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심-원영식의‘나눔경영’데이트
고두심-원영식의‘나눔경영’데이트
원영식 늘 바쁘실 텐데 이렇게 큰 행사를 진행한다니 존경스럽습니다. 여성으로서, 배우로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게 쉽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저도 꾸준히 기부는 하고 있지만, 아직 자원봉사 활동에는 참여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쌀 나눔 행사를 시작하게 됐는지 궁금하군요.
고두심 1976년 조선시대 제주의 여류 자선가인 김만덕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 ‘정화’에서 주인공을 맡으며 그에게 푹 빠졌습니다. 김만덕은 흉년으로 제주도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줄을 잇자 전 재산을 털어 500섬의 곡식을 사서 내놓았어요.
오래전에 동양자수 인간문화재인 한 선배가 제게 김만덕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기를 권했습니다. 여든 살이 넘은 그는 자신이 김만덕을 홍보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으니 “나 대신 네가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했죠. 그때는 선뜻 나서지 못했습니다. 제 일이 바빴고, 또 ‘내가 누굴 홍보까지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나이 들어 생각해 보니 누구나 혼자가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사는 것이더라고요. 제주도에서 태어난 제게는 특히 김만덕의 나눔 정신이 자랑스러웠고, 많은 사람에게 이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6년 전에 김만덕기념사업회를 만들었고, 2007년 제주도에서 먼저 ‘쌀 천 섬 쌓기’ 행사를 열었습니다. 회장님이 기부를 시작한 동기도 궁금하네요.
원영식 나누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꾸준히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늘 하신 ‘10개를 벌면 3개를 줘라. 그럼 12개가 돌아온다’는 말씀을 듣고 자랐거든요. 그동안 지인들은 가끔씩 도왔는데, 모르는 사람을 돕지는 못했죠. 2003년에 문득 ‘이제부터 시작해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집 근처 서울 중구 사회복지 담당자를 찾았죠.
어려운 가정 세 곳에 한 달에 5만원씩 후원금을 보내는 것으로 기부를 시작했습니다. 후원금을 직접 도움을 받는 분들 계좌로 넣었습니다. 그분들 이름을 확인하면서 돈을 보내는 기분이 무척 좋았거든요. 이후 후원 가정을 계속 늘렸습니다. 이제는 제가 돕는 사람이 100명이 넘습니다.
고두심 젊은 분이 정말 큰일을 하네요. 존경스럽습니다. 저도 얼마 전에 모교에 1억원을 기부했습니다. 학교에서 이 기금으로 ‘두심 장학회’를 만들어 학생들 몇 명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저한테는 큰돈이라 처음엔 망설였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밤을 새우며 힘들게 일했던 과정이 현금을 보면 생각이 나거든요.
친척이나 지인을 도와도 고맙다는 말을 들을 텐데 모르는 사람을 돕는다니 대단하세요. 많이 벌었으니까 좀 나눠줄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쉽게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죠. 그건 기부를 해본 사람만이 압니다.
김만덕의 나눔정신 자랑스러웠다
원영식 저보다 위원장님이 더 대단하세요. 저는 모은 돈을 기부하면 그만이지만 위원장님은 사람들을 나눔 활동에 참여하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위원장님이 후배 연예인들에게도 나눔 활동 홍보에 나서기를 권해 줬으면 합니다. 저도 평소에 친한 연예인들에게 1000만 관객이 보는 영화에 출연하는 것보다 나눔 홍보에 나서는 게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고두심 나눔을 실천하는 후배 연예인들이 꽤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수 김장훈씨는 제가 존경하는 후배입니다. 김장훈씨처럼 다른 사람을 돕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후배에게 나눔 활동을 함께 하자고 권하지는 않습니다. 후배 중 적지 않은 연예인이 나눔 활동을 하는 건 알고 있을 테고, 스스로 어느 정도 필요성을 느낄 테니까요.
