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 따돌린 양용은의 ‘무심타’가 뭐기에
우즈 따돌린 양용은의 ‘무심타’가 뭐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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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세계 여자프로골프 LPGA 메이저 대회인 US오픈에서 박세리가 양말을 벗고 연못으로 들어갔다. 다시 없을 것 같은 감동의 순간을 우리는 양용은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양용은은 동양인 최초로 메이저 골프대회(제91회 PGA챔피언십)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세계 랭킹 110위 양용은이 절대 지존 타이거 우즈를 꺾을 수 있었던 비결은 초연함이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절대 반지를 파괴하는 막중한 임무는 흰 수염 날리는 지혜로운 마법사 간달프가 아니요, 뛰어난 검객이면서 통솔력도 갖춘 아라곤도 아닌 난쟁이 종족의 프르도가 맡았던 것처럼 말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라
‘70대 1.’ 양용은이 타이거 우즈와 맞붙는 마지막 라운드에 임하는 자세였다.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는 메이저 14승에 미국PGA투어 70승을 쌓아 올렸다. 반면 일본투어와 유러피언투어를 떠돌던 양용은은 지난해 PGA투어 상금 순위 157위였다. 지난해 말 Q스쿨에서 공동 18위 턱걸이로 올 시즌 시드를 받았고, 3월 ‘혼다클래식’ 우승이 고작이었다.
우승 인터뷰에서 그는 ‘잠을 잘 못 잤지만 1번 홀에 섰을 때 평정심을 찾았다’고 털어놓았다. “내가 지금껏 꿈꿔오던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이건 골프 게임이니까 타이거 우즈하고 싸울 것도 아니고, 그가 아이언 들고 나를 칠 것도 아니니까.” 캐디였던 A J 몬테치노스도 똑같이 느꼈나 보다.
“양용은은 떨지 않았다. 정말 세계 정상급 선수였다. 왜냐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으니까.” 이런 걸 손자병법에서는 배수의 진(背水陣)이라 하던가? 마지막 날 라운드는 골프황제보다 2타 뒤진 채 시작되었다. 배짱 혹은 무심 타법을 전략으로 삼고 말이다. 아니 그건 전략조차 아니었을 거다.
이번 경기서 양용은도 고비가 많았다. “파5 11번 홀에서 나는 세 번 만에 그린에 볼을 올렸는데 타이거 우즈는 두 번 만에 볼을 올렸고 가볍게 버디를 잡았다. 그 순간 나와 타이거 우즈가 다른 점이라고 생각했고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다음 홀에서 타이거 우즈가 보기를 하고 나는 파로 막으면서 가능성을 보았다.”
양용은은 어둠 속에서 비추는 한 줄기 약한 빛을 찾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지난해 7번 연속 컷 탈락을 한 뒤 그립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바꾸기로 했다. 미국 무대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길밖에 없다고 마음먹었다. 생애 처음으로 전담 코치를 두고 마음을 비워 그립부터 고치기로 했다.
이전까지 스트롱 그립이었으나 스퀘어 그립으로 바꾸는 등 새로 시작하는 마음가짐이었다. 다행히 200야드 전후의 하이브리드 샷은 4일 내내 잘 맞았다. 대회 동안 두 개의 이글을 잡았다. 필 미켈슨도 2개의 이글을 잡았으나 그는 더블보기를 3개나 범하면서 73위에 머물렀다.
대회 중 양용은의 그린적중률(GIR)은 72홀 중 55개로 1위였다. 버디도 15개를 잡아 공동 7위였다. 반면 더블보기는 단 1개에 그쳤다. 이렇게 착실한 스코어를 바탕으로 첫날 44위이던 순위는 둘째 날 공동 9위로, 셋째 날은 공동 2위까지 뛰어올랐다.
마지막은 모험을 걸어라
하지만 타이거 우즈는 양용은을 상대로 여기지 않는 듯했다. 마지막 날 승부의 관건은 앞 조에 있던 메이저 3승의 포드릭 해링턴이나 세계 랭킹 7위의 헨릭 스텐슨에게 두었지 양용은은 후보에도 없는 존재였다. ‘나는 적을 알지만 적은 나를 잘 모르는 상황’이다. 양용은의 역전 드라마는 그렇게 한 홀 한 홀 전개되고 있었다.
