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습격자’와 싸우는 사람들
‘침묵의 습격자’와 싸우는 사람들
댄 휠레스는 8학년이 시작된 첫날 발작을 겪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복도 바닥에 넘어졌다가 자신이 어떻게 거기에 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깨어난 사실이 아니었다. 휠레스가 넘어져 경련을 일으켰을 때 짓궂은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동급생들이 일어나라고 발길질했다는 사실도 아니었다.
이처럼 간질 환자가 학급 최고의 익살꾼이라면 예를 들어 전투기를 모는 조종사처럼 남다른 위험이 따른다. 무엇보다 휠레스에게 가장 끔찍했던 일은 그가 복용한 간질 치료제가 뇌의 활동을 늦춰 청각 정보의 처리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어려웠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이 한 말을 받아 적은 뒤 문장을 절로 나눠 각 절의 의미에 집중해야 이해가 갔다.
“때로는 엄마가 같은 말을 다섯 번 반복해야 겨우 알아들었다”고 휠레스는 기억을 떠올렸다. 몇 달 뒤 약을 바꾸자 그의 인지 능력이 개선됐다. 그러나 새 약도 다른 부작용은 있었다. 자꾸 무기력해지고 체중이 늘었다. 결국 그는 뉴욕대의 신경 전문의 오린 데빈스키를 찾아갔다.
데빈스키는 휠레스에게 가장 적합한 약을 알아내 처방했다. 그 뒤에야 그런 부작용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 선생님이 내 목숨을 구했다”고 휠레스는 말했다. 그가 최근 맨해튼에 있는 데빈스키의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지금 휠레스는 잘생겼고 키가 크고 건장한 32세의 청년이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졸업하고 여배우를 만나 결혼한 뒤 연극배우로 일한다. 데빈스키가 그의 목숨을 구했다는 언급은 과장일지 모른다. 의사들은 간질로 목숨을 잃는 사람을 예측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휠레스가 치명적인 환자 후보였던 건 분명하다. 그는 지금까지 심각한 발작이 약 50차례 있었고 미약한 발작은 수없이 많았다고 말했다.
사실 데빈스키는 휠레스의 앞니조차 구하지 못했다. 발작하면서 넘어져 앞니가 모두 빠지는 바람에 다시 해 넣어야 했다. 하지만 데빈스키가 그의 마음을 구했다고는 말해도 좋을 듯하다. 데빈스키는 1980년대 초 의대생 시절 인간의 두뇌와 사랑에 빠졌다. 뇌는 어디에도 비할 데 없이 복잡하고 정교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경과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신경과 의사는 환자들을 위해 실제로 많은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신경학을 공부하면서 뇌졸중, 다발성 경화증, 뇌종양, 편두통을 다뤘다”고 데빈스키가 돌이켰다. “또 뇌에 문제가 있는지에 관해 권위 있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에는 환자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 뒤 그는 간질이라는 질병을 새롭게 발견했다. 간질은 “마음을 들여다보는 창문”을 제공하는 질병이었다고 그가 말했다. 실제로 간질 연구는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말해 주는 초기의 발견을 많이 끌어냈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했던 점은 실제 치료가 가능한 질병이라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킨 뒤 마음 가볍게 귀가해 쉬는 일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1989년 이래 그는 뉴욕대 랭곤 메디컬 센터에서 미국 최대의 간질 센터 중 하나를 이끌어왔다.
환자용으로 쓰인 권위 있는 안내서 ‘간질(Epilepsy)’의 저자이며 웹사이트 epilepsy.com과 비영리단체 ‘간질 치료 프로젝트’의 공동 설립자이며, 새로운 치료법 연구를 장려하는 ‘FACES(간질과 발작의 치료법 찾기)’라는 단체를 독자적으로 설립했다. 간질은 정신병처럼 인간 특유의 장애다.
