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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란 것은 써야 돈 값을 하지”

“돈이란 것은 써야 돈 값을 하지”

백선행은 1930년대 한국의 대표적 여성 사회사업가였다. 그가 교육과 사회사업에 기부한 금액은 31만여원. 서울 시내 고급주택 31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16세에 과부가 된 그는 어떻게 거금을 모았고, 왜 사회사업에 나섰을까?
▎1933년 5월 13일 평양에서 거행된 백선행 사회장 광경. 조선 최초의 여성 사회장으로 평양 주민 3분의 2가 참여했다.

▎1933년 5월 13일 평양에서 거행된 백선행 사회장 광경. 조선 최초의 여성 사회장으로 평양 주민 3분의 2가 참여했다.

1848년 헌종 15년에 백지용의 외동딸로 태어난 ‘백 과부’는 이름이 없었다. 그녀는 ‘아가’로 불리길 14년, ‘새댁’으로 불리길 2년, 나머지 70성상을 ‘백 과부’로 불렸다.

아버지 백지용은 평양 박구리에 살던 가난한 농민이었다. 그나마 외동딸이 7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편모슬하에서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어렵게 성장한 백씨는 14세에 가난한 농민 안재욱에게 출가했다. 그러나 남편은 결혼 직후 병석에 누워 불과 2년 만에 자식 한 명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철창 속의 여인16세에 과부가 된 백씨는 친정으로 돌아왔다. 과부 모녀는 청대(쪽으로 만든 검푸른 물감) 치기와 간장 장사, 베 짜기 등 닥치는 대로 일해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를 생활신조로 삼고 열심히 일하다 보니 과부 모녀의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다.

그렇게 10년을 하루같이 살다 보니 150냥짜리 집 한 채와 현금이 1000냥 남짓 생겼다. 구차한 살림살이를 겨우 면했을 때, 어머니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백씨는 봉양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모친을 저세상으로 보내는 것도 서러웠지만, 모친의 상여 뒤를 따를 상주 한 사람 없는 게 더 원통했다.

백씨는 조카뻘 되는 친척을 모친의 사후 양자로 입적해 장례를 치르게 했다. 그러나 양자는 장례와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모친의 유산에만 관심을 두었다. 양자는 아들인 자신이 모친의 전 재산을 상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씨는 모친과 함께 10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모은 현금 1000냥을 양자에게 빼앗기고, 150냥짜리 집 한 채만 겨우 물려받았다.

백씨는 악귀를 쫓을 때 하는 평안도 풍속에 따라 문간에 콩을 뿌리고, 다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어머니와 재산을 한꺼번에 잃은 후, 다시 10년을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 살다 보니, 50여 석 추수의 땅문서가 생겼다. 그때부터 백씨의 재산은 해가 다르게 불어났다.

생활비는 일해서 생긴 돈으로만 충당하고, 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는 땅을 불려 나갔다. 백씨는 키가 크고 몸집이 벌어진 억센 여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억세다 해도 조선시대 여성이 남편도 없이 홀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고단한 일이었다. 백씨가 재산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온갖 사내가 그의 재산을 집어삼키려고 달려들었다.

1900년 악명 높은 탐관오리 팽한주가 평양 부윤으로 부임했다. 그는 박구리에 사는 백 과부가 기백 석 추수의 재산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죄 없는 백씨를 잡아다 하옥했다.

백씨에게 갖은 누명을 씌운 후, 재산을 바치면 풀어주겠노라고 회유하고 협박했다. 그러나 40여 년간 과부로 갖은 풍파를 겪은 백씨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백씨가 죽어도 재산은 바칠 수 없다고 버티자, 팽한주는 10여 일 만에 그를 방면했다.



행복한 돈 쓰기

▎백선행기념관과 백선행 동상. 현재까지 평양시내에 남아 있다.

▎백선행기념관과 백선행 동상. 현재까지 평양시내에 남아 있다.