나눠 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압니다. 어린이재단 나눔 대사로 얼마 전에 우간다, 에티오피아를 다녀왔습니다. 더러운 웅덩이 물을 마시고 질병에 걸리는 아이가 많다는 얘기를 듣고 물 펌프를 설치하러 갔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에이즈에 걸린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의식주 중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내게 불만이란 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죠. 제가 아프리카에 다녀왔다고 홍보하니까 어린이재단에 후원 전화를 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제가 조금만 바쁘게 움직이면 많은 사람이 희망을 갖는다고 생각하니 나눔 활동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이건 제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도우면 행복해지거든요.
원영식 저도 그렇습니다. 나눔이 주는 쾌감이 있습니다. 어려운 가정 후원을 시작하고 몇 달 지나자 밥맛이 좋아졌습니다. 돕고 싶은 사람이 자꾸 보여 계속 기부를 합니다. 힘든 가정에 후원을 하던 중 우연히 중풍을 앓는 노인들을 돌보는 ‘은혜의 집’ 수녀를 만났습니다.
그 시설에 머무르는 노인들 소원이 제주도 여행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2008년에 1000만원을 들여 그 노인 24명과 간병인 24명을 제주도 여행을 보내드렸습니다. 얼마 전에는 네팔에 갔다 도울 사람을 만났습니다.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해발 4000m의 네팔 팡보채에 짓는 어린이 학교에 엄 대장, 몇몇 CEO 등과 함께 견학을 갔습니다.
집이 해발 6000m에 있어 가파른 경사를 따라 3시간 동안 등·하교를 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다리를 저는 한 학생이 눈에 띄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다 다리를 다친 그는 간호학을 전공해 한 달 월급이 8만원인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다리를 못 고치겠나 싶었죠.
서울에 와서 알아보니 치료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11월이면 그 학생이 서울에 옵니다. 한 달 동안 여기에 머무르면서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예정입니다. 여기에 제가 도움을 주기로 했습니다.
고두심 잘 보면 주변에 도울 사람이 많습니다. 자원봉사 프로그램이나 기부 방법을 안내하는 기관이 여럿 생겼습니다. 기부를 권하는 방송 프로그램도 많고요. 주변 사람을 돕는 것에서부터 나눔을 실천해도 좋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항상 그랬죠. 어릴 적에 우리 집에 서울에서 제주도로 무전여행을 온 대학생이 여럿 묵었습니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온 언니, 오빠들에게 어머니는 따뜻한 밥을 지어 먹였습니다. 협심증이 와서 응급실에 실려가면서도 어머니는 ‘저 양반 밥 먹여 보내라’고 헛소리를 했습니다.
원영식 저의 어머니도 그랬습니다. 집 근처 명동길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끼니 때마다 팥죽과 커피를 나눠줬습니다. 그래서 누나들이 지나가면 그 장사꾼들이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척했을 정도로 명동 장사꾼들 사이에서 우리 집 식구들, 어머니를 모르는 이가 없었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모교인 성동고등학교 친구가 많이 묵었습니다. 통금시간이 지나면 모두들 우리 집으로 왔죠. 자고 일어나면 어머니가 친구들에게 밥을 해줬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기부에 있어 역할 모델로 삼는 분입니다.
나눔이 주는 쾌감, 밥맛이 좋아져
고두심 저처럼 나눔을 실천하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네요. 어머니와 함께 제가 찾은 역할 모델은 김만덕입니다. 그는 평생 모은 전 재산을 털어 굶주리는 이들에게 죽을 먹였습니다. 여성이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없는 시대에 상당한 재산을 모으기가 굉장히 어려웠을 겁니다.
결혼도 안 한 몸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알고 그런 결정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합니다. 고향이 제주도로 같고, 같은 여성이라 더 관심이 갔습니다.
원영식 여성들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나누는 면에서 누님 세 명을 존경합니다. 첫째 누님은 노인 머리카락을 잘라주는 봉사를 합니다. 그는 환갑이 넘어서 미용사 자격증, 요리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머리카락을 잘라주려고 그의 목덜미를 향해 몸을 숙였는데, 그 노인이 누님이 일하기 좋게 아주 조금이지만 머리를 들어줬다고 합니다.
