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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한 관노에서 군수로 벼락 출세

천한 관노에서 군수로 벼락 출세

한때 대전 토지의 40%를 소유한 거부가 있었다. 공주 감영의 관노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뎌 6개 군에서 군수를 지낸 입지전적 인물 김갑순이 그 주인공이다. 그가 대전과 충청도 일대에 소유한 토지는 무려 1000만 평에 달했다. 가난한 국밥집 외아들이 어떻게 그 어마어마한 토지를 긁어 모을 수 있었을까?
▎한때 대전 토지의 40%를 소유했던 김갑순.

▎한때 대전 토지의 40%를 소유했던 김갑순.

1906년 신임 군수의 부임을 앞두고 공주 동헌(東軒)의 아전과 장교들은 유달리 분주했다. 신임 군수를 맞을 채비를 하느라 분주한 것이 아니었다. 신임 군수를 배척하기로 의기투합하고 통문을 돌리느라 분주했던 것이다.

“아무리 문벌이 폐지되고, 재물만이 행세하는 시대라지만, 세칭 ‘홍전문(紅箭門) 안 사대부’인 우리들이 어찌 관노(官奴)에게 소인이라 칭하고 엎드려 복종하겠느냐. 군수가 부임하더라도 아무도 나타나지 마세. 만일 나타나는 자는 누구든 집을 부수고 밟아 죽이세.”



세금 징수하며 ‘검은 돈’ 축적신임 군수 김갑순은 사나흘 동안 텅 빈 동헌을 혼자 지키다 부득이 서울로 올라와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자신을 배척하는 아전과 장교들을 어떻게 구슬렸는지 알 수 없지만, 보름 후부터 김갑순이 이끄는 공주 동헌은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어린 시절 공주 감영의 미천한 관노였던 김갑순이 35세에 고향의 군수로 금의환향했을 때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김갑순은 1872년 공주에서 김현종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과 형이 요절해 13세에 호주가 되었다. 모친은 공주 장터에서 국밥을 팔아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고, 그는 어려서부터 공주 감영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그 후 29세 때까지 김갑순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주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확인할 길 없는 몇 가지 회고담이 전해질 뿐이다. 15세에 상경해 누군가의 천거로 황실 재정을 총괄하던 이용익 밑에서 심부름을 하다가 재주를 인정받아 봉세관(封稅官: 세리)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느 날 김갑순이 투전판으로 노름꾼을 잡으러 갔다가 미모의 여인을 만나고 그녀를 충청 감사에게 소첩으로 바치고 총순(總巡: 경찰 간부)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구한말 ‘관헌 이력서’에 나타난 김갑순의 첫 벼슬은 1900년 충청북도 관찰부 주사였다. 하지만 두 달 만에 의원면관(依願免官)되었고, 김갑순의 자필 이력서에도 빠져 있어 실함(實銜: 실제 벼슬)이 아니라 차함(借銜: 허울뿐인 벼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한 달 동안 역임한 중추원 의관(議官)도 차함이었을 공산이 크다.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30세를 전후로 그는 벼슬을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모은 것은 확실하다. 김갑순은 1901년 내장원 봉세관에 임명돼 첫 번째 실함을 얻었다. 내장원은 황실의 재정을 총괄하던 기관이었고, 봉세관은 지방에 파견돼 세금 징수를 독려하던 관직이었다.

세금을 만지다 보니 ‘검은 돈’을 축적할 기회도 늘어났다. 김갑순은 봉세관으로 근무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부여 군수 실함을 살 수 있을 정도로 게걸스럽게 ‘검은 돈’을 축적했다.



김갑순 사주로 만인산 만들어그 후 1911년까지 김갑순은 부여, 노성(논산시 노성면), 임천(부여군 임천면), 공주, 금화, 아산 등 6개 군 군수를 역임했다. 군수로 재직한 10년 동안 그는 가렴주구를 일삼아 거부(巨富)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재산을 축적했다.

부여 군수로 재임하는 동안 상인의 쇠가죽 1000여 장을 강제로 빼앗아 내부(內部)의 감찰을 받았고, 노성 군수로 있는 동안 매부를 봉세관으로 임명해 세금을 과다 징수하다가 물의를 빚었다. 공주 군수로 재임할 때는 일본인의 청탁으로 사유 토지를 헐값에 방매해 민원을 야기하는 등 김갑순은 부임하는 곳마다 군민(郡民)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가 다른 임지로 떠날 때면 군민들은 만인산(萬人傘)을 만들어 바치고, 신문 광고를 게재하는 등 그의 ‘송덕’을 기렸다. 만인산은 선정을 베푼 수령에게 그 덕을 기리기 위해 바치던 양산이었다.

“공주 군수 김갑순씨 치적은 작년 수해에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막급할 때 친히 현장을 찾아가 구제하고, 세금을 반감하여 사비를 털어 채워 넣었으며, 행정이 염직(廉直)하시기에 군민들이 감사함을 이기지 못하여 송덕을 기리기 위해 만인산을 조성했기에 이를 광고함.” (‘황성신문’, 1907년 3월 21일자)

이듬해 공주 군민 임학수는 ‘황성신문’에 김갑순의 선정은 ‘활불(活佛)’에 비견될 만하다는 내용의 광고를 게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충청남도 감영의 감사 결과 만인산 제작이나 광고 게재는 김갑순의 사주에 의한 것임이 드러났다. 한일병합 직전 통감부는 민심 회유책으로 1908년 이전의 모든 지세, 1909년 이전에 빌려준 모든 사환미(社還米)를 탕감한다고 공표했다.

▎대전 시가 전경. 대부분 김갑순의 소유였다.

