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끝 번 돈 세상에 ‘화끈’하게 던졌다
실패 끝 번 돈 세상에 ‘화끈’하게 던졌다
이종만은 1885년 울산군 용잠리에서 7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으나 16세에 뜻하지 않은 병마를 만나 3년을 병석에서 보내고 학업까지 중단했다.
19세에 다시 학업에 뜻을 두고 공부를 시작했지만, 얼마 후 또다시 병이 도져 학업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병과 씨름하며 유년시절을 보낸 이종만은 20대에 접어든 1905년, 얼마 안 되는 논밭을 팔아 부산에 나가 어물상을 차렸다.
러일전쟁이 한창이어서 경기는 좋은 편이었다. 특히 마른 미역이 잘 팔렸다. 일본 상인들은 품질을 따지지 않고 미역이란 미역은 보이는 대로 거둬갔다. 장사가 잘된다고 좋아만 하던 이종만에게도 의구심이 생겼다.
억세게 운 나쁜 사내
미역은 당시 지혈제로 각광받던 ‘옥도정기(요오드팅크)’의 원료였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부상병이 속출하자 옥도정기의 수요가 격증했고 덩달아 미역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것이다.
이종만은 가진 돈을 다 털어 미역을 매집했다. 기대한 대로 미역 값은 거침없이 치솟았다. 그러나 그해 5월 대한해협에서 일본 함대와 맞붙은 러시아의 주력 함대가 반나절 만에 전멸 당하자, 러일전쟁은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몇 년은 끌 것으로 예상했던 전쟁이 너무 빨리 끝난 탓에 미역 가격은 하루가 멀다 하고 폭락했다. 이종만은 매집한 값의 3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에 미역을 넘기고 어물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미역 장사로 빚더미에 오른 이종만은 고깃배를 탔다. 2년 남짓 남의 배에서 품을 팔다 보니 어느 정도 빚도 청산되었고 고기 잡는 요령도 생겼다. 1907년 23세가 된 이종만은 어선을 빌려 대부망(大敷網: 큰들그물) 어업에 나섰다. 어업은 생각만큼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다.
이종만의 고깃배가 풍어를 만나면 다른 배들도 풍어를 만나 생선 값이 떨어졌고, 반대로 생선을 보관하는 데 사용하는 소금 값은 폭등했다. 생선 값이 오른다 싶으면 좀처럼 고기 떼를 만나기 어려웠다.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이종만은 남보다 덜 자고, 덜 쉬면서 악착같이 일해 1만원 남짓 수입이 생겼다.
이제는 조그마한 고깃배 한 척 정도 장만할 수 있겠다며 마음을 놓는 순간, 사고가 터졌다. 원산까지 가서 명태를 한 배 가득 싣고 동해안을 따라 내려왔는데, 울산 앞바다에 이르러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된 것이었다. 기껏 잡은 생선을 수장시킨 것은 물론 선주에게 배 값도 물어주어야 했다.
28전 29기…영평금광으로 첫 성공연이어 실패를 맛본 이종만은 1908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향리로 돌아온 이종만은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책을 읽으며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1912년 28세가 된 이종만은 향리에 흩어져 있는 서당을 통합해 대흥학교를 설립했다. 신교육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그였지만, 고향 후배들을 위해 독학으로 신학문을 깨쳐 교편을 잡았다.
밤을 새워 공부해 헌신적으로 가르쳤지만, 단발(斷髮)을 장려하고 풍속 개량에 진력하다가 그만 봉건적 인습에 빠져 있던 동네 노인들의 눈 밖에 났다. 동네 노인들이 반발하니 학생들도 동요했다. 등교하는 학생이 점차 줄어들더니 1년이 안 돼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이종만은 또 한 번 실패의 쓴잔을 들이켰다.
이종만이 대흥학교 간판을 내릴 무렵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비록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전쟁이지만 조선 사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일본이 연합국에 참여해 군수물자를 공급하게 되자, 무기 제조에 필수적 광물인 중석 값이 폭등했다. 30세가 되도록 10년째 실패만 거듭하던 이종만은 이재민 구호를 위해 강원도에 들렀다가 양구에서 중석 광산 개발에 착수했다.
인부를 거느리고 손바닥이 갈라지도록 망치질을 해댄 결과 2년 만에 5만원 가까운 돈을 벌었다. 그러나 1918년 전쟁이 끝나자 중석 값은 다시 폭락했다. 광업설비를 갖춘다고 끌어 쓴 빚을 갚느라 악착같이 모은 5만원을 고스란히 날렸다.
비싸게 구입한 장비를 고철 값에 넘기고 양구를 떠나 금강산 유점사 아랫마을로 옮겨왔다.
