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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형 CEO 전성시대 열리다

융합형 CEO 전성시대 열리다

최고경영자(CEO) 선택이 이종교배로 바뀌고 있다. 강력한 리더십을 이끌어내기 위한 고육책의 하나다. 같은 집안 내에선 아무래도 과감하게 하지 못하지만 다른 곳에서 과감한 일을 해본 사람이 부임하면 긴장감이 더해질 수밖에 없다. 아이의 충치를 부모가 뽑지 못할 때 삼촌을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동차기업 GM으로 자리를 옮긴 통신맨 에드워드 휘태커 회장.

▎자동차기업 GM으로 자리를 옮긴 통신맨 에드워드 휘태커 회장.

글로벌 기업의 회장이나 CEO 임용에서 순혈주의가 사라지고 있다. 그 회사의 조타수로 일하기 위해 반드시 해당 기업에서 계속 일했을 필요도, 심지어 관련 업계에서 계속 경력을 쌓았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대신 컨버전스(융합)형 인재가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다른 분야에서 다른 시각으로 비즈니스를 해온 경험을 높이 사는 것이다. 나무에 대해선 세세하게 잘 알지 못하지만 숲의 숨은 이점이나 문제점을 파악하는 데는 전문가인 인물이 발탁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지난해 금융위기 이후 구조조정이 필요해진 기업에는 ‘온정’을 베풀 이유가 없는 다른 분야의 인재가 더욱 주목받고 있다. 자동차 업체 CEO가 된 철강업체 대표 프랑스를 기반으로 하는 PSA 푸조-시트로앵은 유럽에 본사를 둔 자동차 업체 가운데 둘째로 큰 회사다.

이 회사는 2008년 기준 544억 유로의 매출을 올렸다. 종업원은 20만 명을 넘는다. 이 회사는 지난해 금융위기 와중에 4억50000만 달러의 적자를 봤다. 그 전 해에 8억8500만 달러의 순이익을 올렸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낙제 성적표다. 회사를 혁신해야만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이 회사 이사회는 지난 6월 1일자로 철강업체 출신의 필리프 바랭을 CEO로 영입했다. 3월 말에 CEO에서 밀려난 크리스티앙 스트레프의 후임이다. 1952년생인 바랭은 프랑스 그랑제콜(엘리트 양성학교)의 하나인 폴리테크니크과 국립광산학교를 마치고 78년 알루미늄 업체인 페슈니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2003년 런던에 본부를 둔 세계 5위의 철강업체 코루스 그룹이 경영난에 빠지자 구원투수로 영입돼 CEO를 맡았다. 그는 이 회사를 2007년 인도의 철강업체인 타타그룹에 팔았다. 자신이 부임했을 때와 비교해 15배로 회사의 가치를 키운 다음이었다. 그는 적극적이고 과감한 경영, 그리고 확실한 구조조정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업종을 초월해 발탁된 이유다. 세계적인 석유회사 BP의 조타수가 된 에릭슨 대표 세계 5위의 다국적 기업. 에너지 업체에선 세계 3위. 영국에 본부가 있는 기업 중 최대. 석유 메이저사인 BP의 개요다. 이 거대 회사는 지난해 기준으로 매출이 3670억 달러에 세전 이익이 352억 달러나 된다.

자산 가치가 2282억 달러에 이르며, 종업원은 9만2000여 명이나 된다. 이런 거대 다국적 기업을 운영하려면 관련 분야에 대한 상당한 전문 지식과 경험, 그리고 인맥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는 우리 생각일 뿐이다. 정작 이 거대 기업을 움직이는 이 회사 이사회는 차기 회장으로 이 분야에 아무런 경험이 없는 ‘문외한’을 영입했다.

칼 헨릭 스반베그가 주인공이다. 57세인 그는 통신장비 업체인 에릭슨의 회장 겸 CEO를 맡고 있다가 올 6월 BP 회장에 전격적으로 내정됐다. 통신업체 회장에서 에너지 업체 회장으로 옮기는 것이다. 스반베그 내정자는 9월부터 회장 지명자이자 비상임 이사 자격으로 이사회에 참석하고 있으며 내년 1월에 회장직에 정식 취임할 예정이다.

그는 아일랜드 법무장관과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출신인 피터 서덜랜드(63) 현 회장을 대신하게 된다. 52년생인 그는 스웨덴 명문 웁살라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으며, 린쾨핑 공대에서 응용물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스웨덴의 세계적인 자물쇠 업체인 아사 아블로이(Assa Abloy)에서 경영인으로 성장했던 그는 2003년 4월 에릭슨 대표로 영입됐다.

젊어서 아이스하키 선수로 활약했던 그는 공격적인 경영 스타일로 유명하다. 그는 에릭슨을 이끌면서 매출을 7배로 끌어올리고, 45건의 기업을 인수했다. 2003년 에릭슨 CEO로 취임했던 스반베그는 당시 10만 명에 이르렀던 직원 중 4만여 명을 정리해고해 회사 분위기를 일신했다.

그는 관료주의적 분위기의 사내 분위기를 바꾸고, 수평적인 의사소통을 강조해 기업의 경쟁력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마디로 무서운 사람이다. BP는 원래 서덜랜드 회장의 후임으로 유사업종인 광산기업인 리오틴토의 폴 스키너 회장을 영입할 계획이었다.