그래서 과거 간질은 정신병과 혼동됐고 심지어 귀신들림으로 간주되기도 했다(둘 다 전혀 간질과 상관없다). 간질 발작은 영향 받는 뇌의 부위에 따라 환상, 불안, 종교적 환희나 ‘초친숙함(hyperfamiliarity: 만나는 모든 사람을 이미 잘 안다는 착각)’ 같은 이상야릇한 심리적 특징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의 증상은 이미 잘 알려진 정신적·신체적 변칙 특징의 폭넓은 범위 안에 든다. 그 증상들은 ‘의식 부재[absence: 이전에는 ‘petit mal(가벼운 발작)’로 불렸다]’로 알려진 자각력의 일시적 상실부터 완전히 의식을 잃고 넘어지며 경련성 강직과 사지의 무의식적인 흔들림이 특징인 ‘강직-간대 발작[tonic-clonic: 과거에는 grand mal(대발작)로 불렸다]’까지 다양하다.
반복되는 발작의 장기적 위험에 관한 논쟁도 있다. 데빈스키는 그런 상태가 뇌에 돌이키기 힘든 손상을 입힌다고 주장한다. 반면 다른 연구자들은 생각이 다르다. 그러나 발작을 방치하면 장기적으로 기억력과 인지력의 결핍, 성격 변화, 그리고 죽음에까지 이르는 위험이 따른다. 발작은 다양한 자극 때문에 촉발된다.
종류가 너무도 다양해 종잡기 힘들 정도다. 섬광처럼 강렬한 자극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나의 생각’ 같은 미묘한 자극도 발작을 일으킨다. 숫자를 계산하거나 마작을 하거나 TV 앵커 메리 하트의 목소리만 들어도 발작을 일으켰다는 신빙성 있는 보고가 있다.
신경과 전문의이자 저술가인 올리버 삭스는 저서 ‘The Man Who Mistook His Wife for a Hat(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나폴리 민요를 들으면 발작을 일으킨다는 한 여성을 소개했다(처방: 시칠리아에 가서 살라). 환자들 스스로 어떤 경우에 발작을 일으키는지 알고 그런 지식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하루 한 번 이상 발작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한 한 여성은 결혼식 날 아침 의도적으로 발작을 유도했다. 그런 다음 더 이상 발작의 두려움 없이 마음 놓고 결혼식을 올렸다. 발작을 일으키는 흔한 요인으로는 알코올, 마약, 정서적 스트레스, 수면 박탈 등이 있다. 비행기 여행의 시차에서 오는 피로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사소한 불편일 뿐이지만 간질 환자에게는 재앙이 되는 경우가 있다.
과거엔 발작이 달의 차고 기움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데빈스키도 그 점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사실 조수가 달의 인력을 느낀다면 뇌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뇌는 외부 자극에 민감하며 잘못되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는 점에서 아주 독특한 신체 기관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심장은 몇 가지 경우에만 잘못된다.
개념적으로 말해 심장 전문의의 일은 간단하다. 손상된 심장을 정상적인 박동 리듬으로 복구시키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간질은 그와 정반대다. 정상적 뇌는 ‘혼돈’의 지배를 받는다. 신경세포는 예측 불가하게 신호를 쏘아 보낸다. 신경과 전문의는 고사하고 컴퓨터도 감히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법칙을 따른다(EEG 검사 결과를 보고 식별하기는 가능하다).
그 신호의 총합체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의식’이다. 우주 전체에서 수학적으로 가장 복잡한 현상일지 모른다. 발작은 혼돈의 부재 때문에 생긴다. 혼돈 대신 거의 아무런 정보도 없는 질서정연한 주기적 패턴만 있을 뿐이다. 발작은 국소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부분’ 발작). 과거의 뇌 손상 부위, 종양, 또는 구조적 기형이 대표적이다.
발작이 시작되면 신경세포의 특정 네트워크가 일제히 전기 신호를 발사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주변 신경세포들을 끌어들여 뇌 전체에 퍼져가는 동시 파도 효과를 일으킨다. 그와 달리 뇌의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전신성’ 발작). 주로 물려받은 유전자 돌연변이의 결과로 세포막 안팎의 이온 불균형이 일어나서 생긴다.
