달성률 부문에서도 1위(99.8%)를 차지해 2관왕에 올랐다. 포스코는 우수기업 중 전망치에 대한 정정을 가장 꼼꼼하게 진행한 곳으로 꼽혔다.
이 회사는 2006년엔 1월과 10월, 2007년, 2008년엔 각각 1, 4, 7, 10월에 전망치를 발표하는 등 투자자를 적극 배려했다. 포스코의 실적 달성률은 99.4%로, 업종 평균(85.2%)보다 15%가량 높다. 김승욱 소장은 “생각보다 CSRI 우수기업이 많지 않다”며 “다음 조사 땐 더 많은 우수기업이 탄생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LG데이콤 실적 달성률·공정성 1위 ‘2관왕’
1984년 미국 가정용품 업체 콜게이트-팜올리브 리포트가 월가를 뜨겁게 달궜다. 이른바 ‘눈속임 리포트 파동’이다. 당시 이 회사의 실적은 형편없었다. 주가수익률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해 3분기에만 주당 1.13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총 자산도 역대 가장 낮은 수준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콜게이트-팜올리브는 투자자에게 이런 비상상황을 알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감추기 위해 꼼수를 썼다. 리포트 초반부에 큼지막한 글씨로 이렇게 썼다. “콜게이트-팜올리브는 오늘도 3000개 이상의 제품을 세계 135개국에 판매하고 있다.” 그러면서 숱한 희망찬 전망을 나열했다. 반면 손실을 나타내는 경영수치를 기록할 땐 작고 희미한 글씨체를 사용했다. 이에 따라 투자자의 불신의 골은 깊어졌고, 이 회사는 한동안 부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지금은 글로벌 빙하기. 세상엔 봄바람이 불지만 시장엔 여전히 한파가 가득하다. 그렇다고 위기를 모면하고, 주가를 끌어 올릴 요량으로 기업 실적을 뻥튀기하고 눈속임을 꾀한다면?
돌아오는 것은 부메랑처럼 날카로운 불신뿐이다. 콜게이트-팜올리브 사례처럼 불신은 빠르게 형성되지만, 신뢰 회복은 더디게 진행된다. 투자자의 믿음을 상실하면 기업은 살아남기 힘들다(企業無信不立). 실적 하락보다 더 무서운 것은 어쩌면 불신이다.
CSRI 지표 어떻게 만들었나?
CSRI 지표의 평가 기준은 신뢰성(실적 달성률)·적극성(IR 횟수)·공정성(투자자와 기업 정보 공유) 등 세 가지다. 이는 리처드 히긴스 전 교수의 IR신뢰기준을 우리 현실에 맞춰 변형한 것이다. 가령 히긴스 전 교수는 CEO의 자질을 IR신뢰성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큐더스IR연구소는 이를 배제했다. 한국경제 현실에서 CEO의 자질을 객관화하기 어렵다는 결론 때문이었다. 이렇게 마련된 CSRI 평가 기준의 적합성은 개인 및 기관투자가 200명에게 설문지를 돌려 검증했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대부분은 신뢰지표 기준으로 신뢰성·공정성·적극성을 꼽았고, 응답자의 63%가 신뢰성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선택했다. 큐더스IR연구소는 또한 실적 달성률을 산출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수리적 모순점을 검증하기 위해 고려대 이재원 교수 연구팀에 용역을 맡겨 타당성 검사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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