석유업체는 아니지만 채굴업체라는 점에서 동종 업체에 가깝다. 하지만 스키너가 리오틴토의 자산을 중국 알루미늄업체인 치날코에 매각하려고 했던 것을 일부 주주가 문제삼는 바람에 스키너는 후보에서 제외됐다. 이 매각 협상은 올 6월 최종 결렬됐으며, 이에 앞서 3월에는 스키너가 리오틴토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그가 문제가 있다는 이사진의 문제 제기가 옳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모든 비즈니스 원리는 똑같다 “나는 자동차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 하지만, 모든 비즈니스는 원리가 똑같다고 생각한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 아니겠느냐.”미국 최대 자동차 기업인 제너럴 모터스(GM)의 회장을 맡은 에드워드 휘태커 주니어(67)의 말이다.

그는 올 6월 10일 자신이 회장에 내정된 뒤 처음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말을 한 이유는 그가 43년 동안 통신업계에서만 일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동차에 문외한이었던 것이다. 그는 미국 대형 통신회사인 AT&T의 회장 겸 CEO였다. 그는 확실한 경영 업적이 있는 ‘검증된’ 경영인이다.

휘태커는 한국식으로 말하면 ‘통신맨’이다. 텍사스 공대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한 그는 63년 사우스웨스턴 벨에서 설비 엔지니어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88년 벨의 지역 운영업체인 사우스웨스턴 벨 코포레이션의 회장 겸 최고운영자(COE)를 맡았으며 2년 뒤 이사회 의장과 CEO에 올랐다.

95년 그는 회사 이름을 SBC 커뮤니케이션으로 바꾸었다. 그가 운영하던 SBC는 8개의 지역별 벨사 가운데 규모가 가장 작았지만 공격적인 인수합병으로 회사를 거대 통신업체로 키웠다. 97년에는 캘리포니아의 퍼시픽 텔레시스 그룹을 160억 달러에 인수하는 업적을 이뤘다.

2005년에는 165억 달러에 AT&T 코퍼레이션을 인수하면서 회사 이름을 AT&T 인코퍼레이션으로 바꿨다. 그는 2006년 8년 만에 처음으로 AT&T의 주가 상승을 기록한 뒤 이듬해 물러났다가 이번에 전혀 생소한 업종인 GM 회장으로 경영 일선에 돌아온 것이다.

GM의 홍보담당자 로버트 깁스는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경영 환경을 잘 파악해야 하며, 복잡한 대기업을 운영해 본 경험이 있어 회사 전반을 한눈에 파악하면서 경영문화를 혁신해야 하며, 회사를 자력 생존의 반석 위에 올려놓는 데 필요한 과감한 결단을 할 줄 아는 경영인”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컨설팅 회사 2953 어낼리틱스의 짐 홀 대표의 코멘트는 더욱 의미 있어 보인다. “21세기 자동차 회사로 거듭나야 하는 뉴GM은 단순히 차만 생산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며 “기존의 일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융합해 기존에 없던 시장과 수요를 찾을 수 있도록 회사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

그는 “단순 전화 서비스 중심의 AT&T 사업을 다각화해 본 경험이 있는 휘태커를 회장으로 영입한 것은 뉴GM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덧붙였다. GM은 주요 자산을 미 정부가 대주주인 새 법인에 매각하는 절차를 완료하고 파산보호에서 졸업하면서 뉴GM으로 재탄생했다.

컨버전스의 시대 세계적 패션업체인 버버리 회장을 지내다 영국 스탠더드차터드은행의 새 회장으로 임명된 존 피스(60)도 하나의 사례다.

피스는 미국과 유럽은 물론 떠오르는 시장인 아시아권을 포함한 글로벌 영업망을 탄탄하게 구축해 버버리를 명품 브랜드로 자리 잡게 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금융권에서 제조업으로 가는 경우는 많았지만 그 반대인 이런 경우는 드물다. 이렇듯 경영인 헤드헌팅 시장에서 국제화 열풍에 이어 이제는 컨버전스이라는 새로운 컨셉트가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동종업체 인물을 CEO로 영입할 경우 당장 적응은 잘할 수 있지만 자칫 매너리즘에 빠져 과감한 구조조정이나 공격적인 경영을 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특히 오랫동안 서로 함께 일하며 잘 아는 사람들에게 해고 통지를 하기도 쉽지 않아 경영이 자칫 온정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사업이 위기에 빠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기업을 위기로 몰아넣을 가능성마저 있다. 가장 직접적인 예가 글로벌 금융위기다.

뉴욕의 월가와 런던의 심장을 장악한 국제 금융인들은 자신들의 비즈니스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해 위험신호를 무시했다. 그 결과는 대규모 파산과 실직 사태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사업을 들여다보고, 안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결점을 찾아 잘라내고, 새로운 도전을 할 줄 아는 경영인이 필요하게 됐다.

이제 최고경영자 선택이 이종교배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강력한 리더십을 이끌어내기 위한 고육책의 하나다. 같은 집안 내에선 아무래도 과감하게 하지 못하지만 다른 곳에서 과감한 일을 해본 사람이 부임하면 긴장이 더해질 수밖에 없다. 아이의 충치를 부모가 뽑지 못할 때 삼촌을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 하나 덧붙일 점은 이공계 전공자의 채용이 눈에 띈다는 점이다. 앞에 예를 든 세 사람의 컨버전스형 경영자들은 한결같이 이공계 출신이다. 심지어 BP의 새 조타수를 맡을 스반베그는 학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응용물리학을 공부했다.

이공계 전공자가 경영학을 공부하는 경우는 많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다. 경제위기의 시대, 경영과 기술에 모두 정통한 사람이 글로벌 헤드헌팅 시장에서 각광받을 것 같은 예감이다. 이도 컨버전스의 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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