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신세계號’ 어디로?
‘정용진 신세계號’ 어디로?
올 3월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세계 부산 센텀시티점 오픈 때. 정 부회장은 임직원들과 매장을 함께 둘러보고 있었다. 때마침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던 주부 고객들이 그를 알아보고 함께 사진을 찍자는 청을 했다.
수행하던 임직원들이 곤란하다며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그는 흔쾌히 응하면서 여러 주부 고객의 사진 모델이 돼 주었다고 한다. 격식을 따지지 않고 스스럼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는 그의 면모가 잘 나타난 일화다.
어떤 점들이 당시 그와 조우했던 주부 고객들의 호기심을 지극했을까. 훤칠한 키에 체구도 건장한 쾌남형의 재벌가 오너 3세. 고(故) 이병철 전 삼성 회장의 외손자.
이혼한 톱스타의 전 남편. 그들은 아마 이런 생각들을 했을지도 모른다. 신세계 관계자는 정 부회장에 대해 “오너 경영자인데도 직원들이 쉽게 가까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친근감을 주는 성품이다. 권위와 격식을 별로 따지지 않는다”고 전한다.
01 정용진 체제의 키워드
‘오너 책임경영’과 ‘글로벌 유통 톱10’정용진. 그가 이제 냉혹한 사업의 세계에서 수장(首長)을 맡고 나섰다. 경영수업을 받으며 사업에 조언만 하던 데서 벗어나 최종 결재권자로서 막강한 ‘권한과 책임’을 갖는 CEO 중의 CEO, 실질적인 총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신세계 측은 “이명희 회장이 정 부회장의 경영 역량이 회사 운영에 충분하다고 판단해 총괄 대표를 맡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번 인사에는 그의 어머니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의지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전해진다. 올해 66세인 이 회장은 곧잘 “더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하기 전에 대표이사를 맡아 잘 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 곁에 늘 붙어 다니며 경영수업을 착실하게 받는다는 평을 들어온 정 부회장의 동생 정유경(37) 조선호텔 상무가 이번에 신세계 부사장으로 전격 승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 부회장의 공식적인 직함은 ㈜신세계 총괄 대표이사. ㈜신세계는 신세계그룹에서 매출 비중 약 80%를 차지하는 주력 회사다.
따라서 14개 소속사로 구성된 신세계그룹을 그가 실질적으로 이끌게 됐다. 그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정용진 신세계號’ 변화의 밑바탕에는 ‘오너 책임경영’과 ‘글로벌 유통 톱10’이라는 두 가지 핵심 키워드가 숨어 있다. ‘변화’는 물론 기대를 갖게 하지만, 한편으론 이해 관계자들을 긴장시키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신세계 내부는 물론 국내외 유통업계가 그의 인사를 놓고 ‘기대와 긴장’을 함께 느끼는 분위기다. 신세계그룹은 삼성그룹에서 완전 분리한 1997년 4월 16일 이래 줄곧 전문경영인 체제를 고수해 왔다. 12년 동안 계속된 전문경영인 체제를 이번에 접고 오너 책임경영 체제를 출범시킨 것.
더 길게 보면 삼성그룹이 1963년 동화백화점을 인수해 신세계로 이름을 바꾼 이후 46년간 이어온 전문경영인 체제를 이번에야 접은 셈이다. 신세계는 정 부회장 인사와 함께 대표이사 12명 중 4명을 바꿨다. 50대 전문경영인을 발탁해 경영진을 과감하게 세대교체했다.
특히 10년간 CEO를 지내며 신세계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구학서(63) 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켰다. 그러면서 대표이사 직을 정 부회장에게 물려주고 한발 비켜서 후견인 역할을 맡도록 했다.
‘오너家 책임경영체제 강화’의 신호탄 예감구 부회장과 함께 신세계를 이끌어온 창업공신 석강(60) 백화점 부문 대표와 이경상(60) 이마트 부문 대표도 상임 고문으로 물러났다. 대신 현장경험이 풍부한 영업통 최병렬 이마트 대표와 박건현 백화점 대표를 전진 배치했다. 향후 정용진號 신세계의 공격적인 경영 행보가 예견되는 대목이다.
