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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자본주의의 그늘

러시아 자본주의의 그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좀 더 문명화된 러시아’의 비전을 발표했다. 그는 러시아 자본주의의 기초를 좀먹고, 법정과 경찰을 개인기업 분쟁 해결의 도구로 전락시킨 ‘법적 무정부주의’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메드베데프의 이런 강한 의지가 러시아의 법질서 확립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했다.

현재 러시아에선 정·관계에 연줄을 댄 사기꾼들과 정부 중 어느 쪽이 러시아의 실세인지를 보여줄 소송이 진행 중이다. 러시아 고위 관료와 판사, 경찰관들이 납세자의 세금 5억 달러를 가로챈 사기 사건이다. 사기범들은 피해자 측이 사실을 폭로하려 하자 법원을 조종해 오히려 그들을 처벌케 했다.

현재로서는 사기꾼들이 승리한 듯하다. 이 사건의 원고는 허미티지 펀드의 CEO인 미국인 자산운용가 빌 브라우더다. 블라디미르 푸틴 전 러시아 대통령의 과두재벌 단속 정책을 지지했던 그는 2005년 러시아의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인물’로 분류돼 러시아 입국이 금지됐고, 현재 런던에서 산다.

한때 러시아 최대의 외국 투자회사였던 허미티지 펀드는 모스크바 지사를 폐쇄했다. 허미티지가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회사가 잃어버린 돈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회사는 부패한 러시아 관료와 경찰이 브라우더 등 기업가들에게서 회사를 불법으로 가로챈 다음 대차대조표를 조작해 러시아 정부로부터 세금환급을 받는 데 이용했다고 주장한다.

허미티지는 9개월 전 경찰과 연줄이 있는 범죄자들이 회사의 입을 막으려고 체포한 고문 변호사의 석방을 바란다. 현재 사기범들은 경찰과 정부 사무실에 버젓이 앉아 있고, 피해자 중 한 명은 감옥에 갇혀 있으며, 허미티지의 다른 고문 변호사와 관리들은 해외로 도피한 상태다.

러시아 정부는 허미티지가 자회사들을 불법으로 빼앗긴 사건에 불만을 제기한 이후 조사에 착수하기는커녕 브라우더를 조세위반 혐의로 국제수배자 명단에 올렸다. “우린 러시아 정부 관리들이 5억 달러의 세금을 가로챈 사실을 폭로하고자 한다”고 브라우더는 말했다. “그런데도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그 사실을 폭로하려 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나라가 러시아 말고 또 있겠는가?”

러시아에 진출한 대형 외국 회사 다수가 최근 들어 정당성이 의문시되는 법집행으로 불이익을 당했다. 러시아 정부는 다국적 석유회사 셸에 환경파괴 혐의로 거액의 세금을 물렸다. 또 영국 석유회사 BP 간부들의 취업 허가증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를 들어 취소했다. 그리고 노르웨이 텔레콤 회사 텔레노르의 주식가치를 물타기 수법으로 떨어뜨렸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러시아 정부의 심기를 거스르는 회사는 무조건 공격 대상이 된다는 두려움을 자아냈다. 2008년 하반기에 약 70억 달러의 외국 자본이 러시아에서 빠져나간 이유다. 러시아 일간지 노비예 이즈베스티아에 따르면 지난해 이후 외국 투자가 22.9% 감소했다.

허미티지의 소송은 러시아의 부패 실상을 근래 들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다. 부패가 일상화된 러시아의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규모다. 덕분에 원고 측이 유튜브에 게시한 관련 비디오 자료는 요즘 러시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이 사건이 메드베데프가 이끄는 러시아의 미래에 왜 중요한지를 이해하려면 사건의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미국 공산당 지도자였던 얼 브라우더의 손자인 브라우더는 1997년 허미티지 펀드를 설립했다. 그는 스베르방크(러시아 최대 은행), 가스프롬(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등 덩치 크고 비효율적인 러시아 회사들의 주식을 사들인 다음 그 회사들이 회계 장부를 제대로 기록하고, 소유권 구조와 수입을 투명하게 관리하도록 유도해 주가를 올리는 전략을 썼다.