타이거 우즈가 앞서면 양용은이 간신히 따라잡는 경기 양상은 14번 홀에서 극적으로 역전된다. 3일 동안 352야드이던 이 홀이 마지막 라운드에서는 301야드로 짧아졌다. 양용은은 전날까지 두 개의 버디를 잡았던 행운의 홀이기도 했다. 우즈는 티샷 한 방으로 온그린을 노렸으나 벙커에 빠졌다.
양용은의 샷은 그린 못 미친 벙커 바로 옆 러프에 걸렸다. 타이거 우즈의 벙커샷은 홀 옆 2.5m 지점에 떨어지면서 또 한 번의 버디 기회가 왔다. 다음은 양용은 차례. 20여m를 남기고 친 칩샷. 볼은 그린 위에 사뿐이 내려앉더니 10여m를 굴러 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타이거 우즈의 기를 한 번에 꺾은 기적 같은 이글이었다. 양용은이 프로가 되어 첫 우승을 하던 2002년 SBS최강전도 이와 비슷했다. 당시 최강으로 꼽히던 최상호, 박노석 프로와 연장전 첫 홀에서 그는 이글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겨야겠다는 생각 없이 편안했습니다. 브레이크를 읽은 뒤에 그냥 스트로크 했죠. 기적이었습니다.”
다시 이번 PGA챔피언십. 마지막 18번 홀은 양용은이 한 타 앞선 채 시작됐다. 티샷은 타이거 우즈가 월등히 좋았다. 그린을 바로 공략할 수 있는 좋은 지점이었다. 양용은의 볼은 핀까지 203야드를 남겨둔 페어웨이를 벗어난 러프였다. 2005년부터 올해까지 우승한 29개 대회에서 타이거 우즈의 최종 라운드 평균 타수는 68.03타였다.
타이거 우즈와 마지막 라운드에서 맞붙었던 선수들의 평균 타수는 72.5타로 무려 5타의 격차가 벌어졌다. 자칫하면 동타로 플레이오프를 치르거나 반대로 역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선두로 나선 대회 마지막 라운드에서 단 한 번도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던 공포의 빨간 셔츠 타이거 우즈와 맞붙었다.
그리고 한 타 앞선 상황에서 쉽사리 모험을 걸 수는 없다. 볼을 그린 주변으로 보낸 다음 어프로치를 핀에 붙여 파를 잡는 전략을 써야 할까? 양용은은 3번 하이브리드 우드를 잡았고 그대로 질렀다. 높이 치솟은 볼은 그린 앞의 높고 울창한 나무를 훌쩍 넘어 핀 옆에 떨어지더니 2m 지점에 멈췄다.
타이거 우즈 앞에서 타이거 우즈나 할 법한 과감한 샷을 날리다니. 함성이 일었다. 그리고 환상적인 끝내기 버디 퍼트. 이 상황을 지켜본 타이거 우즈는 씁쓸한 표정으로 파 퍼트를 놓치더니 보기로 마무리했다. 타이거 우즈의 전유물과 같았던 우승 후의 어퍼컷 세리머니를 그는 괴성까지 질러가면서 마구 해댔다.
캐디백을 번쩍 들어올리기도 했다. 미국 언론들은 ‘타이거 우즈보다 더 타이거 같다’고 표현했다. 어떤 이는 ‘100m 달리기 시합에서 우사인 볼트를 10m 앞에서 달리도록 해 이긴 것과 같다’고 했다. 폭스스포츠는 ‘마이클 조던이 NBA 결승 7차전에서 종료 버저와 함께 덩크슛을 내리꽂은 것과 같은 충격’이라고 표현했다.
아직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한 서구인들에게 우리는 할 말이 있다. 우리 골퍼들은 예전부터 이런 걸 ‘무심 타법’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전망이 불투명하거나 위기 상황에서 한국인이 어려움을 극복한 방법은 70대 1에 맞붙는 배짱, 아직 12척의 배가 남았다는 긍정의 마인드, 이겨야겠다는 생각을 떨친 평정심, 이런 것이 한데 모아진 타법이 바로 무심한 듯 쳐내는 무심 타법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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