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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의 가슴을 울린다 - 2

세계인의 가슴을 울린다 - 2



성도희(캐나다) | 도예가

분청으로 새긴 동양의 멋
서 정 현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샌드위치와 도예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캐나다 교포인 도예가 성도희(36) 씨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다. 1998년 이민 초기에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하던 경험을 밑천으로 오빠와 직접 가게를 차렸다. 2년 정도 운영하다 보니 돈도 돈이지만 서양 음식에서 시작된 관심이 다양한 서양 식기로 이어졌다.

신구전문대 인테리어 공예과를 졸업한 성씨는 여러 장르의 학과 공부 중 유난히 도자에 맘이 갔다. 대학교에서 체계적으로 도자를 배우지 못한 채 졸업한 성씨는 홍익대 근처 공방에서 물레부터 혼자 공부했다. 그 후 전문적으로 도자를 공부하기는 2003년 캐나다 앨버타 컬리지 오브 아트 앤 디자인을 입학한 뒤였다.

늦깎이 학생 성씨는 유창하지 못한 영어도 문제였지만 급우들과 다른 생김새에서 오는 소외감은 더 견디기 힘들었다. 특히 ‘동양사람’이라는 소리가 제일 듣기 싫었다. “지금은 그게 저를 지탱하는 힘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몰라요.” 게다가 성씨의 작품을 보는 교수들과 학생들이 한결같이 ‘동양적’이라고 평가했다.

동양적인 작품 분위기에서 벗어나려고 교수 작품을 흉내도 냈다. 그런데 교환교수로 학교를 찾는 유명한 도예가들마다 한국의 도자기를 칭찬했고 한국 문화의 독창성을 높이 평가했다. 의외였다. 그러다 문득 성씨는 “어차피 나는 동양인이고 그 분위기를 도저히 못 벗어난다면 차라리 나만의 색깔로 만들자”고 다짐했다.

뿌리에 자부심이 생기자 작품의 자신감도 커졌다. 한국 그리고 한국인은 숨겨야 할 부끄러움이 아니라 드러내고 알려야 할 아름다움이었다. 2005년 졸업반 때 캐나다와 미국의 공예가들을 대상으로 펼쳐지는 공예대전 니시 어워즈 티 세트 부문에서 1등상을 타면서 도예가로서 성씨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또 각종 공예품을 종류별로 매년 발간하는 라크 북스의 500시리즈에 서양식 물주전자인 피처가 3개 당선돼 게재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 뒤 문씨는 실력을 인정받고 이름을 알리려고 캐나다뿐만 아니라 미국 등의 공모전과 그룹전을 찾아 분주히 움직였다. 1회 개인전을 비롯해 15회의 그룹전에 참가하면서 짧은 기간 동안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예가이자 앨버타 컬리지 오브 아트 앤 디자인의 교수인 그레그 페이스는 e-메일 인터뷰를 통해 “한국의 문화유산과 캐나다에서의 경험을 섞어 아름답고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낸다. 형태와 표면 처리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적용해 가기 때문에 앞으로 주목되는 작가”라고 성씨를 평가했다.

성씨는 현재 캐나다 공예협회와 앨버타주 공예협회의 회원이다. 그녀의 작품은 앨버타주 공예협회 전시실에서 전시 판매된다. 공예협회 회원이 되기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작품을 전시 판매하는 도예가는 동양인으로 성씨가 유일하다. 방학 중 잠시 한국에서 배운 동양화는 성씨를 도예가로 각인시킨 그녀만의 소재다.