이 전략은 허미티지가 러시아 정부의 어느 고위 관리가 소유한 한 석유회사(허미티지가 소액주주로 있는 회사였다)의 소유권 지분에 의문을 제기하기 이전엔 아주 효과적이었다. 2005년 12월 브라우더는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한 채 러시아 연방보안국의 비자 발급 금지자 명단에 자신이 포함된 사실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허미티지의 사업이 기울기 시작했다. 법정 문서에 따르면 그 후 곧 세무 공무원들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이는 범죄자들이 회사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기 전략은 단순했다. 러시아 정부에 수익에 대한 세금을 낸 회사를 인수해 허위로 손실을 발생시킨 다음 수익이 전혀 없는 것으로 조작된 대차대조표를 이용해 세금환급을 받는 방법이다.

러시아의 기업사냥 문제 전문가가 된 모스크바의 변호사 래리사 메이브는 “허위 세금환급은 러시아에서 인기 있는 사기 수법이 됐다”고 말했다. “그런 범죄는 뇌물로 매수된 세무 경찰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하다.”사기범들의 첫째 목표는 러시아 최대의 투자회사인 르네상스 캐피털이 다양한 국제 고객으로부터 가스프롬의 주식을 사들이려고 설립한 회사들이었다.

이 회사들은 주식을 매매하고 그 수익에 대한 세금을 낸 뒤 자금이 바닥났다. 르네상스는 바로 그 시점에 그 회사들을 일단의 투자자에게 매각했고, 그 후엔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회사를 사들인 집단(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를 대표로 내세웠다)은 르네상스가 낸 세금을 되돌려 받을 목적으로 허위로 손실을 발생시켰다.

따라서 금전적으로 손해를 본 유일한 피해자는 러시아의 납세자들이었다. 르네상스는 이 사기 사건과 관련해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 회사들을 이미 매각했으므로 더는 자사의 소유가 아니며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브라우더는 르네상스가 이 사건에 입을 다물었다는 사실이 사기꾼들과 결탁한 증거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르네상스의 한 대변인은 “추측과 소문을 바탕으로 한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말했다. 사기범들의 다음 목표는 허미티지가 설립한 투자회사들이었다. 하지만 그 회사들은 팔려고 내놓은 매물이 아니었다. 사기범들이 이 회사들을 손에 넣은 방식은 현대 러시아에서 법과 질서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2007년 6월 25명의 복면 경찰이 허미티지가 조세법을 위반했다며 허미티지와 고문 법률회사 파이어스톤 던컨 사무실을 급습했다. 경찰은 경찰관들에게 맞선 한 변호사에게 매질을 한 뒤(이 변호사는 1주일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 밴 두 대 분량의 서류를 압수했다. 허미티지가 소유한 3개 지주회사의 설립허가서도 포함됐다.

이 서류들을 경찰에서 보관하는 동안 새로운 소유주에게 회사를 양도하는 새 허가증이 작성돼 조인과 공증을 마쳤다. 허미티지는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파이어스톤 던컨의 재미슨 파이어스톤은 이렇게 말했다. “서류가 경찰의 손에 있을 때 소유권이 바뀌었기 때문에 이의를 달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사기범들은 러시아 관계 곳곳에 연줄이 있는 듯했다. 다음 단계로 그들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에서 불법으로 수중에 넣은 회사들을 상대로 계약 위반 소송(이 역시 허위였다)을 제기했다. 세 도시 모두에서 재판부는 전년도의 수익과 똑같은 액수에 해당하는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고, 새 소유주 측 변호인단은 그 판결을 이의 없이 수용했다.

결과적으로 이 회사들은 이전 과세연도에 수익이 전혀 없는 상태가 됐다. 그렇게 되자 새 소유주들은 재빨리 총 2억3000만 달러의 세금환급을 신청했다. 러시아 역사상 최대의 세금환급액이었지만 신청한 다음날 승인이 이뤄졌고, 그 다음날 지불이 완료됐다. 허미티지의 소송에서는 이 사건에 연루된 세무부서의 관리들을 사기 주범으로 지목하고 그들의 이름을 밝혔다.

허미티지의 지주회사들은 가스프롬의 주식 거래를 위해서만 존재했고, 불법 인수된 시점에 자금이 바닥난 상태였으므로 허미티지가 금전적인 손해를 보진 않았다. 금전적 손해를 본 쪽은 러시아 정부뿐이었다. 하지만 르네상스와 달리 허미티지는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정했고, 러시아 연방보안국부터 세무경찰까지 공무원들을 상대로 35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보복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사건이 세상에 알려질 경우를 예상 못한 사기범들은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사실 은폐에 나섰다. 파이어스톤 던컨의 수석 변호사 중 한 명인 세르게이 마그니트스키는 지난 1월 이 사건의 담당 검사에게 증언하러 갔다가 느닷없이 체포됐다.