이종만은 그곳에서 목재상을 하며 착실히 재기의 발판을 다지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수마가 전 재산을 앗아가 버렸다. 35세에 또다시 빈털터리가 된 이종만은 자본금 1000만원짜리 초대형 조선농림회사를 창립하려고 백방으로 애썼으나 그 누구도 순순히 출자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조선농림회사 창립 계획 역시 늘 그랬듯 실패로 돌아갔다. 이듬해 이종만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농촌 개량과 농업 진흥을 위해 매진했지만, 사업에 10여 번 실패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초라하게 낙향한 이종만을 믿고 따라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이은 실패에 실망해 낙향해 있던 이종만은 가족을 이끌고 무작정 상경했다. 이종만의 나이도 어느덧 39세였다. 그는 경성고등공업학교(지금의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공학도 출신 사회주의자 이준렬과 함께 경성고학당을 설립했다. 일생의 마지막 사업이라는 각오로 열과 성을 다해 고학생들을 보살피고 가르쳤지만, 고학당은 경영난으로 5년 만에 문을 닫았다.
1927년 불혹을 훌쩍 넘긴 이종만은 함경남도 정평군 영평평야 개척 사업에 나섰다가 실패했고, 함경남도 북청에서 개간사업에 나섰다가 또 한 번 고배를 마셨다. 함경남도 영흥군 진평면에서 동창광산을 경영했는데 역시 운이 따르지 않았다. 1928년 이종만은 함경남도 신흥군 명태동에서 친구와 동업으로 또다시 금광 개발에 나섰다.
자본은 친구가 대고 탐광과 채굴은 이종만이 맡아 이익을 반으로 나누기로 구두로 합의했다. 3년을 하루같이 피땀 흘려 일한 결과 1931년 명태동에서 금맥이 터졌다. 그러나 사업을 시작한 지 25년 만에 처음 성공을 맛본 기쁨도 잠깐, 이번에는 믿었던 친구가 그를 배신했다.
1931년 12월 27일, 이종만은 47세를 코앞에 두고 자신이 피땀 흘려 일군 명태동 금광에서 일당 한 푼 받지 못한 채 쫓겨났다. 가진 것이라곤 주머니에 든 27전뿐이었다. 이종만은 이를 악물고 백설이 성성한 길을 걸어 함경남도 신흥군으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또다시 기린광산을 차렸다.
기린광산은 이종만에게 큰 수입을 안겨주지는 않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을 정도는 됐다. 기린광산을 발판 삼아 양질의 금광을 찾아다니던 이종만은 1932년 일본인 기다시마가 출원한 영평금광의 출원증을 450원에 매입했다. 그가 벌인 29번째 사업이었다.
영평금광은 대한제국 시대부터 잘 알려진 사금광산이지만, 한동안 폐광으로 방치된 상태였다. 1934년 정식으로 허가를 얻은 후에는 착암기 10대를 동원해 대대적인 채굴에 나섰다. 여기저기서 금맥이 터져 1936년 한 해에만 40만원 상당의 금이 생산되었다.
재산 사회환원 약속 지킨 기업가이종만은 금광에서 나온 수익을 개인 용도로 소비하지 않고, 광산 설비를 갖추거나 유망한 금광을 매입하는 데 재투자했다. 그 결과 1936년에는 광구 400여 개, 면적 4억 평에 달하는 조선 최대의 금광, 장진광산 개발권을 확보했다. 장진광산 개발에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자, 이종만은 그에게 첫 번째 성공을 안겨주었던 영평금광을 일본인이 경영하는 동조선광업주식회사에 155만원을 받고 매각했다.
출원증 매입 금액의 3000배에 이르는 대박이었다. 이로써 무명의 광주(鑛主) 이종만은 조선 제일의 금광왕에 등극했다.
이종만이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30년 동안의 28번 실패 끝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1930년대 금광 하나 잘 만나 하루아침에 백만장자 반열에 올라선 사람은 한 해에 10여 명씩 어김없이 나왔다.
세상 사람들이 진정으로 감탄한 것은 공익을 위한 그의 ‘화끈한’ 씀씀이였다. 이종만은 매년 200여만원의 순이익이 생기는 대동광업주식회사의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자영농 육성을 위한 대동농촌사, 자영 광업가 육성을 위한 대동광산조합, 문화사업을 위한 대동출판사 등 사업체를 늘려 나갔다.
1937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평양 숭실전문학교가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폐교되자, 120만원을 들여 숭실전문학교 자산을 인수해 대동공업전문학교(김일성대학 공학부의 전신)를 설립했다. 이로써 대동콘체른(그룹)은 5개의 기관으로 늘어났다.
이종만은 “가족들 생활은 1만~2만원이면 족하니 나머지 재산은 죽기 전에 꼭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다. 동아일보는 1937년 9월 17일자 사설에서 “이런 갸륵한 독지가의 토지가 ‘불행히’ 157만 평에 ‘불과’하여 혜택을 보는 사람이 적은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라고 극찬했다.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해 안타깝다는 평가를 받은 부자는 아마도 이종만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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