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종 때 나온 활명수 지금까지도 ‘부채’ 흔든다
▎부채표 활명수는 동화약품과 역사를 함께한 효자 상품이다.
대한제국이 수립됐던 1897년. 이때 태어난 기업이 있다. 바로 동화약품이다. 대한제국은 일제 치하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동화약품은 112년의 역사를 안고 지금도 ‘부채’를 흔들고 있다. 서울 순화동 빌딩 숲에 4층 높이의 작은 건물이 있다.
동화약품은 두산과 함께 창업 100년을 넘긴 기업이다. 두산은 1896년 종로에서 포목상으로 문을 연 박승직 상점이 모태다. 설립연도는 두산이 한 해 빠르지만 학자에 따라선 같은 자리에서 한 업종(제약)과 제품(활명수)을 이어온 동화약품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보기도 한다.
예 교수가 동화약품에 주목한 이유 또한 한 우물만 파면서 112년 동안 꾸준히 성장해서다. 요즘은 매출이 조 단위가 넘는 기업이 숱하게 많다. 매출만 본다면 중소기업 수준인 동화약품은 학자들의 관심 밖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 교수는 “최근 매킨지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기업의 평균 수명은 15년”이라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거치며 살아남은 동화약품의 장수 비결은 기업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강조했다.
궁중 선전관 민병호 선생이 창업고종 때 궁중 선전관을 지낸 민병호 선생이 1897년 궁중 비방과 양약의 장점을 합해 ‘활명수’를 생산하면서 동화약품을 설립했다. 궁중 선전관은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경호실 고위 간부에 해당하는 직급이다. 민 선생은 숙종의 정비인 인현황후 민씨 집안 사람이다. 민 선생은 당시 수렛골로 불리던 순화동에 있던 민씨 생가에서 활명수 생산을 시작했다.
‘민족이 합심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뜻을 담아 회사 이름을 ‘동화(同和)’로 지었다. 동화약품의 가장 큰 장수 비결은 ‘활명수’란 히트 상품을 만든 것이다. 활명수는 지금 봐도 히트 상품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우선 제품 출시 시기가 적절했다. 당시 먹을거리가 변변치 않아 위장 장애, 소화 불량에 시달리던 사람이 많았다.
궁중에서 마신다는 소화를 돕는 물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였다. 서양 병원이 들어서던 시기여서 병에 담긴 양약 형태의 활명수는 소비자에게 쉽게 다가갔다. 민 선생은 제품에 신비함을 더하고자 고가 전략까지 썼다. 당시 활명수 가격은 40전이었다. 쌀 가격을 기준으로 40전을 현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1만8000원에 달한다.
동화약품의 브랜드 네이밍 기술도 당시로선 파격적이다. ‘활명수’의 의미는 ‘생명을 살리는 물’이다. 예 교수는 “‘생명을 살린다’는 것만큼 제품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극대화하는 이름을 찾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활명수는 제품의 특징을 잘 나타낼 뿐만 아니라 발음하기 쉽고, 기억하기도 쉬운 이름이다.
민 선생은 뛰어난 마케팅 능력도 갖고 있었다. 서울 정동교회에 다니던 그는 활명수를 정식으로 판매하기 전에 교회 신자들에게 먼저 나눠주고, 제품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다. 당시 큰 인기를 누린 활명수는 1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화약품의 효자 상품이다. 활명수 매출이 동화약품 전체 매출의 20%를 차지한다.
동화약품의 두 번째 장수 비결은 5대 사장을 지낸 보당 윤창식 선생이다. 그는 스러져 가던 동화약품을 인수한 민족 기업인이다. 성장하던 동화약품은 민병호 선생의 아들인 민광 사장이 경영에 관여하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민광 사장은 회사 경영보다는 독립운동에 더 관심이 많았다.
약방에서 얻은 수익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하기에 바빴다. 해외 망명 생활과 감옥살이를 반복했고, 결국엔 적당한 후견인을 마련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에게서 사업을 물려받은 민인복 사장은 동화약품이 파산하기 전에 기업을 회생시켜 키울 수 있는 인물을 찾았다.
그는 풍부한 재력과 탁월한 경영능력을 갖춘 보당 윤창식을 택했다. 윤창식은 오랫동안 고민하다 민 사장의 동화약품 인수 제의를 받아들였다. 민족주의 사상에 투철한 민족 기업인으로 당시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던 윤창식은 독립운동 후원에 큰 역할을 한 동화약품 살리기에 나섰다.
1937년에 취임한 윤창식 사장이 동화약품을 되살릴 수 있었던 첫 번째 비결은 ‘인재’였다. 윤 사장은 동화약품 인수 직후 뛰어난 인재를 찾았다. 예컨대 조선일보에서 사업부장과 교정부장을 역임한 김교영을 지금의 전문경영인에 해당하는 지배인에 임명했다. 조선일보 사업부에 근무했던 남상갑은 경리책임자로 고용했다.
윤 사장은 해방 후 회사를 재건할 때에도 인재에게서 힘을 찾았다. 이미 회사를 떠났던 남상갑을 다시 데려오려고 그에게 몇 번씩 찾아가 함께 일하자고 부탁했다. 다른 인재들도 같은 방법으로 불러모았다. 능력이 뛰어나다면 여성에게도 파격적인 기회를 줬다. 그는 1938년 해외 시장에 진출하고자 만주에 지사를 세우면서 지사장에 약사 출신 여성인 장금산을 임명했다.