레이스를 이용한 상감 기법 그리고 분청은 이제 성씨 작품의 특징이 됐다. 분청을 이용한 작품의 경우 아예 작품명을 ‘BunChung’이라고 표기한다. 한국의 분청 기법을 고유 이름 그대로 알리고 싶어서다. 성씨의 작품 소재는 한국적이지만 형태는 모두 서양 식기다. 성씨는 지난 9월 통인 갤러리에서 캐나다의 학교 선배들과 함께 한국에서의 첫 전시회를 가졌다. ■



지나 강(34, 미국)

조명감독
이화여대 장식미술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뉴욕 비주얼 아트 학교에서 컴퓨터 아트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강씨는 2006년 10월 블루스카이 스튜디오에 조명감독으로 입사했다. 컴퓨터로 조명을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 강씨는 3D 애니메이션 ‘아이스 에이지3: 공룡시대’ ‘호튼’ 등을 빛으로 탄생시켰다. 현재 2011년 개봉 예정인 ‘리오’를 작업 중이다.



이준희(37, 미국)

AP 서울지국장
AP 통신 서울지국의 수석 특파원 겸 지국장인 이씨는 지난해 남북한을 담당하는 특파원단과 사진·방송기자를 이끌고 부임했다. 1995년 컬럼비아대의 저널리즘 대학원을 졸업한 직후 AP에 입사했다. 샌프란시스코 지국 주재 기자와 뉴욕 본부 국제부 에디터, 런던 지국 총괄 에디터 등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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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화(43, 프랑스)

네고시앙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일본인 남편과 함께 한국인으로선 유일하게 와인을 만드는 박재화 씨는 2000년 자신의 네고시앙 ‘루 뒤몽’을 설립했다.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에 ‘루 뒤몽 뫼르소’가 ‘천지인 와인’으로 소개하면서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 유명 레스토랑은 물론 한국과 일본, 대만, 홍콩에 주로 수출된다. 지난해 매출이 60억 원을 돌파했다.



지니 조 리(홍콩) | 아시아인 최초의 ‘와인 마스터’

“와인 한 잔에 인생이 담겼어요”
류 지 원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누구나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있다. 아시아 최초의 와인 마스터(WM) 지니 조 리(41, 한국명 이지연)는 열아홉 살 때 그런 경험을 했단다. 상대는 교환학생으로 간 영국 옥스포드대 환영만찬에서 맛본 고급 보르도 레드 와인이었다. “예전에도 아버지가 즐겨 마시던 대중적인 와인을 맛보았지만 차원이 달랐어요. 깊은 과일향과 공기처럼 가벼우면서도 세월을 간직한 느낌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죠.”

그때부터 와인 관련 서적을 찾아 읽고 좋은 와인이 있다면 때와 장소를 안 가리고 맛보고 기록하는 일이 그녀의 일상사가 됐다. 미국 스미스 칼리지에서 정치학과 사회학을 전공한 뒤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공공정책학을 공부하면서도 와인을 향한 그녀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1994년부터는 남편을 따라 홍콩에서 머물며 경제 칼럼니스트로 일하다 하버드대 국제관계학 박사 과정에 합격했다. 그러나 와인에 너무 깊숙이 빠져버린 뒤였다. 때마침 아시아에서도 와인 열풍이 불면서 자연스레 와인 강사나 평론가로 나설 일이 많아졌다. 더 체계적인 와인 공부를 하려고 1998년 국제 인증 와인자격증(WSET)을 취득한 뒤 어렵기로 유명한 영국 와인마스터 과정에 도전했다.

영국 와인마스터협회(Institute of Masters of Wine)가 주관하는 와인 마스터 과정은 전 세계에서 280여 명만이 통과했을 정도로 선정 절차가 까다롭다. 2001년 IMW 과정에 등록한 리는 출산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7년간 공부한 끝에 2008년 9월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와인마스터에 올랐다.

와인 문화가 상대적으로 척박한 아시아에서 와인마스터가 탄생했다는 사실 자체로 큰 화제가 됐다. 아시아는 전통적인 고급 와인 산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다양한 품종의 와인을 맛보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와인을 가까이 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녀는 아시아와 세계의 와인 커뮤니티를 잇는 다리 역할에 충실하고자 한다.

요즘 리는 ‘디캔터 월드 와인 어워드(Decanter World Wine Awards)’ 등 각종 와인 경연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거나 ‘디캔터’ ‘바카라’ 등 저명한 와인 잡지에 글을 기고한다. 와인 평론가로서 1만여 종이 넘는 와인을 리뷰하고 평가한 책 ‘아시안 팰레이트(Asian Palate)’를 펴내기도 했다.