하나의 화학적 신호(그 출처는 아직 수수께끼다) 때문에 신경세포 수십억 개가 늘 하던 정교한 일(신체의 모든 움직임을 조절하는 역할)을 제쳐두고 원시적인 북 두드리기에 합류해 의식의 불만을 압도해 버린다. 따라서 심장 전문의와는 대조적으로 간질 전문의는 질서가 아니라 혼돈을 회복해야 한다.
발작은 치명적인 경우가 있다. 특히 경련이 10분 이상 지속되는 희귀한 간질중첩증(status epilepticus)이 그렇다. 데빈스키의 환자 중 한 명은 10대 소년이다. 그 아이는 지난해 12월 원인 불명의 간질중첩증 때문에 병원을 찾았다(데빈스키는 사전에 진단되지 않은 감염에 따른 뇌병변을 의심한다).
아이의 경련을 막는 유일한 길은 혼수상태를 유도하는 방법뿐이었다. 그 아이는 그 후 계속 혼수상태에 있다. 데빈스키는 그 아이의 목숨을 구하려고 약물의 적절한 혼합 비율을 계속 찾아가는 중이다. 간질 환자는 멀쩡하게 잠자리에 들었다가 수면 중에 사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죽음은 대개 돌발성간질급사증(SUDEP: sudden unexpected death in epilepsy)으로 기록된다.
약물로 억제되지 않는 난치성 간질 환자의 경우 SUDEP의 위험이 1년에 1%에 약간 못 미칠 정도다. 크진 않지만 무시해도 좋을 정도는 결코 아니다. 이들 환자 중 일부는 뇌 수술을 받아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데빈스키는 수명의 연장보다는 삶의 질을 더 중시한다. “단 한 번의 발작 후에 나를 찾아왔다고 상상해 보라”고 그가 말했다.
“내가 검사하고 EEG와 MRI를 찍었는데 모두 정상으로 나온다. 그러면 나는 그 환자에게 행운이라고 말한다. 제2의 발작을 일으킬 확률이 20%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면 중년의 남성이나 여성이 첫 심장발작(심장마비) 후 5년 안에 재발할 확률과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삶의 질에는 엄청난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트럭 운전기사나 외과 전문의사라고 생각해 보라. 아니면 제트기 조종사라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경력이 완전 끝장난다.” 간질 환자 대다수에게 가장 큰 삶의 질 문제는 운전이다. 미국의 모든 주는 다양한 수준으로 발작 경력이 있는 사람의 면허를 제한한다. 대다수 주에서는 환자가 특정 기간(수개월에서 수년까지) 동안 발작이 없어야 운전 권리를 되찾는다.
그러나 의사들이 발작 사례를 보고하도록 의무화한 주는 6개뿐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그 규제를 받지는 않는 듯하다. “환자는 20% 확률이 끔찍하다며 재발이라는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말해 줄 수 없다. 게다가 두 번째 발작이 찾아오면 세 번째가 올 확률이 70〜80%로 치솟는다.”
간질 치료제는 부작용으로 악명이 높다. 무기력감, 활동 과잉, 체중 증가, 체중 감소, 현기증, 빈혈증, 골다공증 등. 게다가 혼동을 일으킬 정도로 간질 증상과 비슷한 정신적 문제가 나타나기도 한다. 데빈스키는 발작의 끔찍함과 구토의 고통을 끊임없이 비교 평가한다.
“예를 들어 한 환자가 강한 약을 먹는데도 약 2분 정도 지속되는 응시 발작(한 곳을 계속 노려보는 증상)을 한 달에 두 번 정도 일으킨다고 가정해 보자”고 데빈스키가 말했다. “이제 내가 또 다른 약을 처방해서 한 달에 한 번으로 발작 빈도를 낮췄다고 치자. 그러면 그 환자는 자신의 삶에서 한 달에 2분을 추가로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그 대신 깨어 있는 하루 15시간 동안 삶의 질을 희생해야 한다. 약의 부작용으로 피곤하거나 어질어질하거나 우울하거나 기억력 감퇴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단지 2분 동안의 미약한 고통을 덜려고 그런 맞교환을 하겠는가?” 올해 52세인 데빈스키는 단단한 체격에 단도직입적이면서도 친근한 면이 있다.