구 회장은 지난 2일 한 언론과의 접촉에서 “정 부회장이 결코 짧지 않은 경영수업을 끝내고 얼마 전부터 직접 경영을 하고 싶어 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평소 친분이 깊어 자주 어울리는 다른 재계 오너 3세들이 전면에 나서는 추세도 그에게 자신감을 줬다”고 말했다.
그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 이웅렬 코오롱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 허승조 GS리테일 부회장, 김담 경방 부사장 등과 교분을 나누고 있다. 특히 외사촌인 이재용(41) 전무와는 동갑내기로 경복고와 서울대 동기동창이기도 하다.
30대 그룹 중 신세계가 연말 인사를 앞장서 단행하면서 언론에 정 부회장을 클로즈업시키는 데 상당한 효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정 총괄 대표가 자기 그룹은 물론 세상과의 소통에도 성공해야 한다는 점에서 첫 출발이 좋아 보인다는 평도 들린다.
안 그래도 올 연말 재계 인사의 키워드로 ‘오너家 책임경영체제 강화’ ‘세대교체’ 등이 꼽히고 있다.
특히 창업 3~4세들이 보다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상황이다. 재계 한 인사는 “오너 책임경영의 장점은 단기적인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먼 미래를 내다보며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라며 “신사업에 나서거나 사업구조를 바꾸려는 기업들을 중심으로 고참 전문경영인들의 임무 중 일부를 오너 경영인들이 직접 맡는 사례가 늘 것”이라고 진단했다.
경기침체의 긴 터널을 일단 벗어난 만큼 미래 먹을거리 찾기에 공격적으로 나서기 위해 오너들의 경영참여가 보다 활발해질 것이란 분석이다. 정용진號 출범을 계기로 신세계 내부에서는 장기적으로 투자하고 경영할 수 있는 40대 오너에 대한 기대가 큰 것으로 감지되고 있다.
경영의 여러 면에서 젊은 오너 총괄 대표의 입김과 생각이 묻어날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젊음’은 도전할 기회와 가능성이 많다는 뜻을 내포한다. 물론 경험 부족으로 인한 시행착오도 있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온다는 점이다.
02 선대 이병철 회장의 사업가 기질 잇는다
모친 이명희 회장이 외할아버지 기업가정신 전수1979년 당시 이명희 회장이 신세계백화점 영업사업본부 이사로 첫 출근하기 전날. 고(故) 이병철 전 삼성 회장은 막내딸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맡겼으면 전적으로 신뢰하고, 서류엔 사인하려고 하지 마라.” 그로부터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명희 회장이 ‘서류 사인’까지 믿고 맡겼던 전문경영인 구학서 부회장이 회장으로 승진하면서 경영 후선으로 물러났다. 마침내 그 자리에 오너 3세인 정 부회장이 앉았다. 신세계 이명희 회장과 정재은 명예회장은 이번에 1남1녀인 두 자녀 모두를 주력기업인 ㈜신세계에 배치해 오너 3세 경영의 틀을 완성했다.
그동안 부모인 자신들과 전문경영인(구학서 부회장 등)을 통해 두 자녀가 웬만큼 경영수업을 받았다고 보고 ‘오누이 경영’을 허락한 것이다. 오누이가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주는 모양새를 갖추도록 했다. 정 부사장은 지난 13년간 조선호텔에서 근무한 ‘호텔통’.
이번에 그룹 핵심 기업인 신세계로 자리를 옮겼다. 직급도 2계단 수직 상승했다. 그만큼 정 부사장의 역할도 커졌다. 그는 백화점 부문에서 매장 리뉴얼 및 인테리어, 수입명품, 광고, 문화마케팅 등을 주로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 정 부사장은 남편 문성욱 신세계I&C 부사장과의 사이에 딸 둘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정 부회장의 오너십은 어떻게 이어져 왔으며, 어떤 색깔을 띠고 있을까. 이명희 회장이 1980년대 신세계백화점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 부친(고 이병철 회장)은 이렇게 당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린이 말이라도 잘 경청해라. 알아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 아는 척하지 말라.”
