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는 강자에 맞서는 ‘힘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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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모국어나 제1외국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모두 10억 명이다. 반면 중국어 사용 인구는 약 13억 명이다. 그런데도 영어가 명실상부한 세계 공용어로 인정받는 이유는 뭘까?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 영어가 세계 정치·경제를 주름잡는 강대국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박웅서(71) UI에너지 명예회장은 그런 현실을 일찍이 실감했다.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불과 몇 달이 지난 때의 일이다. 평안북도 박천이 고향인 그는 해방 직후인 1946년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왔다.
“38선을 넘어 개성 북쪽에 이르렀을 때 장단 기차역에서 벌어진 일이오. 당시 미군이 관할하고 있었는데, 수중에 북한 화폐를 지닌 아버지가 환전을 하려 미군 병사와 말씀을 나누는데 왠지 쩔쩔 매십디다. 사선을 넘어왔다면 분명히 환영 받을 일인데도 영어를 못해 홀대를 받는다 생각하니 기가 막히더군요.”
남쪽에서 제주도와 부산, 서울을 옮겨 다니며 힘겹게 살았지만 영어에 남다르게 집착했다. “딱히 영어를 가르쳐줄 만한 사람이 없어 교과서를 무조건 외웠어요. ‘police’의 발음이 왜 ‘폴리케’가 아니고 ‘폴리스’이지? 이런 의문이 생기면 스스로 그 답을 구하면서 조금씩 영어의 감을 잡았습니다.”
교외활동을 통해서도 영어를 적극적으로 배웠다. “중학교에 다닐 땐 YMCA 주니어에 가입해 영어 토론이나 발표 능력을 키웠어요. 고교(서울고) 시절엔 경기고, 이화여고 학생들과 함께 영어회화 클럽을 만들어 공부하기도 했고요.” 그때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은 미군을 초대해 대화하면서 문화 교류를 했다.
영어 원서를 처음 읽게 된 계기도 특이하다. “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전학을 왔는데 그가 영어 성경을 독파했다고 해요. 그 말을 듣고 나도 질세라 영어 성경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는 영어 성경 외에도 헨리 밴 다이크의 ‘네 번째 동방박사’, 오 헨리의 단편집,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
“헤밍웨이 소설은 쉬운 언어로 쓰여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어요. 한 페이지에 두세 단어를 제외하면 모두 고등학생 수준에 맞는 어휘였지요. 읽은 책이 쌓이다 보니 자신감이 점점 붙더라고요.”서울대 상대를 나온 박 회장은 하와이대 동서문화재단의 장학생으로 뽑혀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책 속 영어에 익숙했던 터라 외국인들로부터 곧잘 “Your English is more like written English than spoken English(당신의 영어는 구어체가 아니라 문어체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영어를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박 회장이 70년대 후반 유학과 해외에서 교수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방한한 로버트 토리첼리 당시 뉴저지주 하원의원에게 한국 경제사를 브리핑할 기회가 있었다. 1시간 남짓 대화를 한 토리첼리 의원이 박 회장에게 “If I spoke English as well as you do, I would be a senator by now(내가 당신만큼 영어를 잘했다면 지금쯤 상원의원이 되었을 거요)”라고 감탄했다.
독서를 통해 쌓은 세련된 영어 표현력이 웬만한 원어민보다 낫다는 평가였다. 박 회장이 영어로 자신의 생각을 자유자재로 표현하게 된 때는 언제였을까? 그는 “호주 멜버른 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한 지 3년쯤 지났을 무렵”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1970년 호주에 처음 갔을 때 그는 영국식 영어(Royal British English)에 적응하느라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같은 영어인데도 어휘가 전혀 달라요. 미국식 영어가 쉬운 단어 위주라면 정통 영국식 영어는 격식을 차리는 편이거든요. 그 점에 자부심도 크고요. 일례로 ‘중고차’를 ‘used car’가 아니라 ‘pre-possessed car’라고 말합니다. 또 ‘I sweat a lot today(오늘 땀을 많이 흘렸다)’고 말하면 ‘We don’t sweat, we perspire(우린 땀 흘리지 않고 분비한다고 해)’라고 고쳐주더라고요.”