그는 일주일에 나흘씩 새벽같이 일어나 뉴저지주의 집(기혼자로 아내와 10대 딸 두 명, 애견 한 마리와 함께 사는데 그의 환자들은 가족들의 안부를 빠뜨리지 않고 묻는다)에서 기차를 타고 뉴욕시에 아침 6시쯤 도착한다. 회진을 돌기 전에 한 시간 동안 체육관에서 운동을 한 뒤 사무실로 간다.
목요일이면 자신이 운영하는 또 다른 간질 센터가 있는 뉴저지주 리빙스턴 소재 세인트 바나바스 병원에서 환자를 본다. 격자무늬 스포츠 재킷에 타이를 착용하고 병원의 좁은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다니며 환자들이 대기하는 검사실을 들락거린다. 검사를 받는 환자들의 불안감은 천차만별이다.
성인 환자들도 대부분 부모나 배우자 또는 형제나 자매와 함께 온다. 혼자 찾아오는 환자는 거의 없다. 데빈스키는 수년 동안 환자들의 삶에 깊이 개입했다. 맨 앞에서 사례로 든 댄 휠레스와는 너무도 친해 2006년 그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데빈스키는 친한 친구인 삭스에게서 그런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삭스는 자기 환자들의 정신적 삶에 스며들어가 그 상태를 묘사하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다. 데빈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환자들이 내 삶에 관여하도록 허용하고 나도 그들의 삶에 개입한다. 그런 상황이 의사로서 내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이다.” 휠레스는 수년 동안 나타나지 않던 발작이 최근 재발해 더욱 잦아지면서 낙담했다(올해 들어 이미 두 번 겪었다). 데빈스키는 그런 사실을 잘 안다.
더구나 휠레스의 경우는 음주나 약 복용 태만 등 스스로 제어 가능한 요인 없이 발작이 일어난다. 데빈스키는 이탈리아 등 멀리서 찾아오는 환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지만 최근 휠레스가 사무실에 찾아왔을 때 마치 오전 시간 전부가 비어 있다는 듯 느긋하게 휠레스와 이야기를 나눴다.
항우울제 투여량을 늘리고, 수면에 도움이 되도록 멜라토닌 복용을 권하면서, 가정 EEG 검사(환자가 집에서 하룻동안 장비를 착용하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받는 검사) 일정을 잡아줬다. 휠레스는 힘없이 미소를 띠며 헬멧(발작에 대비해 머리를 보호하려는 이유가 아니라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다)을 집어 들고 데빈스키의 사무실을 나갔다.
나중에 한 기자가 그에게 발작 재발의 느낌을 물었다. “너무도 가슴 아프다”고 그가 지친 듯이 대답했다. “제발 간질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데빈스키는 휠레스를 만난 날 대학생 한 명도 면담했다. 그 여학생은 100차례 이상의 발작을 겪었고 가장 최근 발작은 지난해 가을에 있었다고 말했다.
약국에서 일반 의약품으로 판매하는 알레르기 억제제 베나드릴을 복용한 뒤 발작이 일어났다는 설명이었다. 베나드릴은 민감한 환자에게 발작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데빈스키가 안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몇 알이나 먹었지?”라고 그가 물었다. “열다섯 알이요”라고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취하려고 감기약을 많이 삼키듯이 베나드릴을 먹었어요.”
데빈스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 부모님 앞에서 약물과 알코올에 관한 강의를 하기는 정말 싫은데.” “엄마아빠는 이미 잘 알아요. 어제도 전 취해서 새벽 5시에 집에 들어갔어요.” 데빈스키는 그런 젊음의 무모함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가르쳐주려고 오랫동안 애써왔다.