어머니 이명희 회장 가르침이 큰 자산선대 회장의 가르침은 모친(이명희 회장)을 거쳐 그의 외아들인 정 부회장의 삶과 경영에 큰 지침이 되고 있다. 이번 총괄 대표 인사를 앞두고 이 회장과 정 명예회장은 아들 정 부회장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고 한다. “그동안 경험하고, 배우고, 들은 것을 이제 소신껏 행동으로 옮겨 보아라. 구 회장님과 두 대표이사 말씀도 꼭 경청해라.”
남다른 사업가 기질이 3대째 이어져 오는 모습이다. 정 부회장은 어머니 이명희 회장에 대해 “선대 회장님의 냉철한 이성을 가장 많이 닮은 분”이라며 “경영수업을 받는 동안 외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전해주셨을 뿐 아니라 삶 자체가 나에겐 최고의 가르침이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사업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어머니에 대한 신뢰도가 그만큼 높다는 의미다. 정 부회장은 신세계 본사 빌딩 19층 자신의 집무실 벽에 선대 회장의 초상화와 ‘顧客第一(고객제일)’이란 친필 휘호를 걸어 두고 있다. 3대째 이어져 온 가르침을 늘 되새기기 위해서다. 선대 회장과 어머니에게서 사업가 기질을 물려받았다면 경영수업의 실제 스승은 구학서 회장이다.
정 부회장은 구 회장이 신세계 대표이사로 선임된 1999년부터 10년간 그를 가까이에서 보고 배웠다. 서류보다는 원칙을 중시하고, 나설 때와 침묵할 때를 가릴 줄 알며, 감정보다 이성으로 판단하는 법을 배우고 가슴에 새겼다. 2006년 부회장이 된 이래 묵묵히 구학서 부회장의 뒤에서 현장을 돌며 경영수업을 받았다.
03 올 들어 확 넓어진 행동반경
경영수업을 통해 쌓은 경험과 자신감이 바탕이 된 것 같았다. 재계 일각에선 그가 소비대중들 앞에서 스스로를 검증받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가 올해 경영수업을 받으면서 남긴 여러 족적들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속에 총괄 대표 취임 후 그의 경영 행보를 짐작하게 해 주는 열쇠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유통업의 생명은 소비자 트렌드를 읽는 것”이란 말을 자주 했다.
신세계에 조금씩 젊고 고급스러운 감각을 불어넣는 노력도 했다. 수시로 이마트와 백화점 매장을 찾아 상품과 진열 상태, 소비자 반응 등을 살피는 ‘현장 경영’에 나서곤 했다.
특히 이마트 자체 브랜드(PL) 상품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지대하다. 정 부회장 손을 거치지 않은 PL 상품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2층 자택에서 달마시안과 골든리트리버 등 5마리의 개를 키우는 그는 경험을 밑천으로 이마트 매장의 애완견 용품을 늘렸다.
와인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지난해 말 신세계그룹의 와인 수입 회사 ‘신세계L&B’를 설립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해외 백화점을 자주 돌며 얻은 느낌으로 간편한 소포장 식품 확충을 제안했다. 소비자 욕구 변화에 맞춰 백화점 식품층을 차별화해야 한다는 안을 내놓아 신세계 강남점을 국내 최고의 백화점 대열에 올려놓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2007년 6월 오픈한 경기도 여주 프리미엄 아울렛과 올 11월 27일 경기도 파주에 착공한 프리미엄 아울렛 2호점은 정 부회장이 주도적으로 간여한 프로젝트로 알려져 있다.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자리한 신세계 영등포점의 성공적인 리뉴얼 오픈에도 그의 역할이 컸다.