지금도 해외 지사장에 여성이 선발되는 경우는 드물다. 장 지사장은 동화약품의 만주 진출에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당시 생산직 근로자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여성들에게 출중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요즘 강조되는 인재경영과 여성인력 활용을 1930년대에 이미 실천에 옮긴 셈이다.
처음으로 직원들 월급제 도입
▎동화약품 경영을 맡고 있는 윤도준 회장.
윤 사장은 해방 직후 정국이 혼란스럽고 경제 여건이 어려워지자 심사숙고 끝에 회사를 개점휴업 상태로 두기로 하고, 본인은 3년 동안 건국운동에 전념한다.
그는 이 기간에 직원을 한 명도 해고하지 않고 월급을 꼬박꼬박 지급했다. 윤 사장을 믿는 직원들은 3년 후 동화약품의 재건에 힘을 모았다. 경제여건이 조금만 어려워지면 직원부터 해고해 남은 직원들의 근로의욕마저 꺾는 요즘 기업인들이 눈여겨봐야 할 사례다. 신중한 판단과 철저한 준비는 윤창식 사장의 또 다른 힘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경남 마산으로 피란을 가 그곳에서 활명수를 생산하던 그는 1953년 휴전이 되었어도 바로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다. 다른 기업가들이 대부분 서울로 가도 서두르지 않았다. 서울 순화동 본사가 아직 폐허 상태였고, 시장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대신 2년 동안 마산에 더 머무르며, 사람을 써 공장을 복구했다. 경제 여건이 안정을 되찾자 회사를 서울로 옮겼다. 그만큼 신중했다. 그의 신중함과 과감한 실행력은 대대로 이어져 동화약품의 위기 극복의 열쇠가 됐다. 예컨대 강력한 경쟁 상품 출현으로 동화약품이 설립 사상 최대 위기를 맞았던 때가 그랬다.
1965년 삼성제약에서 활명수와 비슷한 성분에 가스를 넣어 만든 ‘까스명수’를 내놓았다. 탄산음료가 인기를 얻던 시절이라 많은 고객이 활명수 대신 ‘까스명수’를 선택했다. 1963년 아버지인 윤창식 사장에게서 자리를 물려받은 윤화열 사장은 직원들과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까스명수’처럼 제품에 가스를 넣으면 고유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지만, 가스를 넣지 않으면 그대로 밀려날 가능성이 높았다. 장장 2년 동안의 고민 끝에 경영진은 활명수에 가스를 넣기로 하고 ‘까스활명수’를 내놓았다.
2년이 지나자 ‘까스활명수’는 ‘까스명수’를 제치고 시장점유율 1위 상품으로 자리를 굳혔다. ‘까스명수’의 등장으로 시장은 커졌다. 경쟁 상품의 등장이 동화약품에 전화위복의 기회가 된 셈이다.
당시 제품을 담을 병을 구하기가 어려워졌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동화약품은 1위 회복에 안심하지 않고, 다음 번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고자 아예 병 제조 공장을 인수하기까지 했다.
동화약품의 경영권은 이제 윤창식 선생의 손자인 윤도준 회장에게 넘어왔다. 윤 회장은 정신과 전문의 출신 경영인이다. 2005년에 동화약품 부회장에 취임하기 전까지 그는 경희대병원 정신과 과장으로 일했다.
2008년 회장을 맡아 가업을 잇게 된 그는 동화약품의 변화를 준비한다. 일단 그는 직장 분위기 바꾸기부터 시작했다. 탄력 근무제를 도입하고, 퇴근 후에 회사에 남는 직원은 쫓아내게 했다. 걷기를 즐기는 윤 회장은 주기적으로 회사 근처 남산에서 직원들과 산책을 한다. 덕분에 경직됐던 회사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새로운 변화를 찾아서…112년이란 시간은 어찌 보면 윤 회장에게 부담스러운 숫자다. 1960년대에 동화약품은 텔레비전 광고를 가장 많이 하는 잘나가는 기업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매출액 기준으로 제약업계 10위권 밖이다. 2008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에 동화약품은 매출 1886억원을 올렸다.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두산은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방법이 무엇이 될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동화약품 홍보실 관계자는 “다만 같은 제약업 안에서 발전 방향을 찾는 중”이라고 말했다. 예종석 교수는 활명수에서부터 변화 찾기를 제안했다. 활명수는 지금까지 조금씩 바뀌었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는 112년 전 제품이다.
예 교수는 “이제 상황 변화에 맞게 제품의 성격을 바꿀 필요가 있다”며 “예컨대 과식으로 소화제를 찾기보다는 다이어트를 하며 건강음료를 찾는 소비자가 늘어난 점을 감안해 활명수를 건강음료 형태로 다시 생산하는 방법이 있다”고 설명했다. 경영 환경은 급변한다.
한때 기업이 잘나갔다고 해서, 그 기업이 언제나 승승장구하리란 보장은 없다. 예컨대 1997년 외환위기 때 국내 30대 그룹 중 10곳 이상이 파산했다. 장수 기업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문을 닫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동화약품에 112년이란 역사는 자산이자 부담이다. 동화약품 같은 한 우물을 파는 기업이 장수할 때 우리나라 산업의 뿌리는 더욱 튼튼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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