첫 번째 강의를 할 땐 미리 대본을 준비해 최소한의 “생각할 여지(mental freedom)”만 두고 수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3년을 강단에 서자 나중엔 메모지에 키워드를 적어 들어가도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할 만큼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박 회장은 1979년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산업경제기술연구원 연구실장으로 일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에서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을 만나 달라고 요청해 왔다. 처음 만나던 날 이 회장이 그에게 다짜고짜 물었 다. “언제부터 출근할 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이 회장은 옆에 있던 분재 작품을 가리키며 “이게 이래 봬도 400그루 중에 고른 거야”라고 말했다.
당신도 그렇게 엄선한 인재라는 암시였다. 삼성그룹이 70년대 후반 ‘(기업의) 체질을 국제화하겠다’는 판단 아래 해외파 학자의 영입에 나섰던 시절의 이야기다. 삼성 내부에선 이들을 일명 ‘동방박사’로 불렸다. 그들 중에는 카이스트 출신의 화학 박사, 하버드 출신의 경제학 박사, 보스턴대 출신의 경영학 박사도 있었다.
당시 마흔 나이를 갓 넘은 박 회장은 어린 시절 읽었던 책 제목처럼 ‘네 번째 동방박사’로 발탁된 셈이다. 이 회장의 고문을 맡은 그는 당시 삼성의 국제 창구로 활약했다. 한국을 찾은 외국 고객들을 만나고 회장의 통역을 도맡았다. 1984년 삼성전자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을 땐 마침 미국에 수출한 삼성의 컬러TV가 덤핑 예비판정을 받아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경제학자 출신인 박 회장에게는 구미가 당기는 과제이기도 했다. 그는 한국 대기업 특유의 복합적인 비용 구조를 증명해 보여 당초 60% 수준으로 부과됐던 반덤핑 관세를 12%까지 낮췄다. 다른 국내 기업들에 비하면 두 배 가까이 낮은 비율이었다.
“외국의 어느 반덤핑 제소 기업이 기업의 규모와 성과만 늘어놓자 미 국제무역위원회(ITC)는 ‘미사여구는 필요 없고 수치를 보여 달라(No more theatrics, show me the numbers)’고 말했어요. 우리는 구체적 데이터와 경제효과 분석을 보여주었고 쉽게 말이 통하더군요.” 그는 삼성물산 부사장, 삼성석유화학 사장을 거치면서 해외시장 개척에 치중했다.
해외 사정에 밝은 그에게 때로는 외교사절 임무가 주어지기도 했다. 냉전 시대인지라 동유럽 국가와의 대화는 기업인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1987년 박 회장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직 국가 정상들의 회의에도 실무진의 하나로 참석했다. 그의 임무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동유럽 국가의 참가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박 회장이 그 다음 날 한국 대표(고 신현확 전 국무총리)의 연설을 준비하는 동안 마티아스 조나스 전 앙골라 총리가 불쑥 그를 찾아왔다. 그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TV 볼륨을 키우더니 다음 날 연설에서 북한에 부정적인 언사를 빼 달라고 하소연했다.
당시 중국과 북한 주재 대사였던 그가 북한의 요청을 받고 박 회장을 찾아온 것이었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조나스 전 총리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통사정을 했다. 당황한 박 회장은 조나스 전 총리를 진정시켜 돌려보내고는 원래 계획대로 북한의 테러 위협을 강조하면서 러시아 관리들을 설득하는 연설문을 마무리 지었다.
“전직 국가원수가 내게 무릎을 꿇다니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며 박 회장이 웃음을 지었다. 올림픽이 열린 이듬해 박 회장은 당시 최호중 외무장관의 부탁을 받고 일본 도쿄로 가서 한 호텔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당시 유고연방의 외무장관이었다.