지난 5월에는 해외(독일 뒤셀도르프)에서 단독으로 기자간담회에 나서 신세계의 사업 계획과 업계의 주요 현안 등에 대해 자신감에 찬 목소리를 냈다. 입사 14년 만의 첫 단독 기자간담회 자리였다. 이전엔 항상 구 부회장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간담회에서 그는 올해 안에 이마트 소형 점포를 30개 이상 열고, 3년 안에 PL 상품 비중을 35%까지 늘리겠다고 말했다. 오너 경영인으로서 준비된 면모를 보여주는 듯한 분위기였다. 나아가 유능한 오너 경영인으로서 이름을 각인시키고 싶다는 포부까지 내비쳤다. 그 자리에서 라이벌 업체에 대해서도 젊은 오너답게 스스럼없는 견해를 보였다.
“우리는 의사결정에 우왕좌왕하지 않는다”그는 “롯데가 국내 최고의 유통 업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의사결정 시스템에 있어서는 신세계에 밀리지 않나 싶다. 우리는 의사결정에 있어 우왕좌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행보를 본 언론들은 당시 정 부회장에 대한 신세계의 경영권 승계가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는 분석까지 내놓았다.
또한 그는 자신의 주요 관심사를 ‘백화점과 이마트를 함께 개발하는 복합쇼핑몰 도입, 이마트의 글로벌화, 미래형 신규 업태 개발’이란 말로 집약해서 표현했다. 이뿐만 아니다. 협력업체 CEO를 잇달아 찾아가 만났다. 신세계 입사 후 처음으로 직원들과 대화의 시간도 가졌다.
이에 앞서 지난 2월에는 JP모건 주최로 열린 ‘한국 CEO 콘퍼런스’에 참석해 영어로 신세계의 미래 전략과 비전을 설명했다. 자신이 신세계의 대표자임을 알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신세계가 조만간 구학서 부회장 전문경영인 체제에서 정 부회장 오너 체제로 전환할 것이란 관측이 이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2006년 부회장에 오른 후부터 그는 이처럼 가업 승계에 대비해 부지런히 경영수업을 받았다. 서울 충무로 백화점 본사와 성수동 이마트 본사를 번갈아 오가며 관심 가는 사업을 챙기고 익혔다.
04 정용진, 그는 누구인가?
어머니 이 회장은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의 막내딸이며, 이건희(67) 회장의 여동생이다. 따라서 정 부회장은 고 이병철 회장의 외손자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는 그의 외사촌. 경복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서양사학과 재학 중 미국으로 건너가 브라운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1994년 귀국 후 일본 후지쓰에 잠시 근무했다. 1995년 신세계에 입사하면서 그의 경영수업은 시작됐다. 1997년 기획조정실 상무로 승진했고, 2000년 3월 경영지원실 부사장에 올랐다.
2006년 12월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2006년 9월 부친인 정 명예회장으로부터 신세계 주식 84만 주를 증여받았고, 이듬해 약 2200억원 상당의 주식 현물(37만여 주)을 증여세로 납부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현재 신세계 지분 7.32%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명희 회장(17.3%)에 이어 2대 주주다.
정유경 부사장은 2.53%를 보유하고 있다. 키 180㎝, 몸무게 90㎏의 당당한 체구. 정 부회장은 쾌남아 스타일이다. 패션 감각도 남다르다. 격식을 강조하지 않으면서 젊고 세련된 패션을 선보인다. 게다가 5년이 넘게 헬스로 단련한 몸짱이다. 헬스에 손을 댄 데는 계기가 있었다.
2004년께 몸에 다소 이상을 느낀 그는 병원을 찾았다. 의사로부터 ‘운동하라’는 말을 들은 그는 근육 만들기를 억지로 시작했다고 한다. 손을 댄 일은 끝장을 보는 성격이 운동에도 큰 도움이 됐다.