그 순간 누님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격도 없는 사람이 머리카락을 잘라주는 게 노인들에게 미안해서 미용사 자격증을 따기로 했습니다. 그는 요리 봉사를 하면서는 요리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둘째 누님은 아름다운가게에서, 셋째 누님은 아동복지회에서 봉사활동을 합니다.
고두심 진짜 멋있네요. 가족들이 대단합니다. 회장님과 회장님 누님들처럼 꾸준하게 기부와 자원봉사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눔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지속성’입니다. 물질적으로 몇 번 도움을 주는 것도 좋지만, 스스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주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원영식 그래서 교육 관련 기부에 관심이 많습니다. 지금 학생 7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습니다. 그중 대학생이 된 한미선(가명)은 제게도 많은 것을 가르쳐줬습니다. 미선이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사는 학생이었습니다.
교사가 되고 싶다고 하기에 대학 등록금까지 제가 내주겠다고 했습니다. 미선이가 자라서 교사로서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학생들을 도와주면 좋겠다 생각했죠. 그런데 미선이가 “그러면 제가 부담이 된다”며 “아저씨가 그렇게 도와준다고 하면 제 의지가 약해질 것 같다”고 했습니다.
어린 학생이 그런 생각을 하다니…. 놀랐습니다. 그때부터 미선이가 다니는 학원 수업료만 지불했습니다. 이런 학생들을 돕다가 멈추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을까 하는 생각에 힘들어도 열심히 일을 합니다.
고두심 세상에나…. 그 학생을 보면서 큰 기쁨을 느끼겠어요. 저도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일어서는 학생을 만나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두심장학회 장학금을 받은 모교 후배들이 고맙다고 매년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를 읽으면서 ‘그중 몇 명이 씨가 되어 잘 자라면, 이 사회가 더 밝아지겠구나.
내가 종잣돈을 뿌리는 거구나’ 생각하죠. 나눔 홍보활동을 계속하려고 건강관리를 합니다. 매일 오전 5시면 일어나 집 근처 북한산에 오릅니다. 매일 2시간 동안 산행을 하는 게 건강 유지 비결입니다.
원영식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에너지를 어디서 얻으시나 했더니 등산을 하시는군요. 저는 그동안 건강관리에 소홀했습니다. 담배를 하루에 3~4갑 피우고, 지난 3년 동안 점심을 거의 먹지 못했습니다. 주말에도 시간을 쪼개 일을 해야 했을 만큼 바빴습니다.
몸이 좋지 않아 몇 달 전 검사를 했더니 당뇨병, 고혈압 등 12가지 질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몸 팔아 돈을 벌었구나’ 싶었죠. 제 자신에게 해준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진단을 받고 담배를 줄였습니다. 시간을 내 아내와 집 근처 양재천 산책도 합니다.
고두심 돈도 좋지만 내 몸이 건강해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건강관리 방법은 찾았지만, 시간관리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특히 최근 몇 주는 정말 정신없이 보냈습니다. 제가 출연한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부산에 갔습니다.
서울의 영화 시사회장과 강원도 정동진에 있는 MBC 일일연속극 촬영장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 와중에 쌀 만 섬 쌓기 행사를 준비했죠. 제가 좋으니까 했지, 누가 시켰으면 못했을 겁니다.
원영식 ‘좋아서 한다’는 말씀을 들으니 나누는 활동 자체에서 에너지를 얻으시는 듯하네요. 제가 어려움을 겪었던 부분은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기부할 방법을 찾고, 이를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서울 중구 동사무소에서 사회복지를 담당했던 이수정씨를 만나 어려운 가정을 돕게 됐지만, 후원 가정이 늘면서 일하기 바쁜 제가 직접 관리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장애인협회, 꽃동네 등 따로 후원하는 곳도 많아져서 제가 한 달에 얼마나 기부를 하는지 계산조차 어려운 상황이 됐습니다. 기부금을 관리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이수정씨의 도움으로 고액 기부자의 기부금을 관리하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알게 됐고, 이 기관에서 만든 고액 기부자 클럽에 가입했습니다. 기부를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으니 어느 정도 성공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들과 딸도 도움 주며 살 길 바라
고두심 멋지네요. 저는 나눔 홍보대사로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는 이미지를 갖게 돼 성공했다 생각합니다. 중학교 때부터 꿈꿨던 배우가 돼서 36년을 살았고, 이제 제 이미지를 이용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게 됐습니다. 아들, 딸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며 살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자식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다행히 둘 다 잘 자랐습니다. 딸은 미국 대학에서 재무를 전공해 미국계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결혼도 했고요. 연극영화를 전공했던 아들은 전공을 경제학으로 바꿔 미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둘 다 항상 보고 싶습니다.