“우리나라가 동유럽 국가 중 처음으로 유고와 외교관계를 모색하던 시점이었어요. 유고 정부에 이미 보고는 됐고 국회 심의만 남겨두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유고 장관이 한 가지 조건을 내걸더군요. 장관 임기가 곧 끝나는데 자신의 고향인 자그레브(현재 크로아티아의 수도)에 있는 삼성 지사에 자문역이란 자리를 내주겠느냐는 청이었어요.”
박 회장은 그 요청을 수락해 줬고 그해 12월 한국과 유고는 정식 수교협정을 맺었다. 박 회장은 요즘도 1년에 10여 차례 해외출장을 나선다. 그럴 때마다 영어가 “힘의 언어”라는 생각은 더욱 단단해진다. “97년 삼성경제연구소 사장 시절에 외환위기를 맞았어요. 우리가 한국어로 온갖 원인 분석과 해결 방안을 늘어놓았지만 외국인들은 한국 사정에 깜깜했어요. 우리를 제대로 알릴 만한 영어 자료가 전무 하다시피 했으니까요.”
그 일을 겪은 뒤 박 회장은 곧 한국의 IMF 경제위기를 분석한 영어 논문을 발표했다. 그 논문은 나중에 하버드대 경제학 수업에 한국경제를 읽는 참고서로 활용되기도 했다.
물론 단순히 영어 실력만으로 모든 일을 하기는 어렵다. 박 회장은 무엇보다 국제사회의 상식을 늘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회장은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영어단어를 깨알처럼 써놓은 수첩을 꺼내 보였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취임 연설처럼 훌륭한 연설이 있다면 읽어보고 월스트리트저널 같은 경제지 하나만 꾸준히 봐도 안목이 생깁니다. 늘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달인의 칭찬 릴레이 박웅서 명예회장은 한승주 고려대 교수와 이홍구 전 국무총리를 추천했다. 두 사람 모두 한국의 대표적인 외교통으로 영어를 자기 분야에 활용해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역할 모델이라고 평했다. |
그가 말하는 ‘영어 잘하는 노하우’ 1. 사시사철이 독서의 계절 한동안 영어 말하기나 듣기 열풍이 불었는데 독서의 효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서를 통해 축적되는 세련된 영어 표현과 상식이 실전에서 가장 큰 무기가 된다. 요즘 화제가 되는 책이 있다면 찾아 읽고 영문 경제지나 시사지도 꾸준히 읽는 습관이 필요하다. 2. 글을 쓸 때 녹음기를 활용하라 삼성 계열사 사장 시절 박 회장은 영문 편지를 보내거나 글을 쓸 때 내용을 녹음해 비서에게 타자를 치도록 했다. 주요 내용을 써놓은 메모지와 참고 서적을 펴 놓고 필요한 부분을 확인하며 구술한다. 글로 쓸 때보다 머릿속의 논리 전개를 재빨리 소화할 수 있고 말하기 능력 신장에도 도움이 된다. 박 회장은 책을 쓸 때도 이 방식으로 초고를 쓴다. 다시 초고를 보면서 개선할 부분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글을 다듬는다. 3. 영어 실력이 곧 국력이다 학창 시절 박 회장은 “내가 공부하는 만큼 우리나라도 강해진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학업에 임했다. 당시 영어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핵심 역량이었다. “이승만 정부 시절 우리나라는 경제적 자립이 되지 않은 신생 국가였고 정부 예산의 절반 가까이가 미국 국제개발청(USAID)의 원조로 조달됐습니다. 자연히 국방정책이나 환율 등 나라의 중대 사안 중 상당수가 미국과의 토의나 설득을 통해 결정됐지요.”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지만 여전히 영어는 강대국의 언어고 “영어 실력은 곧 세계 어디서나 당당히 맞서는 힘”을 뜻한다. 영어를 기반으로 본인의 잠재력을 펼치면 국력도 강화된다는 자부심을 갖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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