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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관 구실로 조선 이권사업 개입해 돈벌이

차관 구실로 조선 이권사업 개입해 돈벌이

해방 이전 주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독일제 ‘세창 바늘’은 아무리 오래 써도 부러지지도, 녹슬지도 않는 마술과도 같은 바늘이었다. 1884년 인천에서 독일인이 설립한 세창양행은 바늘, 금계랍, 염료, 석유 등을 앞세워 조선 소비자를 공략했다. 하지만 정작 세창양행의 주요한 수입원은 조선 정부를 상대로 한 대규모 이권 사업이었다.

인천 외국 조계에 위치한 세창양행 사택.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

세창양행(E. Meyer & Co.)은 1883년 조선과 독일의 수교 이후 조선에 진출한 최초의 독일계 상사였다. 공동 사주(社主) 마이어(H. C. Eduard Meyer)는 1841년 함부르크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뉘른베르크 교외의 장난감 수출업체에서 상인 수업을 받았다.

18세에 중국으로 이주해 22세에 동생과 함께 홍콩에서 조그마한 무역업체를 경영하면서 자본을 축적했다. 32세가 되던 해인 1873년 톈진에 마이어 상사(E. Meyer & Co.)를 설립했다. 마이어 상사는 성장을 거듭해 함부르크, 런던, 홍콩, 인천, 톈진, 한커우(漢口) 등에도 지사를 설립했다.

세창양행은 마이어와 볼터(Carl A. Wolter)가 합작으로 인천에 설립한 마이어 상사의 현지법인이었다. 마이어는 주로 함부르크에 거주하면서 유럽-동아시아 무역을 총괄했고, 세창양행의 경영은 인천에 거주하는 볼터가 주로 담당했다. 사업 초기 마이어 상사는 영국산 섬유제품과 독일산 잡화를 동아시아에 판매했고, 중국산 면화와 담뱃잎을 유럽에 수출했다.

이후 아시아 연안 항해회사를 설립하고 증기선 4척을 도입해 승객과 화물을 운송했다. 수마트라의 석유를 실어다가 중국과 조선에 판매하기도 했다. 1900년 이후 제조업에도 진출해 한커우에 동유(桐油: 도료의 원료), 참기름, 에나멜 생산 공장을 건립했다. 중국에서 석탄을 판매하기도 했으며, 중국과 조선산 쇠가죽이나 물소 가죽을 유럽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독일에서 전선과 전신선을 수입해 동아시아 각국에 판매해 큰 이윤을 남겼고, 1910년대에는 지멘스(Siemens)와 합작으로 난징의 전차선로 가설권을 획득하기도 했다. 1884년 5월 인천에서 세창양행이 설립되었을 때, 조선의 외교·통상·관세·재정은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주도하고 있었다.

중국 주재 독일영사관에서 근무하던 묄렌도르프는 1882년 연말 청국 북양대신 리훙장의 추천으로 조선에 부임했고, 통리기무아문 협판(외교부 차관), 해관 총세무사(관세청장), 전환국 총판(중앙은행장)을 차례로 겸직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 경제를 근대화시키기 위해 차관 도입, 농업 개혁, 물류 시스템 정비, 광산 개발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일으킨 사업은 대부분 세창양행이 대행했다. 사업 초기 세창양행은 독일산 바늘, 염료, 금계랍(金鷄蠟: 염산키니네), 영국산 면제품을 수입했고, 조선산 쇠가죽, 쌀, 콩 등을 수출했다. 해열 진통제인 금계랍은 학질 치료에 탁월한 효험을 보였고,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얇고 견고한 세창 바늘은 주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세창 염료는 갑오경장 이후 양복이 대중화하면서 판매가 급등했다. 조선을 찾은 대부분의 외국인이 경험한 것처럼 세창양행 사주 볼터도 사업 초기에는 조선의 기형적인 통화제도 탓에 고전했다.