약 복용을 까먹고, 학기말 리포트를 작성하느라 밤을 지새고, 보드카나 기침약을 마구 들이켜 자신을 ‘초정상’ 상태로 몰아가는 젊은이들의 자연적 성향을 말한다. 인간의 뇌는 그 모든 경이로움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큰 결점이 있다. 치명적인 발작 같은 미래의 위험을 도외시하고 현재의 쾌락을 찾으려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심리적 기벽 때문에 그의 환자 중 15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 10대나 20대였다. “2년 동안 발작이 없었던 환자가 있었지”라고 데빈스키가 그 여학생에게 말했다. “지난해 가을 전화를 받았어. 그가 대학에 진학해 어느 날 밤샘 파티를 했는데 다음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어. 너도 나중에 두 자녀의 엄마가 돼서 ‘언제 다시 발작이 오려나’ 하고 마음을 졸이며 살고 싶으냐?”
학습의 중요한 시기에 있는 어린이의 경우 약의 균형을 적절히 맞추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데빈스키는 초등학교 4학년짜리 딸을 가진 아버지에게 그런 문제를 제기했다. 그 아이는 하루에 두어 차례, 한 번에 5초씩 자각(의식 부재) 발작에 시달렸다. 그 아이는 이미 토파맥스, 케프라, 자론틴을 복용 중이었고 이제 라믹탈까지 복용하게 됐다.
데빈스키는 더 많은 약을 처방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각 발작이 겉보기에 심각하지 않은 듯하지만 학습과 행동에 미묘한 손상을 초래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책을 읽으려고 할 때 누군가가 계속 자기 팔을 가볍게 친다고 생각해 보라. 어른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결정적인 학습 시기에 이런 주의 산만이 계속되면 학습 기회를 놓쳐 만회하기 어렵다.
” 데빈스키는 그 아이의 아버지와 논의한 끝에 라믹탈 복용량을 늘리기로 했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약간의 변화라도 있으면 곧바로 알려달라고 신신 당부했다. 데빈스키는 기술을 경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술의 한계를 잘 안다. 그는 모든 첨단 스캐너와 촬영장비를 마음껏 사용해도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발작의 원인이 그런 장비로 확인되지는 않는다는 점도 잘 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도구는 EEG 기계다. 두피에 부착하는 전극봉을 통해 뇌 활동을 관찰하는 장치로 1929년 발명된 기술이다. 현재 간질 치료법은 몇 가지뿐이다. 그 치료법은 과학인 동시에 ‘예술’이기도 하다.
한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 방법이 똑같은 증상을 가진 다른 환자에게는 효과가 없는 경우가 잦다. 어떤 아이들의 경우 케톤생성 식이요법(지방을 많이 섭취하고 탄수화물은 아주 적게 섭취하는 다이어트로 치약에 함유된 당분조차 너무 많아 조심해야 할 정도다)으로 발작의 통제가 가능하다.
그 식이요법이 개발된 지 80년이나 됐지만 과학자들은 왜 발작 억제에 효과가 있는지 아직도 모른다. 게다가 환자의 약 3분의 2가 약물로 치료가 가능하지만 나머지는 약이 듣지 않는 이유도 모른다. 1960년대 이래 약 30가지의 약이 간질 치료제로 승인 받았다. 그러나 대다수 신경 전문의가 주로 사용하는 약은 약 10가지라고 데빈스키가 말했다.
새로운 약이 계속 개발되고 사용되지만 그 과정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간질 치료제 전문가인 캘리포니아대(데이비스) 신경 전문의 마이클 로고스키는 말했다. 신약들은 대개 기존 약보다 부작용이 적거나 독성이 약하다. 그러나 대체로 그 신약들도 기존의 약처럼 환자의 약 3분의 2에만 효과가 있을 뿐이다.