일주일에 3~4일씩은 운동을 했다. 골프 클럽은 지난여름 9년 만에 다시 잡았다. 2000년 골프에 스트레스를 느끼면서 클럽을 놓았다는 것. 시간을 뺏긴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기에 지면 화도 났다. 골프가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끝장을 보는 성격이 운동에도 큰 도움요즘은 공이 안 맞아도 괜찮고, 돈을 잃어도 웃고 넘어갈 수 있게 됐다고 한다. 골프가 주는 스트레스를 관리할 수 있게 된 것. 그래서 예전보다 더 흥미를 느낀다. 평균 타수는 90대. 300야드가 넘는 장타력의 소유자다. 골초 소리를 들어가며 하루 한두 갑씩 피우던 담배도 근육운동을 시작하면서 끊었다고 한다.
술도 즐기는 편. 주량은 소주 1병 반, 와인 1병 정도다. 이 정도가 다음날 업무에 지장을 느끼지 않는 양이다. 한창때보다는 양이 줄었다. 그는 영어와 일본어로 웬만한 대화가 가능하다. 미국 유학시절에 영어를, 후지쓰에 잠시 근무할 때 일본어를 익혔다. 외신 기자를 만나면 영어나 일본어로 인터뷰가 가능할 정도.
지난 2월 JP모건 주최 ‘한국 CEO 콘퍼런스’에 참석해 글로벌 투자자들 앞에서 신세계의 미래전략과 비전을 밝힐 때도 영어로 말했다. 초등학생인 두 자녀(1남1녀)를 두고 있는 그는 주로 퇴근 후나 주말에 음악과 강아지를 매개로 삼아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아이가 플루트나 클라리넷, 피아노를 다룰 줄 알고 정 부회장 역시 피아노를 곧잘 친다고 한다. 또 집에서 모두 5마리나 되는 애완견을 기르고 있다. 2003년 11월 이혼한 그는 아직 재혼은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주변에 알려져 있다.
05 정 부회장 “전 방위서 경영 재검토”
신세계號 선장으로서 ‘신성장동력 발굴’에 전력투구할 듯정용진 부회장이 신세계 총괄 대표이사 발령을 받은 다음날인 지난 2일 오전 8시 반. 서울 중구 충무로 신세계 본사 사옥에 그는 발령 후 첫 출근을 했다. 검은색 BMW 7시리즈 승용차를 이용했다. 감색 모직 투 버튼 블레이저 재킷의 콤비 정장 차림이었다. 이전까지 대외 활동이 그리 많지 않았던 그는 대표가 된 첫날인 1일에는 하루 종일 이마트 등 영업현장을 둘러봤다고 한다.
총괄 대표가 되기 전 그는 오전 9시 이전에 회사를 나온 적이 거의 없었다. 다른 일을 보고 오후에 출근하는 등 스스로 일정을 관리해 왔다는 것. 하지만 이날만큼은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경영수업 기간 중 특별한 권한 없이 직위만 부여받았던 부회장에서 이젠 책임이 막중하고 결재도 해야 하는 총괄 대표이사가 됨에 따라 생기는 변화의 한 단면이다.
본사 첫 출근을 기다렸다 그를 만난 한 언론사 기자가 대표 취임 소감을 묻자 “책임을 막중하게 느낀다”는 답변을 했다. 그는 또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신규 사업 등 신세계 경영을 전방위에서 재검토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깍듯한 태도로 예의를 갖추며 말을 아꼈지만 표정과 목소리에서는 자신감이 넘쳐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용진 신세계號’의 출범으로 신세계는 어떻게 달라질까? 그리고 당장 어떤 과제들에 직면하게 될까? 의욕이 앞서는 젊은 오너인 만큼 자신의 경영스타일을 살려서 하고 싶은 일이 많겠지만 당분간은 회사 경영 시스템에 여러모로 의존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
당장은 회사 전문경영인들이 오랫동안 축적해 온 기존 의사결정 시스템을 십분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그러면서 오너가 가진 장점을 최대한 살려 새로운 미래 먹을거리를 찾아 과감하게 나설 것으로 보인다. 정 부회장은 총괄 대표에 내정된 뒤 임원들과 이런 대화를 나눈 것으로 전해진다.