1달러는 엽전 500닢과 교환되었는데, 200달러 정도만 판매해도 엽전 10만 닢이 2피트 가까이 수북이 쌓였다. 금괴 역시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어서 신뢰하기 어려웠다. 그 때문에 볼트는 소매 거래에서 곡물이나 쇠가죽 등으로 물물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묄렌도르프의 지원으로 승승장구


인천 외국 조계. 산 정상에 위치한 건물이 세창양행 사택.
대중에게는 소비재 판매로 ‘세창’이라는 상표가 각인되었지만, 세창양행의 주요한 매출은 정부를 상대로 한 이권 사업에서 이루어졌다. 1885년 세창양행은 묄렌도르프의 주선으로 조선 정부와 기선 임대 계약을 체결했다.

세창양행이 조선 정부를 대신해 기선을 임대해서 상하이, 부산, 인천, 목포 등을 왕복하며 세미(稅米)를 운송하는 계약이었다. 세창양행은 운항수수료 5%와 이윤의 절반을 얻었다.

세창양행은 묄렌도르프가 주도한 전환국에 독일산 조폐 기계를 조달했고, 기술자 초빙에도 관여했다. 전환국에 초빙된 디트리히트(C. Diedricht), 크라우스(F. Kraus), 리트(C. Riedt) 등 3명의 독일인 기술자는 모두 세창양행이 주선한 인물이었다. 1885년 연말 묄렌도르프가 실각한 이후 크라우스가 전환국 총판 자리를 물려받아 세창양행은 조선 정부를 상대로 한 사업에서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1886년 세창양행은 자체 자금 2만 파운드를 조선 정부에 차관으로 제공하고, 매년 3만 섬의 세미를 운송할 권리를 획득했다. 관세를 담보로 설정했고, 매년 10%의 이자를 받기로 했으므로 세미 운송권은 말 그대로 덤이었다. 그해 12월 목포항에 집하된 세미가 없어 세 차례나 빈 배로 운항하게 되자, 세창양행은 조선 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해 5000원을 받아냈다.

1887년 세창양행은 조선 정부에 연리 12%의 고리로 차관을 제공하고 독일 기선 2척의 구매를 대행했다. 세창양행은 조양호와 창룡호라 명명된 두 기선의 운항 역시 대행했다. 세창양행이 자체 자금으로 사서, 자체적으로 운항한 기선 사업에 조선 정부가 차관을 얻어 명의를 빌려준 셈이었다.

이런 이상한 계약 덕분에 세창양행은 세금을 면제받았고, 이익은 자신이 챙기면서 위험은 조선 정부에 전가시켰다. 조선 정부는 관세 수입으로 매년 7000원씩 상환하기로 했는데, 상환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세창양행은 항의 표시로 두 기선에서 조선 국기를 내리고 독일 국기를 달고 운항하기도 했다.

조선 정부는 5년 후 청국 차관(동순태 차관)을 얻어 세창양행 차관을 상환하지만, 이 두 기선의 운항은 세창양행이 계속 대행했다. 같은 해 세창양행은 자체 자금 3만4000원을 조선 정부에 차관으로 제공하고 부산항 전선 가설 자재를 납품했다. 세창양행은 이 한 건의 거래로만 이자에다 수수료까지 원금의 30%에 달하는 1만원의 이윤을 얻었다.

하지만 세창양행이 조선 정부를 상대로 한 이권 사업에서 이익을 얻은 것만은 아니었다. 사업 초기 세창양행은 운산금광 채굴권을 얻고자 했지만, 10년에 걸친 교섭 끝에 운산금광 채굴권은 미국인 모스에게 넘어갔다. 그 대신 세창양행은 1898년 당현금광 채굴권을 획득했다.

세창양행은 독일에서 대규모 투자를 받아 저먼신디케이트(Ger man Syndicate)를 조직하고 대대적으로 채굴에 나섰지만, 100만원 상당의 손실을 보고 6년 만에 철수했다. 세창양행은 제주도와 남해안의 전복 채취권과 경원선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려고 노력했으나, 그 역시 실패했다.

이처럼 세창양행이 손실을 입은 사업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선 정부를 상대로 한 이권 사업 전체를 놓고 보자면 매년 엄청난 액수의 흑자를 보았다.