보석 신청과 가족 면회가 허용되지 않은 채 감금된 마그니트스키는 상사인 파이어스톤에게 자신이 철저한 심문을 받진 않았다고 말했다. 그 대신 경찰관과 수사관들로부터 허미티지에 불리한 증언을 하면 석방하겠다는 제안을 수없이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마그니트스키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허미티지가 이 소송에서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목표는 마그니트스키의 석방이다. 회사는 이런 목표로 사건을 끈질기게 파헤쳐 사기범들의 목표가 됐던 또 다른 회사 여덟 군데와 2억5000만 달러의 추가 세금 사기를 밝혀냈다. 허미티지는 그 증거물을 공무원 부정을 조사하는 러시아 감사위원회에 제출했다.

“이 사건은 러시아의 부패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브라우더는 말했다. “한 지도자(메드베데프)가 최소한 문제를 인정하긴 했지만 뭔가 조치를 취할 능력은 없어 보인다. 러시아 정부는 자기 이익을 지킬 능력도 없다.”

아르카디 드보르코비치 대통령 경제 고문과 이고르 슈발로프 대통령 비서실 차장 등 러시아 정부 내의 개혁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심지어 허미티지를 동정하기까지 한다고 모스크바의 한 서방 외교 소식통은 말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행동할 힘이 부족했다.

많은 러시아 관리가 이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대령 출신으로 현재 하원 안보위원회를 이끄는 겐나디 구트코브는 브라우더가 러시아의 관례를 따랐어야 했다고 말했다. 적절한 보안회사(러시아어로 ‘크리샤’)를 고용했어야 한다는 의미다.

자신이 직접 사설 보안회사를 운영하는 구트코프는 “브라우더는 보안에 좀 더 많은 돈을 들였어야 했는데 욕심이 너무 많았다”고 말했다. “그가 우리 회사에 보안을 의뢰했더라면 그를 보호했을 것이다.” 지난해 기업사냥 과정에서 CEO가 투옥된 회장품 회사 아르바트 프레스티지의 변론을 맡은 알렉산데르 두브로빈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브라우더의 방식이 통할지 모른다. 하지만 러시아에선 승산이 없다. 2002년 나는 브라우더에게 이 투쟁이 절망적이라고 말했다.” 브라우더의 일부 동료들은 그가 재앙을 자초했다고 생각한다. 익명을 요구한 모스크바의 한 서방 은행 간부는 “브라우더는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 부패 사례를 소리쳐 알리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에선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기에 딱 좋은 방식이다. 대다수 외국 투자자가 러시아의 관례를 따르려고 한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고위 관리나 비밀 경찰 등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과 수익을 나누려는 태도를 말한다.”궁극적으로 진정한 패자는 러시아다. 러시아의 주식은 다른 신흥시장에 40% 할인된 값에 팔린다.

기업이 부패 공무원과 결탁한 범죄 집단에 불법으로 인수될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러시아 기업들이 외국 은행의 대출을 받으려면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 러시아는 국제 투명성기구의 부패인식지수에서 2002년 이후 30위나 하락해 147위로 떨어졌다. 또 러시아 내무부에 따르면 러시아 관료들에게 제공되는 뇌물의 규모는 지난 10년 동안 10배나 늘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고문이자 비정부기구인 국가 반부패위원회의 위원장인 키릴 카바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법을 무시하는 나라, 그리고 기업사냥꾼들이 매년 수천 개의 개인회사를 불법 인수하고 그런 방식으로 손아귀에 넣은 회사 자산의 30%(수억 달러에 이르는 돈)를 착복해도 정부와 사회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나라에 돈을 투자할 사람이 있겠는가?”

좋은 질문이다. 오는 11월 7일 러시아 정부는 런던에서 178억 달러에 이르는 정부 발행 유로본드의 판촉행사를 연다. 메드베데프 정부 관리들은 “금융 상황이 서서히 좋아지고 안정돼 감에 따라 러시아 채권의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메드베데프의 ‘법적 무정부주의’ 비판만으로는 이런 낙관적인 전망을 실현하기 어렵다.

메드베데프는 러시아의 경찰과 세무 조직이 범죄자들에 의해 운영되지 않으며, 법정과 감옥이 뇌물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제 아무리 모험심이 강한 투자가라도 러시아에 등을 돌리는 일은 시간 문제다. 또 외국 자본이 유입되지 않는다면 러시아의 경제 발전이나 베드베데프가 외치는 ‘문명화된 러시아’의 꿈은 실현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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