리는 일곱 살 때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재미교포 1.5세지만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이 강하다. “어린 시절에 집에서는 부모님이 한국말을 쓰도록 하셨어요. 방학 때는 꼭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어 실력이 꽤 좋은 편이죠.” 한국의 와인 시장에도 관심이 많다.

“최근 한국 와인 커뮤니티의 성장은 실로 눈이 부실 정도예요. 지금은 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인 와인 시장이 됐어요. 와인평론가로서 상업적인 와인 사업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한국에 들를 때마다 와인업계 관계자를 만나고 시장 동향을 확인합니다.”

와인 비전문가가 좋은 와인을 즐기는 방법을 묻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와인을 즐기려면 와인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와인을 마실 때 와인 산지와 이름을 기억해 보세요. 전 16년 동안 와인 일기를 써왔는데 기억을 떠올리기 좋고 와인의 맛을 음미하는 데 큰 도움을 줘요. 또 첫 모금과 마지막 모금이 어떻게 다른지, 곁들이는 음식과 궁합은 어떤지를 세심히 관찰하세요. 이런 노력이 와인을 즐기는 오감 여행의 출발점이 될 거예요.”

그녀는 와인을 공부하면서 인생을 배우기도 한단다.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와인들은 포도 농장에서 일정 수준의 환경적 스트레스를 겪으면서 탄생합니다. 사람이 끊임없는 도전과 역경을 이겨낸 뒤 위인으로 거듭나듯 말이에요. 와인의 세계에 인간의 삶이 녹아 있어요.” ■



김소희(미국) | 패션 디자이너

랄프 로렌이 그녀의 손끝에서 거듭난다
뉴욕 = 정 보 라 프리랜서

“패션을 통해 서부의 로망스, 할리우드의 매력, 사파리의 모험 등을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보여준다.” ‘로마의 휴일’의 배우 오드리 헵번은 랄프 로렌의 패션을 이렇게 묘사했다. 1967년대 남성 타이의 변혁으로 시작된 랄프 로렌은 40년이 흐른 오늘까지도 시대를 초월하는 패션 스타일로 사랑받는다.

랄프 로렌의 12개 브랜드 중 ‘럭비(Rugby)’는 10~20대를 겨냥한 브랜드다. 이 브랜드의 제품개발 총괄 책임자는 한국인 김소희(47)씨다. 2004년에 출시된 럭비는 랄프 로렌의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교복처럼 반듯한 귀족풍에다 약간의 일탈미가 가미됐다. 여성은 섹시한 캠퍼스 스타일을, 남성은 세련미를 지향한다.

뉴욕 맨해튼 의류 지구 가먼트 디스트릭에 위치한 럭비 건물 14층에서 만난 김씨는 올해로 디자이너 경력 16년째다. 럭비에서는 2007년부터 일했다. 그전에는 ‘앤 테일러’ ‘세인트 존’ ‘익스프레스’ ‘리미티드 디자인 스튜디오’ 등에서 테크니컬 디자인 매니저, 제품 개발 총괄 책임자 등으로 일했다.

제품 개발 총괄 책임자는 디자인 개발부터 생산까지 모든 제작 과정을 책임진다. 테크니컬 디자이너들과 크리에이티브 디자인팀 등의 의견을 조율하는 리더 역할을 한다. 김씨는 부모님의 반대로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패션계에 몸담았다. 숙명여대 화학과를 졸업한 후 1년 동안 중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했다.

1985년 오하이오주의 콜럼버스 칼리지 오브 아트&디자인에서 광고와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하면서 자신의 잠자던 숨은 능력을 깨웠다. 졸업 후에는 미국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무작정 패션의 도시 맨해튼으로 향했다. “당시 유학생 신분이라 취업이 안되면 한국에 돌아가야 했어요. 절박한 심정으로 이곳저곳 발로 뛰어다니며 포트폴리오를 돌렸습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얻은 직장이 앤 테일러였어요.”

