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쓴 책, 나오자마자 드러누운 까닭?
사장님 쓴 책, 나오자마자 드러누운 까닭?
대형서점에 가면 이른바 ‘드러누운’ 책들이 있다. 대형서점의 각 평대는 ‘신간도서’ ‘자기계발서 인기도서’ 등 주제에 따라 구성되는데, 평대에 누워있는 책들은 아무래도 사람들의 관심을 더 받게 마련이며 다른 도서들에 비해 관심을 받고 있는 책일 가능성이 높다.
대형서점에 가 평대에 비치된 책들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최신 트렌드와 대중의 관심사를 가늠할 수 있다. 최근 이 드러누운 책들 중 눈길을 끌고 있는 것이 바로 CEO가 직접 쓴 책이다. 최근 몇 주 경제경영 또는 자기계발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CEO가 저자로 나선 도서들이 속속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승한 홈플러스 회장의 『창조 바이러스 H2C』,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의 『긍정이 걸작을 만든다』의 경우 특히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미 『창조 바이러스 H2C』는 예스24, 교보문고 등 각종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5위권 내에 진입했을 정도다. 이들뿐 아니다.
올해는 유난히 유명 CEO들의 책 발간이 많았던 해다. 최근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이 『장수경영의 지혜』 란 책을 발간했으며 6월에는 이철우 롯데백화점 사장이, 2월엔 손욱 농심 회장이 경영 에세이집을 발간했다. 그 밖에 기은캐피탈 현병택 대표, 천호식품 김영식 대표 등도 저자대열에 합류했다.
금융위기로 어느 때보다 바쁜 시간을 보냈을 이들이 직접 책을 쓴 이유는 직원과의 소통 강화, 회사 대외이미지 제고 등 여러 가지에서 찾을 수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대중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는 것이다.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은 『장수경영의 지혜』를 통해 “많은 나이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좌절감과 패배감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은 평소 책으로 위기를 딛고 오늘의 웅진을 만든 자신의 이야기를 한번 책으로 정리하고 싶다고 이야기해 왔는데 드디어 올해 그 열매를 맺은 것이다. 위와 같은 취지에서 최근엔 책을 준비하는 CEO 모임도 생겼다. 인간개발연구원 소모임 ‘책 쓰기를 위한 에세이클럽’은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갖고 책을 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김창송 성원교역 회장, 유상옥 코리아나 회장, 장만기 인간개발연구원 회장, 한승호 이노비즈 회장 등 35명의 CEO가 회원이다. 수필가나 시인을 초청해 글 쓰는 방법에 대해 수업도 듣고 서로의 글에 대해 조언해주는 등 책을 쓰기 위한 노력을 1년 가까이 지속하고 있다.
책 준비하는 모임도 등장CEO의 성공과 실패담에 대한 독자들의 호응도는 높은 편이다. 교보문고 광화문점 양현정 북마스터는 “예전에는 자기계발서들이 우화형 자기계발서나 생각을 변화시키는 그런 내용들을 담았다면, 최근의 특징은 이미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담을 일반 독자들이 많이 찾는 추세”라고 말했다.
예스24의 임수정 팀장은 “성공한 경영자로 일컬어지는 CEO의 성공비결이나 경영마인드를 알기 위해 CEO가 직접 저술한 책이 인기를 끌고 있으며, 특히 직장인 독자의 주목을 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 최근 나온 CEO가 쓴 책들의 내용을 보면 실제 직장인들이 참고할 만한 성공의 덕목들이 현장의 체험을 바탕으로 서술돼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승한 회장은 그의 책에서 삼성그룹 공채 11기로 입사해 1999년 삼성테스코 홈플러스의 창립자 겸 초대 CEO가 되기까지, 업계 꼴찌인 12위에서 출발한 홈플러스를 4년 만에 업계 2위로, 10년 만에 매출 10조원대 선두기업으로 성장시키기까지 겪었던 우여곡절을 다루며 위기를 창조성으로 넘었다고 말한다.
웅진그룹 윤석금 회장은 ‘긍정의 힘’을 성공 비법으로 꼽는다. 윤 회장은 브리태니커 한국 지사의 세일즈맨으로 시작해 오늘의 웅진을 만들었다. 추석 때도 세일즈에 나설 만큼 열정적으로 삶에 임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그는 주저없이 ‘긍정의 힘’이었다고 말한다.
올해 미수를 맞은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은 정도를 걷는 것이 기업과 사람의 장수 비결이라고 전한다. 1985년 간장 위해성 보도로 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박 회장은 직접 방송광고에 출연해 샘표의 안정성을 강조하면서 소비자들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그는 책에서도 “누군가 ‘샘표와 회장님의 장수비결이 뭡니까?’라고 묻는다면 ‘사람도 기업도 똑바로 제대로 하면 오래갑니다’라고 말하겠다”고 밝혔다.
출판업계에서는 CEO가 저자로 나서주는 것이 반가운 일이다. 『창조 바이러스 H2C』를 담당한 랜덤하우스코리아의 백지선 팀장은 “이승한 회장을 섭외하려던 다른 출판사도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 시대의 키워드인 ‘성공’과 우리가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부와 명예를 이미 이룬 CEO들에 대한 이야기가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만큼 출판사들도 이들의 책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한 출판사 관계자는 “CEO가 쓴 책을 발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 또는 직원이 얼마 정도 구매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장님 필자를 잡아라현재 출판시장은 금융위기 이전부터 계속 축소되고 있는 추세지만 진입장벽이 낮은 탓에 여러 출판사가 등장하면서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2008년 출판시장 규모는 약 2조5810억원으로 전년 대비 17.9% 축소됐고 우리나라 국민의 2007년 서적 구입비는 2003년에 비해 8.4%나 줄었다.
이렇듯 책을 읽지 않으니 한국출판연구소가 출판사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출판시장 불황실태조사’(2008.11)에 따르면, 지난해에 비해 매출액이 감소했다는 출판사가 전체의 73%에 달했다. 매출 감소율은 평균 29%를 보였다. 매출이 급감하면서 도서발행 종수나 부수를 줄인 곳은 절반 가까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정도 성공이 보장되는 CEO 저자에 대한 출판사들의 기대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CEO가 책을 쓴다고 해서 다 주목 받는 것은 아니다. ‘블루칩’이라고 할 만한 CEO는 손에 꼽힌다.
이임광 중앙북스 경제경영서팀장은 “CEO 중에 인기저자는 많지 않다”며 “혁신으로 신드롬을 일으킨 몇몇 CEO를 제외하면 대부분 시장성이 크지 않기 때문에 콘텐트보다는 CEO나 회사의 인지도가 책 판매량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이 경우, 단기간 베스트셀러는 될 수 있어도 스테디셀러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CEO가 직접 쓴 책 중 가장 꾸준히 팔리는 것 중 하나는 안철수 카이스트 석좌교수가 CEO시절 집필한 책이다. 출판계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그의 삶 자체가 그의 책이 꾸준히 사랑 받는 비결이라고 평했다. 자기 인생을 담아 책을 쓸 만한 CEO가 많아진다는 것은 출판업계 사람뿐 아니라 모두가 반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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