약이 듣지 않는 난치성 간질 환자의 수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환자가 어떤 약으로 혜택을 볼지 사전에 알기는 불가능하다. “한 사람을 면담하고, 모든 검사를 하고, 직접 발작을 목격해도 어떤 약이 효과가 있을지는 알기가 불가하다”고 컬럼비아대 간질 센터를 이끄는 칼 베이질이 말했다.
“뇌의 활동에 문제가 있겠지만 그게 뭔지 우린 모른다.” 많은 연구자가 다음의 중요한 발전은 신약이 아니라 ‘피하 펌프’의 개발이라고 생각한다. 신체의 다른 기관들을 우회해 뇌의 정확한 부위에 직접 약을 투여하는 장치를 말한다. 특히 10대들의 경우 약을 제때 복용하도록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 장치가 유용하다.
학교버스마저 놓치는 아이에게 약병을 어디 뒀는지 기억하도록 하기는 무척 힘들다. 데빈스키는 환자에게 한 번에 두 가지 약 이상을 처방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해도 10가지 약 중에서 두 약을 서로 다른 용량으로 혼합하는 방식은 거의 무한하다. 그러나 환자들의 신경세포 연결부가 복구 불능으로 손상되기 전에 신속하게 손을 써야 한다.
그가 휠레스를 처음 치료할 때는 데파코트를 사용했다. 그 약은 무기력감과 체중 증가의 부작용을 나타냈다. 그 다음에 데빈스키는 펠바톨과 라믹탈을 섞어 처방했다. 그래도 잘 듣지 않자 펠바톨과 케프라를 혼합 처방했다.
그러자 상태가 크게 호전됐다. 효과가 너무 좋아 데빈스키는 펠바톨에 따른 간부전과 재생불량성 빈혈로 사망한 환자가 나왔다는 보고가 발표된 뒤에도 휠레스에게 그 약을 계속 처방했다. 휠레스에게 효과가 매우 컸기 때문에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만하다고 판단됐고 그의 혈액 분석 결과를 면밀히 관찰하면 위험을 줄이는 일이 가능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데빈스키의 생각이 옳았다. 그러나 펠바톨-케프라 혼합 처방이 효과를 잃는다면 복용량을 늘리거나 다른 약을 처방해야 할지 모른다. 데빈스키는 휠레스의 수면 일정을 개선하고 그의 우울한 기분을 좋게 해 주고 싶어 한다. 우울증은 간질과 동반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우울증이 발작을 촉발하고 발작이 또다시 우울증을 부르기 때문이다.
그게 효과가 없다면 데빈스키는 또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한다. 이처럼 간질을 관리하는 일은 무척 힘들다. 그래서 환자들과 그 부모들은 치료법 연구를 간절히 원한다. ‘완치(cure)’는 데빈스키가 수전 액슬로드와 설립한 재단의 이름이긴 하지만 그는 그 용어 사용을 자제한다. 특히 환자 앞에서 그렇다.
그 말만 들어도 환자들은 약 복용을 중단할지 모른다. 그런 환자들은 얼마 후 새로운 발작으로 다시 그의 사무실을 찾는다. 물론 완치의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자연적이거나 무작위적이다. 간질을 앓는 어린이 중 약 절반은 나이가 들면서 발작을 극복하고 여러 해 뒤에는 약을 끊어도 무방하다.
이론적으로는 유전자 요법이 전신성 발작의 일부를 완치할 가능성이 있다. 그 첫 단계는 그런 증상을 일으키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확인하는 일이다. 현재 그 연구에 환자 수천 명이 참여했다. 그리고 역시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부분 발작은 뇌에서 해당 부위를 제거하면 치료될 가능성이 있다.
이 방법은 실제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 환자는 그 후에도 예방 차원에서 발작 억제제를 계속 복용한다. 간질 수술이 처음 실시된 지 한 세기도 넘었다. 그 이래로 수술 원칙은 잘 알려졌다. 발작이 시작되는 부위를 확인해 정확히 제거해야 한다. 물론 전신성 간질 환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뇌 전체를 제거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물론 아주 드물지만 뇌 절반을 제거하기도 하며 때로는 환자들이 놀라울 정도로 잘 이겨낸다). 워너 도일은 뉴욕대 간질 센터의 신경외과 의사 두 명 중 한 명이다. 그는 그곳과 세인트 바나바스 두 곳에서 연간 약 260건을 시술한다.