김씨는 그곳에서 디자이너인 세실리아 톨크비스트를 만났다. 앤 테일러에서 몸담았던 10년 동안 그녀를 롤 모델로 삼아 열심히 일했다. 김씨가 유명 패션 그룹의 브랜드 책임자에 오른 데는 뛰어난 실력 말고도 특유의 성실성이 뒷받침 됐다. 유창한 영어실력, 자신의 능력을 홍보하는 일도 빼놓기 어렵다.

“한국 사람들은 남을 칭찬하는 데도 소극적이지만 ‘자기 마케팅’에 너무 서툴러요. 과거에는 겸양지덕이라고 말했지만 현대의 경쟁사회에서는 자신의 강점을 적극 알려야 기회가 옵니다.”■



진창현(79, 일본)

바이올린 장인
‘동양의 스트라디바리’ 진창현 씨는 경북 김천에서 출생했다. 1943년 인력거 끄는 일로 돈을 모아 메이지대 영문과 야간부에 입학했다. 1976년 미국에서 열린 ‘국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제작자 콩쿠르’에서 5개 부문을 휩쓸었다. 1984년도에는 미국 바이올린 제작자협회로부터 세계에서 5명밖에 없는 무감사 제작자로 인정받았다. ‘감사’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가졌다는 의미다.



혜박(24, 미국)

모델
본명은 박혜림. 1999년 미국으로 이민 간 그녀는 모델이 되고 싶어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지역모델선발대회에 수십 번 참가했다. 2005년 뉴욕 패션위크에 데뷔해 동양인으로 처음 샤넬, 프라다의 모델로 서는 등 단시간에 세계적인 모델로 성장했다. 현재 뉴욕 트럼프매니지먼트 소속으로 한국에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신 갈리나(53, 우즈베키스탄)

가수
옴스크 시베리아 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고려인 가무단인 ‘청춘가무단’에서 가수생활을 시작할 때 신씨는 18세였다. 1984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듣고 한국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신씨는 26세에 공훈가수라는 영광을 안게 됐다. 고려인 가수라는 악조건을 딛고 각국에 흩어져 사는 고려인의 설움을 노래하는 그녀는 고려인협회 문화위원이기도 하다.



박윤정(프랑스) | 스말토 수석 디자이너

프랑스 남성 패션의 리더로 우뚝
파리 = 전 진 배 중앙일보 특파원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옷 잘 입는 멋쟁이로 알려져 있다. 그가 즐겨 입었다고 소문난 스말토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품 남성복이다. 중동의 왕족이나 세계적인 부호 등 소수 고객을 겨냥한 맞춤옷으로 출발했으며 스타일이나 색상, 착용감, 편의성 등에서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 콧대 높은 스말토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2년 전 한국 여성이 차지했다. 올해 서른한 살인 박윤정 씨다. 아시아계 차별이 심한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명품업계에선 유례 없는 일이다. 아무리 유럽 패션스쿨을 나온 실력가라도 동양인은 유럽 현지에서 활동하기조차 쉽지 않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박씨가 스말토의 디자인 디렉터 자리를 꿰찼다는 뉴스는 누가 들어도 귀가 번쩍 뜨일만했다. 하루를 분단위로 쪼개 쓴다는 박씨를 명품 패션매장이 늘어선 파리 포부르 생토노레 거리의 스말토 매장에서 만났다. 박씨는 스위스에서 태어난 이민자 2세다.

그녀가 태어난 브라이튼바흐는 간호사로 독일에 왔던 어머니와 한국과 독일을 오가면서 사업을 했던 아버지가 결혼해 정착한 곳이다. 현지에서 한국 음식점을 운영했던 어머니는 입만 열면 자식에게 “생김새 다른 우리가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이곳 사람보다 몇십 배는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어릴 때는 그냥 흘려 들었던 어머니의 말을 그녀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실감했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박씨는 대학 진학 때 세계적으로 이름난 디자인 스쿨 파리 에스모드를 선택했다. 졸업반인 3학년 때 그녀는 남성복을 해보겠다고 진로를 결정했다.