‘글로벌 유통 톱10’ 꿈 이루는 게 최종 목표“각 계열사 대표들과 경영지원실장 등이 사업방향을 정하고 최종 결재권자가 승인하는 과정에서 이미 훌륭한 의사결정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 나 역시 이런 시스템에 맞춰 결재를 하게 될 것이다. 또 내 뒤에는 구 회장님이 계신다. 경험도 부족하고 미숙하지만 이런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중책을 맡긴 것으로 안다.”
그렇지만 그는 이번 인사를 계기로 새 판을 짜려한 흔적이 엿보인다. 자신을 정점으로 그룹의 양대 축인 백화점과 이마트 부문에 현장에 밝은 새 전문경영인을 포진시켰다. 일단 오너 경영체제와 전문경영인 체제의 조화를 꾀하면서도 자기 색깔을 내려 했다는 분석이다.
신세계 관계자는 “지난 10년 동안은 유통업의 기초와 틀을 잡는 데 중점을 뒀다. 이젠 유통업의 본질적인 경쟁력 강화가 핵심인 때라고 판단해 현장 경험이 풍부하고 새로운 비전에 맞는 혁신을 이뤄낼 젊은 인재를 발탁했다”고 인사 배경을 밝혔다.
라이벌 관계인 롯데의 한 관계자는 “구학서 부회장이 회장으로 승진하는 등 정 부회장을 중심으로 위, 아래에 전문경영인을 배치해 신세계의 전통인 전문경영인 체제를 깨지는 않으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고 평했다.
이번 인사에 맞춰 조직도 대폭 개편했다. 우선 백화점 부문은 서비스의 질적 향상과 차별화를 위해 고객서비스본부를 신설하고, 마케팅에서 고객 서비스에 이르는 대(對)고객 업무를 일원화했다. 롯데, 현대 등 경쟁 백화점과 차별화하기 위해 부산 센텀시티, 강남점, 영등포점 등 대형 점포를 키워왔던 신세계로서는 대규모 투자를 어느 정도는 마무리한 시점이다.
이후부터 백화점 사업이 새로운 성장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마트 부문의 경우 상품본부를 식품과 비식품 2본부 체제로 재편했다. 각 본부 산하에 상품 매입과 상품 개발을 함께 운영해 분야별 전문성과 책임경영 체제를 강화했다.
경영수업 시절 그는 공·사석에서 “이마트와 백화점을 함께 개발하는 소위 ‘복합 쇼핑몰 도입’과 이마트의 글로벌화, 신성장 업태 개발 등을 통해 ‘글로벌 유통 톱10’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경쟁무대를 국내에서 세계시장으로 돌려 글로벌 유통기업으로 우뚝 서야 한다는 의지다.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하고 차세대 성장 동력을 발굴해 2013년까지 세계 10대 종합소매기업으로 도약할 것이란 포부다. 그는 “어머니는 ‘아버지(고 이병철 삼성 회장)가 바라는 이상적인 딸’이었듯이 나도 그런 아들이 돼야겠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사업에서 펼칠 태세다.
이에 따라 이마트의 경우 중국 시장 진출을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정 부회장은 이전에 “중국이 워낙 큰 상권이다 보니 각 지역을 하나의 국가로 생각하고 출점하고 있다”며 당분간 중국 사업에 주력할 것임을 시사한 적이 있다.
유통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사업을 축성했던 이전 세대와는 달리 정 부회장 체제는 기존 사업의 경쟁력을 최대한 높이면서 차세대 성장 동력을 발굴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며 “젊은 오너의 리더십과 맞물려 한층 공격적으로 신사업에 드라이브를 걸 가능성이 높다”고 관측했다.
