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장에 물 채울 일 없다”
“축구장에 물 채울 일 없다”
#1 지난 9월 5일 저녁 서울 상암구장에서 한국과 호주의 국가대표 축구평가전이 열렸다. 결과는 3-1. 한국의 압승이었다. 경기 후 한때 한국 대표팀을 이끌었던 핌 베어백 호주 대표팀 감독과 악수를 한 다음 경기장을 나오는 허정무 감독은 더 없이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2 2000년 10월 레바논에서 열린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태극호는 사우디아라비아에 1-2로 패배했다. 비난 여론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한 달 뒤 대표팀 지휘봉을 반납했다. 허 감독은 마음속으로 다시는 국가대표 감독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허정무의 화려한 귀환. 돌아온 허정무 호의 성적표는 13승 12무. 25경기 무패 행진 중이다. 국가대표 감독 복귀에 비판적이던 목소리도 지금은 조용해졌다. 9월 10일 서울 반포동에 위치한 서울팰리스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기록에는 관심이 없고, 아직 갈 길도 멀다”고 말하지만 밝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표팀에서 물러났던 당시의 심정을 묻자, 그는 소신껏 일했지만 성적이 따르지 못했다고 한다. 허 감독은 억울한 일도 많이 겪었다. 인터넷에 올라있는 악성 루머에 상처를 입어 지금도 인터넷을 멀리 할 정도다. 하지만 그는 남을 탓하기보다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고민해 왔다.
축구에 대한 공부도 멈추지 않았다. 세계 축구 전술의 변화, 체계적인 훈련방식, 스포츠 심리학 모두가 그의 관심사다. 그는 “좋은 리더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지며 조직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선수들에게 제 생각을 무조건 밀어붙이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경기를 준비하다 보면 선수들의 부족한 점이 눈에 띄게 마련입니다. 이를 개선해 주는 것이 감독의 의무지요. 하지만 생각이 잘 전달되지 못한 것 같아요. 예스와 노가 분명하다 보니 선수들에게 강압적으로 보이기도 했을 겁니다.” 2007년 12월 그의 복귀가 결정되자 몇몇 선수는 걱정까지 했다.
외국인이 아닌 한국 감독인데다 호랑이로 소문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 감독은 혈기 넘치던 시절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던 이전의 모습을 버렸다. 지금 그는 주장 박지성 선수를 통해 필요한 지시를 내린다. 세부 전술도 선수들과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누며 설명한다.
상대팀의 요주의 선수를 분석할 때도 주요 경기 장면이 담긴 DVD를 담당 선수에게 나눠준다. 강도 높은 훈련을 진행하지만, 선수들의 체력 회복도 꼼꼼히 체크한다. 피로도가 높아지면 과감히 휴식을 제공한다. 전체적으로는 선수를 다그치기보다는 한발 물러서서 지켜보며 자율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그러자 대표팀에서 “허 감독이 이전과 달리 무척 부드러워졌다”는 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표팀 운영은 부드러워졌지만 오히려 경쟁은 치열해졌다. 스타 선수들의 인지도에 상관없이 철저하게 실력 위주로 선수를 뽑았기 때문이다. “나이, 경험 가리지 않고 기량이 있는 선수에게는 무조건 기회를 줬습니다. 끊임없이 새 얼굴을 발탁해 실험을 거듭하며 팀을 만들었지요.”
무명 선수의 기용으로 허 감독은 벼랑 끝에 몰리기도 했다. 지난해 북한과의 졸전 끝에 1-1 무승부를 거두자 경질론이 높아졌다. 올림픽 대표팀을 조롱했던 유행어인 ‘축구장에 물을 채워라’는 말까지 다시 등장했다. 허 감독은 리더가 책임질 일이라며 젊은 피 수혈을 계속했고, 시간이 지나며 대표팀은 자리를 잡아갔다.
전문가들이 한국 축구의 숙제라고 지적해 온 대표팀 세대교체에 성공한 것이다. 기성용, 이청용, 이근호, 정성훈 같은 젊은 선수들이 대표팀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들이 경험이 많은 고참 선수들과 어울려 평가전에서 상대팀을 압도하자 비판은 눈 녹듯 사라졌다. 허 감독은 여전히 “월드컵 출전 선수 최종 엔트리 발표 전까지는 모든 포지션이 열려 있다”는 생각이다.
월드컵 본선 티켓을 거머쥐며 지금은 한숨 돌렸지만, 대표팀 감독 복귀는 그에게 큰 결단이었다. 허 감독은 “명예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고 한다. 그래서 축구협회의 감독직 제의를 받자 “다시 한번만 죽어보자”고 생각했다. 다만 협회에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외국 감독에게 해준 만큼만 지원해 달라는 것.
“그동안 한국인 감독들에게는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부족해 가진 역량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물러난 분이 계시죠. 물러날 때 물러나더라도 최선을 다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원했던 겁니다.”
돌아온 허정무는 필생의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인 감독으로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2002년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는 지금 9년 전 실패를 다시 돌아보며 남아공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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