남성복은 패턴이나 실용성 등 고려할 점이 많아 여성복보다 까다롭긴 하지만 기본기를 익히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2000년 에스모드를 졸업한 그녀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인턴십을 시작으로 험난한 “정글”에 뛰어들었다. 그때 발을 처음 들여놓은 스말토는 프랑스 브랜드지만 공장은 이탈리아에 있었다.

밀라노의 매장과 공장을 오가며 석 달 넘게 일하면서 그녀는 스케치부터 재봉틀까지 하고 싶었던 일을 맘껏 해 행복했다. 이때 실력 있고 성실한 박씨를 눈여겨봐두었던 수석 디자이너 프랑크 보클레가 그녀에게 스말토에 남아 함께 일하자고 제의해왔다. 정식 직원이 되자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차별의 벽이 현실로 다가왔다.

동양인이라서, 여자라서, 나이가 어려서 겪는 불이익으로 속상해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회사 내에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느꼈고 업계 모임에서는 ‘왕따’를 당하는 현실에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그녀는 오기로 버티면서 일로 승부했다.

“보통 밤 12시까지 회사에 남아 일했어요. 쇼에 나갈 디자인이 성에 안 차면 밤을 꼬박 세워 새벽이 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쳤어요.” 그녀의 뛰어난 외국어 실력도 큰 힘이 됐다. 한국 디자이너는 보통 영어 또는 현지어 실력이 부족해 유럽에서 자리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소통이 안되면 밀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박씨는 독일어권에서 나고 자란 데다가 학교에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를 제대로 공부해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뛰어난 능력에다 성실성, 근성까지 갖춘 그녀는 스말토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책임 디자이너로 승격했고 2007년에는 디자인의 최고 결정권자인 수석 디자이너에 올랐다. 박씨는 현재 스말토의 모든 제품 콘셉트를 정하는 일부터 개별 의상의 디자인과 디스플레이, 잡지 광고까지 모든 일에 관여한다. 스말토의 모든 디자인 관련 업무가 박씨의 판단으로 결정된다.

여기저기 유명 브랜드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지지만 그녀는 스말토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고 한다. “일이 너무 많아 스트레스를 받는 날엔 어김없이 집에 돌아와 고추가루를 잔뜩 풀어 넣고 김치찌개를 끓여 먹어요. 이제는 집에서 함께 식사할 사람도 만나고 싶어요.”■



산드라 오(38, 캐나다)

배우
한국계 캐나다인으로 네 살때부터 연기 수업을 받았다. 캐나다 TV 드라마에서 먼저 인정을 받은 그녀는 할리우드로 건너가 많은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특히 당시 남편이었던 알렉산더 페인 감독이 연출한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작 ‘사이드웨이’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또 2005년부터 출연한 인기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에서의 연기로 지난 2005년부터 에미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5년 연속 올랐다.



이상미(38,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하고 티보 바르가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우승 한 재미교포 이상미 씨는 베토벤 프로젝트 트리오 멤버다. 올 3월 이 트리오는 베토벤의 피아노 3중주 내림 마장조를 세계적으로 초연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번 연주회에서 1703년에 제작된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을 사용했던 이씨는 현재 시카고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하차연(48, 프랑스)

비닐 봉지 설치작가
1989년 프랑스 님므 미술대와 1991년 독일 브라운쉬바이크 미술대를 졸업한 하차연 씨는 20년 넘게 비닐봉지를 사용해 작품을 만드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녀의 작업 속 비닐봉지는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나라마다 색과 모양이 다른 비닐봉지는 하씨의 유일한 작품 소재로 설치미술뿐만 아니라 사진 영상 등에도 사용한다.