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신세계의 경영 방향이 당장은 크게 바뀌지 않겠지만 해외기업 인수합병(M&A)이나 이마트 상품의 가격경쟁력 등과 관련해서는 상당한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예상했다. 유통업계에서는 정 총괄 대표에 대해 “많은 경험과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제품 기획에서 포장, 매장 운영까지 꼼꼼하게 관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정 부회장의 등장으로 국내 유통 ‘빅3’인 신세계와 롯데·현대백화점 모두가 창업세대나 전문경영인이 아닌 오너 2~3세들에게 경영권을 맡기게 됐다는 사실이다. 정 부회장이 내년부터 예고된 젊은 오너들 간의 치열한 유통 전쟁을 잘 치러내야 하는 숙제도 떠안은 셈이 됐다.
사실 이명희 회장은 후계 구도를 확정짓는 데 오랜 기간 뜸을 들였다.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이 상당 기간 전부터 대표이사 직을 수행하는 것을 보면서도 이 회장은 침묵만을 지켰다.
이번 인사를 통해 비로소 이중, 삼중의 검증 절차를 끝내고 ‘믿고 맡길 수 있는 CEO’라는 인증서를 내준 셈이다. 그런 만큼 정 부회장은 신세계號의 선장으로서 ‘지속 가능한 신성장동력 발굴’에 전력투구할 공산이 크다.
06 국내 유통전쟁 대응이 첫 과제
포화상태의 국내 유통시장 놓고 사투 불가피정 부회장이 지휘봉을 잡은 신세계는 살아 움직이는 대한민국의 유통역사 그 자체다. 1930년대 유통 불모지인 대한민국에 근대식 백화점을 태동시켰고, 1993년 이마트 출범으로 대형 마트 시대도 열었다. 젊은 오너 정 총괄 대표 시대를 맞은 신세계號는 현재 어느 정도의 기업군(群)인가?
공정거래위원회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신세계그룹은 우리나라 재계 순위 21위(공기업 포함 시 28위)다. ㈜신세계를 중심으로 14개 그룹 소속 회사들이 총 11조9560억원(2008년 말 기준)이란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작년에 순매출 11조1507억원(유통총매출은 14조9908억원)에 당기순이익 6793억원을 기록했다.
종업원 수만도 2만3486명에 달한다. 핵심 계열사는 단연 정 부회장이 총괄 대표이사를 맡은 ㈜신세계다. 작년에 순매출 8조8910억원(유통총매출은 10조9908억원)에, 당기순이익 5738억원을 이뤄냈다. 신세계그룹 전체에서 매출은 약 80%, 순이익은 약 85%의 비중을 각각 차지한다(2008년 기준).
그룹 모태인 신세계가 명실공히 장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신세계는 이미 한국의 유통업체를 뛰어넘어 글로벌 유통업체로 부상하고 있다. 이마트의 경우는 중국에 모두 23개의 점포를 운영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글로벌 유통 톱10’의 기치를 내건 정 부회장의 앞날에는 숱한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결코 장밋빛 청사진만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다. 그의 눈앞에서는 포화상태의 국내 유통시장을 놓고 사투를 벌이는 유통대전이 매일 벌어지고 있다.
꿈의 ‘글로벌 신세계’로 가는 시험대기업형 수퍼마켓(SSM) 갈등 등 풀어야 할 숙제도 한 둘이 아니다. 구학서 회장에게서 정 부회장으로 바통이 넘어간 신세계의 총괄 대표이사 직함이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워 보이는 이유다. 인생 연륜으로 봐서도 40대 초반은 경험에 한계가 있을 수 있는 나이다. 글로벌 경제 환경도 확실한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요동칠 가능성이 많다.
이제는 그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경영전략을 구사하고, 조직도 추슬러 자신의 앞에 놓인 험난한 경영 환경을 극복해 낼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과연 그가 세인의 기대대로 신세계를 ‘꿈의 글로벌 신세계’로 인도해 갈 수 있을지 큰 시험대에 올랐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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