데빈스키가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려고 전체론적인 접근법을 취하는 반면 도일은 뇌 그 자체와, 병든 조직과 건강한 조직 사이의 아주 얇은 경계선에 집착한다. 도일은 절개 도구에 그 차이가 느껴질 때도 있다고 말했다. 정상적인 뇌는 부드럽게 절단되지만 반복된 발작으로 조직이 굳어졌을 때는 절단이 잘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외과 전문의들이 대개 그렇듯이 도일은 자신이 두개골 안에서 동원하는 손재주를 믿는다. 그에게 지적인 어려움은 발작의 초점을 찾아내 발작이 퍼지는 네트워크를 추적하면서, 영향을 받지 않는 부위의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다. 그 기본 도구는 EEG다. 그러나 장치는 약 20개의 외부 선으로 이어져 뇌를 3차원으로 측정하기에는 아주 성가신 수단이다.
그래서 뇌 속에 삽입해 최대 200개 지점의 측정이 가능한 두개골 내부 전극봉이 동원되기도 한다. 이 전극봉을 삽입하려면 두개골을 열어야 하며 상당한 기술과 시간(6〜7시간)이 필요하다. 실제 수술에 필요한 시간과 맞먹는다. 환자는 메두사 형상처럼 머리에 전선을 달고 일주일 이상 입원해야 하며, 의사들이 전형적인 발작을 기다리는 동안 EEG와 비디오로 지속적인 관찰을 받아야 한다.
그런 다음 도일이 수술을 시작한다. 종양 등 다른 신경외과 수술과 달리 간질 수술은 일반적으로 건강한 신체에 행해지기 때문에 병약한 신체에 손을 대는 만큼 위험이 크지는 않다. 그러나 도일은 그 분야의 미래가 조직 제거와 절단 수술이 아니라 전자 장치를 통한 뇌 기능의 강화에 달려 있다고 믿으며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 장치의 1호인 미주(迷走)신경 자극기가 1997년 이래 사용돼 왔다. 지금까지 5만 개 이상이 이식됐다. 목 부위의 미주신경을 통해 뇌에 전기 신호를 보내 초기단계의 발작을 막는 게 목표다. 이 역시 왜 효과가 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효과가 좋다. 파킨슨병 치료에서 효과가 있는 뇌심부 자극술도 뇌에 직접 자극을 가해 똑 같은 작용을 하게 돼 있다.
그러나 간질 환자에게 실시된 뇌심부 자극 임상시험은 지금까지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미주신경 자극기는 그보다 원시적 도구로 몇 분의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정해진 시간에 적은 양의 전류를 전달한다. 지금 연구자들은 뇌에 이식돼 ‘발작이 시작될 때를 감지하는’ 반응장치를 개발 중이다.
“필요한 부위에 소량의 약물이나 전기 자극을 전달하려는 의도”라고 미국 간질학회 회장이며 하버드대 신경과 전문의인 스티븐 섀츠터는 말했다. 그런 장치 개발의 열쇠는 발작의 예측이 가능한 컴퓨터 알고리즘이다. 발작이 시작되기 전의 ‘전조(前兆)’기에 예측을 해야 이상적이다.
우리는 컴퓨터로 무한한 정보의 처리가 가능하다는 생각에 젖어 있다. 그러나 뇌는 정보 이론의 한계를 넘어선다. 신경세포 1000억 개가 각각 1만개의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구 노력은 치명적인 질병을 상대로 한 대담한 공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데빈스키가 의과대학생 시절 가졌던 꿈이 바로 그런 공격이었다. 간질을 정복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뇌보다 꾀가 더 뛰어나야 한다.
With SARAH KLI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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