박보(일본) | 가수

‘언더그라운드’에서 세계 평화를 노래
도쿄 = 김 동 호 중앙일보 특파원

‘일본의 밥 딜런’으로 불리는 재일동포 록가수 박보(55)는 자유분방하게 산다. 만나자마자 기자를 스카이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그는 자신이 사는 도쿄의 고즈넉한 주택가인 산겐자야 주변을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맑은 날엔 후지산도 보인다”고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초면인데도 낯가림 해소까지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의 음악 인생은 열 살 때 배운 드럼에서 출발했다. 중·고교 때부터 음악에 푹 빠졌고 대학에선 밴드를 직접 꾸려 본격적으로 음악가의 길로 들어섰다. 한국에 이름이 알려지기 전에는 미국에서 10년 동안 음악활동을 하기도 했다.

히로시마 원폭의 참상은 그의 음악에서 가장 큰 관심사였다. 반핵 운동을 하는 미술관 운영자와 교류하면서 자신의 음악에 반전 테마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한 시민 운동가들도 만났다. 노상에서 반전 노래를 불렀다. 그런 와중에 지방 라디오 방송국에 특별 출연하면서 재미 음악가로서 정착했다.

“미국에 뼈를 묻겠다고 비행기 티켓도 편도로 끊어서 갔어요. 정말 열심히 노래를 불렀던 시절이었다”고 미국 시절을 돌이켰다. 일본에서의 음악활동은 1979년에 데뷔 직후 히로세 유고라는 일본 이름을 박보로 바꾸면서 시작했다. 민족 차별이 심했던 시절이라서 이지메(집단 괴롭힘)를 자초할만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록 음악에 심취하면서 그는 그동안 써왔던 ‘가면’을 벗고 한국인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런 결심의 출발점은 대구 태생인 재일교포 1세 아버지였다. 완고한 성격의 부친은 일본 여성과 결혼했지만 일생 동안 귀화하지 않고 한국인으로 살았다. 그의 인생유전은 그를 완벽한 ‘코스모폴리탄’으로 만들기도 했다.

결혼을 세 번이나 했다. 일본인·프랑스인·호주인 부인과 살면서 색다른 인연을 쌓기도 했다. 현재 호주인 부인과 네 살, 여덟 살의 자녀를 두었다. 그가 이름을 한국 이름으로 바꾸자 소속 밴드는 “네 맘대로 하라”며 사실상 그를 음악계에서 쫓아냈다. 그 뒤로 그는 팬만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 노래하는 게릴라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이것이 그의 음악 인생을 바꿨다. 그를 외면했던 당시 일본인 동료들은 이미 음악계를 떠났지만 그는 활동 무대를 점점 더 넓혀가며 오히려 더 바쁜 날을 보낸다. 요즘에도 매달 두세 차례씩 꾸준히 콘서트를 한다. 작은 선술집에서 마이크 없이 20~30명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단독 공연은 경제적으로도 적잖은 도움을 준다. 9월에는 서울 신촌과 제주도에서도 공연했다. 서울에선 신촌블루스의 공연이었다. 올해로 음악활동 30주년을 맞아 한국의 팬이 ‘박보 100인 위원회’를 만들어 기념음반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폭발적인 가창력이 그의 인기의 비결이지만 강한 ‘평화’ 메시지가 팬들을 사로잡는다.

10월에는 도쿄 오기쿠보, 오사카, 교토에서 공연할 예정이다. 그는 자신이 부르는 노래를 대부분 직접 작곡한다. “전쟁은 절대로 막아야 한다는 게 내 노래의 핵심 메시지”라고 그가 말했다. 최근에는 반전 음악뿐만 아니라 민족차별 반대, 인생·사랑 등으로 주제를 넓혀간다. ■