▎대전 시가 전경. 대부분 김갑순의 소유였다.

탕감액은 무려 400만원에 달했다. 당시 지방 관리들은 지세와 사환미를 징수하고도 중앙정부에 납부하지 않고 유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통감부는 민심을 회유하기 위해 탕감령을 내린 것이지만, 정작 그 혜택은 전국 360여 명의 군수에게 돌아간 셈이었다. 김갑순은 아산 군수로 재직하던 시절 독직 사건에 연루돼 삭탈관직될 위기에 처했지만 한일병합을 계기로 면죄부를 받았다.

그와 더불어 체불 국세 탕감령으로 유용한 지세와 사환미를 합법적으로 착복하는 행운도 누렸다. 1911년 아산 군수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김갑순은 충청남도 참사(參事),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했고, 공주읍회 회원 2회, 충남도회 회원 4회, 충남 농회(農會) 부회장, 수리조합장, 조선박람회 평의원 등을 지냈다.

병합 이후 맡은 공직은 실권이 있는 자리가 아니었지만, 이를 통해 김갑순은 권력자들과 친분을 유지할 기회를 얻었다. 아산 군수를 끝으로 고향인 공주로 돌아왔을 때 김갑순은 충청도에서 손꼽히는 거부였다. 하지만 그는 그 정도로는 만족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재산을 불리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구상했다.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인 것은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지닌 대전의 토지였다. 1905년 경부선 간이역이 들어설 때만 해도 대전은 한밭이라 불리던 상주인구 180여 명에 불과한 한미한 시골 마을이었다. 대전은 1914년 호남선이 그곳을 기점으로 이어지고 난 이후에야 교통의 요지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권력자들과 친분을 이용해 대전이 호남선 기점이 될 것이라는 정보를 빼낸 김갑순은 대전 시가지로 개발될 토지를 닥치는 대로 매집했다. 식산은행에서 연리 5%의 저리로 90만원을 대출받았고, 지방 부호들의 돈도 끌어들였다.



대전 토지 선취매로 전국적 부호로 떠올라부호들은 공주에서 가장 큰 집에서 살고, 권력자들과 친분도 돈독한 김갑순에게 안심하고 돈을 맡겼다. 김갑순은 남의 돈으로 헐값에 대전 토지 22만 평을 쓸어 담았다. 대전 전체 토지의 40%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토지가 그의 손에 떨어졌다. 황무지와 다름없던 대전 토지는 호남선이 개통하면서 상승세로 돌아섰다.

하지만 김갑순은 대전 토지 가치를 더 끌어올리기 위해 관료들을 상대로 충남 도청 이전 로비를 벌였다. 그는 도청을 비롯한 관공서 부지를 무상으로 헌납하기로 약속한 끝에 1932년 기어이 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시켰다. 경부선 개통 이전 평당 1~2전 하던 대전 토지는 도청 이전 이후 100원 이상으로 치솟았다.

30여 년 만에 1만 배 폭등한 셈이었다. 충청도 지방 부호였던 그는 일약 전국적인 부호로 떠올랐다. 그에겐 대전 토지 외에도 공주, 예산 일대에 1000만 평의 토지가 있었다. 공주와 대전은 김갑순의 땅을 밟지 않고는 돌아다닐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그의 땅을 관리하는 마름만 30~40명, 소작인은 수만 명에 달했다.

그는 매년 3만 섬 정도의 추수를 얻었지만, 소작료를 선납하게 하거나 지세를 소작인에게 대납하게 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해 소작인들을 착취했다. 김갑순은 기업가로도 수완을 발휘했다. 공주~대전, 공주~천안 간 자동차 운송업에 뛰어들었고, 대전극장과 공주 금강관 등 영화관을 경영했다.

또 공주읍내에 시장을 조성해 200여 점포를 임대했으며, 유성온천주식회사를 설립해 유성온천을 개발했다. 일본어로 간행된 전국지 조선신문사를 인수해 경영하기도 했다. 김갑순은 자신의 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정·재계 유력인사들과 친분을 쌓아나갔다.

총독부 고관이 공주에 오면 으레 집으로 데려와 대접했고, 꼭 만나야 할 고관이 만나주지 않으면 순금 명함갑이나 순금 화병을 뇌물로 건네는 방법을 써서 기어이 만났다. 인맥 쌓기에는 정략결혼도 이용되었다. 김갑순은 7남 4녀를 두었는데, 결혼 전 사망한 두 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세도가 집안의 자녀들과 혼인시켰다.

큰아들은 내장원경을 지낸 김윤환의 딸과 혼인시켰고, 일곱째 아들은 이완용의 증손녀와 혼인시켰다. 큰사위는 윤치호의 5촌 조카 윤명선이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그가 쌓은 인맥은 김갑순의 몰락을 막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돼 공주 출신 제헌국회의원 김명동에게 신문을 받는 수모를 겪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김명동에게 당한 수모를 갚기 위해 두 아들과 장손을 각각 지역구를 달리해 출마시켰지만 엄청난 선거비용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조리 낙선했다. 농지개혁 과정에 그의 토지는 대부분 유상 몰수돼 흩어졌다. 부호로서 그의 명성은 해방 이후 조금씩 퇴색했지만, 김갑순은 1960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남부럽지 않은 부를 누렸다.

하지만 그의 사후 한 세대를 거치면서 그의 유산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 그는 갖은 불법과 편법을 동원해 재산을 불려나갈 줄만 알았을 뿐, 어지간한 외압으로는 흔들리지 않는 건실한 사업체를 일으키지도, 재산을 대대로 이어나갈 후계자를 키우지도 않은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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