원영식 열네 살인 제 아들도 얼마 전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기부를 많이 한다는 얘기를 잘하지 않지만, 아들에게는 많이 합니다. “아빠가 이런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어. 성준이도 하면 좋겠지?”라고요. 네팔 팡보채에 아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아들이 어린이 학교 짓기를 돕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건 네 돈으로 해야 더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용돈을 모아 매달 8만원씩 어린이 학교를 후원하는 재단에 기부하고 있습니다. 성준이가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합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자주 ‘네 그릇에서 넘치면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릇이 깨지니까요. 나눔은 자기 그릇을 키우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아들에게 많은 돈을 상속할 생각은 없습니다. 돈만 주는 것은 독을 주는 것과 같으니까요. 제 재산은 사회에 환원할 생각입니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고요.
고두심 저도 재산을 상속할 생각은 없습니다. 모교에 기부를 하면서 자식들에게 나의 뒷바라지는 교육까지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돈을 많이 벌고 싶기는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돕고 싶으니까요.
원영식 한국에서는 아직 기부를 한다고 하면 ‘네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기에 기부를 해?’라고 생각하며 아니꼽게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미국에서는 부자가 기부를 하는 게 무척 자연스럽습니다. 케네디 재단, 록펠러 재단 등 기구를 만들어 기부를 하는 가문도 있습니다. 기부해도 무안하지 않게 한국에서도 기부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으면 합니다.
고두심 한국은 나눔에 눈을 뜨고 있는 시기라고 봅니다. 그동안은 나 살기 바빠서 다른 사람을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행사만 봐도 목표한 만 섬보다 두 배 이상 많은 2만2000섬이 모였습니다.
원영식 한국에서 기부가 활성화되려면 관련 제도가 보완될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 유명 배우가 기부를 목적으로 재단을 만드는 방법을 관공서에 문의했더니 서류만 한 묶음 줬다고 합니다. 바쁜 사람이 그 서류를 언제 다 읽습니까. 기부 방법을 안내하는 기관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고두심 원영식 회장님같이 기부를 꾸준히 하는 인물이 여럿 나온다면 기부하는 사람이 더 많아질 거라 봅니다.
기부는 자연스러운 행위
고두심 말씀했듯이 나눔 자체를 즐긴다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부담 없이 나눔 홍보를 합니다. 단지 공인으로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기는 하지요. 앞으로도 김만덕기념사업회에서 나눔 관련 사업을 할 계획입니다. 김만덕의 숭고한 정신을 이을 방법을 찾는 중입니다. 매년 쌀 만 섬 쌓기같이 큰 행사를 열 수는 없겠지요. 작은 일부터 할 생각입니다.
원영식 저는 내년부터 일을 절반으로 줄이고 기부 관련 활동에 더 신경쓸 생각입니다. 예컨대 재단을 설립해 모은 기금으로 사업을 하고, 수익금을 꾸준하게 기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누님들이나 고두심 위원장님처럼 나눔을 체험하는 자원봉사 활동도 하려고 합니다.
내년 4월에는 제가 후원한 네팔 팡보채의 어린이 학교가 완공됩니다. 그때 다시 네팔에 가려고 합니다. 올해처럼 매년 장애가 있는 네팔 어린이를 찾아 치료할 계획입니다. 길게는 대대로 기부하는 가문을 남기고 싶습니다.
고두심 저는 남기고 싶은 것은 없어요. 살아 있는 동안 지금까지 보여진 그 모습이 그대로 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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