지나 김(호주) | 패션 디자이너

피아니스트 지망생의 엇갈린 꿈
서 정 현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지나 김(33, 한국명 김소진)은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고등학교 1학년 때 호주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학창시절 연주회 때마다 늘 애를 먹었던 대목은 맘에 드는 드레스 고르기였다. 연주복이 자신의 음악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연주회를 앞둔 그녀의 머릿속에 퍼뜩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차라리 직접 드레스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직접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선 그녀는 어느 때보다 자신감 넘치게 연주했다. 그녀의 연주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너무 예쁘다” “어떤 브랜드냐?”고 질문공세를 펼 정도였다. 그녀가 “직접 만들었다”고 하자 모두가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날의 모험이 그녀의 인생을 바꿔버렸다. 1997년 피아노 전공으로 그리피스대를 졸업한 이듬해 타페대 모리톤 패션학교에 입학했다. 피아노 연주를 접은 지나 김은 한동안 자신의 ‘모험’에 불안해 했다. ‘패션 디자이너로 성공할까?’ ‘차라리 피아노를 했더라면 더 빨리 성공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불안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굵직한 패션대회에서 잇따라 입상하면서 자신감도 쑥쑥 자랐다. 2000년과 20001년 골드 코스트 학생 디자인 선발대회에서 연이어 우승했고 2002년 호주 패션 디자인 어워드에서도 대상을 차지했다. 이 대회는 호주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명성이 높아 TV에 생중계 됐을 뿐만 아니라 5만 달러(호주 달러)의 상금도 주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화려한 경력을 바탕으로 2004년 드레스 브랜드인 ‘지나 김 꾸뜨르’를, 2007년에는 기성복 라인 ‘지나 김’을 출시했다. 지나 김의 브랜드는 현재 호주 전 지역에 45개 매장에 입점했고 미국, 스페인, 두바이 등 세계 25개 매장에도 진출했다. 매년 호주 정부는 10개 패션 브랜드를 선정해 해외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준다.

지나 김은 이 지원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2007년 두바이, 2008년 뉴욕, 2009년 서울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상품성과 작품성이 적절히 조화를 이뤘다는 평을 듣는 지나 김의 의상은 유명인사 중에도 즐겨 입는 이가 많다. 배우 린지 로한과 호주 배우 나탈리 블레어 등이 지나 김의 의상을 자주 입는다.

그녀는 미스 월드 선발대회에 참가하는 호주 대표의 드레스를 제작했고 세계적인 보석회사 티파니, 까르띠에나 자동차 브랜드인 벤츠의 패션쇼에도 초청됐다. 그녀의 브랜드는 호주 상류사회의 관심사다.■



유현아(42, 미국·유럽)

성악가
늦깎이 성악가 유현아는 25세에 미국 피바디 음대에 입학했으며 1999년 바흐의 ‘마태 수난곡’ 공연 솔리스트로 본격 데뷔했다. 그 후 바흐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6년에는 모차르트 오페라 ‘차이데’의 주역으로 뉴욕 링컨센터와 런던 바비칸센터 무대에 섰다. 한국인 최초로 EMI에서 음반을 낸 소프라노다.



이동규(31, 미국·유럽)

카운터테너
여성의 음역으로 노래하는 남성 성악가 카운터테너는 팝페라 가수와는 다르다. 세계 클래식계에서 정상급 카운터테너인 이동규는 독학으로 시작,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쿠르 최연소 입상, 동양인 최초로 이탈리아 무지카 사크라 콩쿠르 1위 등 경력이 화려하다. 지난해 독일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의 ‘라다미스토’에 주연으로 발탁돼 그 실력을 다시 한번 인정받았다.



림룡순(54, 중국)

동양화가
고조선과 고구려 땅에서 한국의 역사와 전통을 지키는 한민족의 삶과 정서를 화폭에 담는 중국 길림성 출신의 화가 림룡순. 중국 로신대를 졸업했으며 19세 때 길림성이 선정한 중점 작가 12인에 최연소로 선정되었다. 림씨의 동양화는 지난해 국내에서도 선을 보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현재 28명의 고구려왕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화를 그린다.



이윤국(57, 오스트리아)

작곡가·지휘자
13세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윌리엄즈대에서 처음으로 지휘를 배웠다. 오스트리아 모차르트국립음대에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에게 지휘와 작곡을 사사한 뒤 1982년 오스트리아 라디오콩쿠르에서 우승했다. 1992년 잘츠부르크 캄머 필하모니의 지휘자로 나섰고 모차르트 전문가란 평을 얻었다. 1995년 한국인 최초로 모차르트국립음대 교수가 됐다.