바늘에서 무기까지 돈 되는 것은 뭐든 판매


세창양행 금계랍 광고. (황성신문, 1903년 4월 3일)
세창양행은 바늘, 염료, 약품, 장신구, 담배, 양주에서 석유, 인쇄기계, 무기까지 돈 되는 것은 뭐든 수입해 팔았다. 해운업에 뛰어든 이후 홍삼의 독점 수출권을 확보하려고 시도했으나, 위안스카이의 강력한 반대로 실패했다.

수입액이 늘어나면서 관세를 면제받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개발했다. 견본품, 영사관에서 사용할 물품, 조선 정부가 주문한 물품 등 갖은 구실로 관세를 면제받았다.

1890년대 이후 일본, 미국, 영국계 회사와 경쟁이 치열해지자, 대대적인 광고와 판촉 활동에 나섰다. 1899년에는 한국인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상표를 태극문양으로 변경하려다 대한제국 정부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1900년 서울 지점을 설치한 이후에는 광둥 유니언 보험회사, 뉴욕 생명보험 등의 대리점 역할도 수행했고, 미국 보든사(社)의 우유제품 판매를 대행하기도 했다.

세창양행 공동 사주 볼터는 1885년에서 1907년까지 22년간 조선에서 사업하면서 2남 6녀를 낳아 길렀고, 서울과 인천에 막대한 토지를 소유했다. 볼터는 ‘제물포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경제력을 과시했다. 1898년 덕어학교(德語學校)가 설립되자 경제적으로 후원했으며, 1899년 독일 하인리히 황태자의 방한을 주선하기도 했다.

1900년에는 한·독 관계에 기여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독일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1907년 볼터는 마이어와 동업 관계를 청산하고 세창양행을 단독으로 경영했다. 세창양행의 한국어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영문 표기는 E. Meyer & Co.에서 Carl Wolter & Co.로 변경되었다.

그해 볼터는 건강이 나빠져 세창양행 경영을 독일인 지배인에게 맡기고 독일로 귀국했고, 1916년 독일에서 사망했다. 세창양행은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독일인의 출자가 동결되면서 타격을 입었지만, 6·25전쟁 발발로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명맥은 유지되었다.
“對 조선 수입품 영사관 용품 명분 관세 면제”
초대 함부르크 주재 한국 총영사 마이어

세창양행 사주 마이어(오른쪽 앞줄)와 인천해관 직원.
개항 초기 조선은 외국인을 해당 국가 총영사에 임용하기도 했다. 최초의 외국인 총영사는 1884년 1월, 뉴욕 주재 조선 총영사로 임명된 프레이자(Everett Frazar)였다. 프레이자는 오랫동안 대(對)아시아 무역에 종사했고, 1883년 미국을 방문한 민영익 일행을 수행하며 조선과 인연을 맺었다. 프레이자는 조선 주재 미국 공사 푸트에게 자신이 무급 총영사에 임용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고, 고종은 푸트의 건의를 받아들여 프레이자를 뉴욕 주재 조선 총영사에 임명했다.
1886년 1월, 서울 주재 독일 부영사 부들러(Budler)는 세창양행 공동 사주 마이어를 함부르크 주재 조선 총영사로 임명해 줄 것을 건의했다. 조선 정부는 상인에게 총영사를 대리시킬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부들러가 재차 간청하자 그해 3월 마이어를 함부르크 주재 조선 총영사에 임명했다. 그 후 마이어는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외교권을 상실할 때까지 20여 년간 조선 총영사 직함을 유지했다.
당시 함부르크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마이어의 총영사 직위는 사실상 명예직이었다. 하지만 마이어의 총영사 직위 덕분에 세창양행은 독일로 수출하는 물품 대부분을 영사관 용품이라는 명분으로 수출세를 면제받았다. 마이어가 총영사로서 공식적으로 수행한 임무는 1889년 함부르크 산업박람회에 조선 물품을 출품하고, 1894년 함부르크 미술공예박물관에서 조선 전시회를 개최한 것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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