신성호(34, 벨기에)

클래식 기타리스트
태어난 지 3일 만에 벨기에로 입양된 신씨는 14세 때 벨기에 ‘영 달란트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파리 고등 사범 음악원과 벨기에 왕립 음악원에서 클래식 기타를 전공했다. 세리지오 아사드 형제에게 사사했으며 2004년 유럽 콘서트홀 협회의 ‘떠오르는 스타’로 뽑혀 뉴욕 카네기홀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올해 한국에서 ‘회상(Remembrance)’이라는 제목으로 첫 음반을 냈다.



장률(48, 중국)

영화감독
중국 연변대 중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중문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2001년 베니스 단편 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11세’가 선정되면서 두각을나타내기 시작했다. 지난해 ‘중경’ ‘이리’를 연출했으며 ‘망종’은 2005년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됐다.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뉴커런츠상을 수상했다. 올해 6번째 작품인 ‘두만강’의 촬영을 끝냈다.



양방언(50, 일본)

작곡가
니혼 의과대를 졸업하고 1년간 의사로 근무하다 음악가의 길로 들어선 양씨는 KBS 다큐멘터리 ‘차마고도’의 OST 음악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또한 지난해 온라인 게임 ‘아이온’의 음악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그의 첫 게임음악으로 40여 곡을 썼다. 지금까지 7장의 정규 음반과 18장의 영화,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의 OST 음반을 발매했다.



문 블러드굿(34, 미국)

영화배우
치어리더, 가수, 모델을 거쳐 2004년 ‘내 생애 최고의 데이트’로 영화에 데뷔한 블러드굿은 올해 개봉한 영화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한국인 어머니와 아일랜드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블러드굿은 이 영화에서 크리스천 베일의 상대역인 블레어 중위역을 맡아 열연했다. 올 9월 한국관광공사 명예홍보대사로 위촉돼 한국을 찾았다.



한안순(33, 일본)

패션 디자이너
1999년 오사카 컬렉션에서 통해 패션계에 데뷔한 재일교포 3세인 한씨는 자신의 이름‘HAN AHN SOON’을 그대로 브랜드로 사용한다. 지난해에는 부산에서 열린 ‘프레타포르테 2009 SS 컬렉션’으로 국내 무대에 데뷔했다. 현재 도쿄 이세탄 백화점에 단독 매장이 있으며 일본 연예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로 인기를 더해간다.



캐런 오(32, 미국)

가수
본명은 캐런 리 오조레크로 폴란드계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2003년부터 록밴드 예예예즈의 보컬로 활동 중이다. 두 번째 정규 음반 ‘Show Your Bones’로 49회 그래미상 ‘최고의 얼터너티브 음반’ 부문 후보로 선정됐다. 뮤직비디오를 직접 연출하는 등 다방면에서 예술 활동을 펼친다. ‘Native Korean Rock’이란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하기도 했다.



린다 수 박(40, 미국)

아동작가
이민 2세대 아동작가로 아일랜드계 남편과 결혼했다. 자녀들에게 그들의 뿌리를 알려주고 싶어 한국 문화 자료를 섭렵한 뒤 한국적 정서가 깃든 작품을 연달아 발표했다. 2006년 ‘사금파리 한 조각(A Single Shard)’으로 그해 미국 최고 권위의 아동문학상인 뉴베리상을 수상했다.



애런 유(31, 미국)

배우
이민 2세대 한국계 미국인으로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에서 출발해 ‘특수수사대 SVU’ ‘에드’ 등의 TV 드라마에서 경력을 쌓았다. 이후 공포영화 ‘13일의 금요일’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한 ‘디스터비아’ 등의 인상적인 조연으로 눈길을 끌었다. 최근에는 제라드 버틀러 주연의 ‘게이머’에 출연하는 등 할리우드 화제작에 잇따라 얼굴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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