탐관오리만 백씨의 재산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과부 혼자 사는 집에는 수시로 강도가 침입했다. 백씨는 강도의 완력 앞에 맨손으로 저항하다가 뒷머리와 앞이마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목에 칼을 들이대도 백씨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돈 있는 곳은 알려줄 수 없다고 버텼다. 백씨의 집에 숱한 강도가 침입했지만, 엽전 한 닢 훔쳐 나간 강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위문 간 사람들이 “가지고 계신 돈을 조금 내어주셨으면 이런 곤욕을 치르지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 하며 채근하면 백씨는 항상 이렇게 핀잔을 주었다.

“불쌍한 사람들에게도 다 못 나눠주는 돈을 밤중에 달려들어 사람 때리고 중상 입히는 놈에게 어찌 주겠나? 내 목숨이 없어져도 돈만 남아 있으면 그 돈이 좋은 일에 귀하게 쓰이게 될 것을 아는데, 눈을 뜨고 내 손으로 그런 나쁜 놈에게 내어줄 수야 있나.”

강도의 침입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백씨는 ‘목숨’과 목숨보다 귀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대문, 중문, 방문, 부엌문, 들창, 장지 등 집안 곳곳을 굵은 철창살로 에워쌌다. 백씨는 그 철창살 속에서 돈 궤짝을 부둥켜안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1908년, 백씨가 태어난 지 한 갑자(甲子)가 흘렀다.

과부생활 45년 동안 앳되고 뽀얗던 얼굴은 강도에게 맞은 흉터와 깊게 팬 주름으로 거칠어졌지만, 끼니를 걱정하던 곤궁하던 살림살이는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나아졌다. 백씨는 환갑잔치도 하지 않고, 대동군 객산리 남편 묘소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백씨는 객산리 마을에 들러 오랫동안 품어온 계획을 전했다.

“나무다리를 허물고 돌다리를 놓아주겠소.”

객산리 나무다리는 낡아서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을뿐더러 교각도 몹시 낮아 큰 비라도 내리면 물이 넘쳐 다리 구실을 못하기 일쑤였다. 백씨는 서울에서 석공기술자를 불러와서 목교가 있던 자리에 넓고 튼튼한 석교를 놓았다. 객산교(客山橋)를 준공하기까지 든 3000원 남짓의 비용을 모두 백씨가 부담했다.

객산리 사람들은 백씨의 은덕으로 준공된 다리를 ‘백 과부 다리’라 불렀다. 동네 유지들은 그처럼 착한 일을 한 사람을 ‘백 과부’라 부르기 민망하다 하여 ‘과부’ 대신 ‘선행(善行)’이라 부르고, 다리 이름도 ‘백선교’라 고쳐 불렀다. 조선의 윤리와 법도가 아직 굳건하던 헌종 시절 태어난 백씨는 환갑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름을 얻었다.

백선행은 사람을 좀처럼 믿지 않았다. 평생을 과부로 수절하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였다. 허튼 욕심 부리지 않고 매사에 신중했지만, 딱 한 번 교활한 거간에게 속아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 1917년 백선행은 평양에서 대동강 건너편에 있는 강동군 만달산 부근의 토지가 좋다는 거간의 말만 믿은 채, 평당 7~8원을 주고 수천 평의 땅을 샀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땅은 석회질이 많아서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황무지였다. 1~2전을 받고도 팔기 어려운 박토 중에 박토였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일본인이 그 지역에서 시멘트 원료를 발견했다. 일본인은 그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부근 토지를 모조리 평당 3~4원을 주고 매수했다. 백선행에게도 토지를 팔라고 매매 교섭을 했다.

백선행의 땅을 사지 않고는 시멘트 공장을 도저히 세울 수 없는 형편이어서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2전 하던 땅값은 순식간에 100배가 올라 1~2원을 호가하더니 얼마 후 10~20원까지 뛰었다. 매수호가가 백씨가 산 가격의 2~3배가 되었어도 백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본인은 결국 평양 부윤을 찾아가 사정했다. 평양 부윤이 주선해 성사된 매매가격은 평당 70원. 백선행이 속아서 산 가격보다 10배나 비싼 가격이었다. 이 거래 한 건으로 백선행의 재산은 30만원으로 불어났다. 속아서 산 황무지 덕분에 백선행은 동네 부자에서 평양 굴지의 대재산가로 올라섰다.



장례식은 최초 여성 사회장으로 치러져

▎백선행을 소개한 기사. 『신여성』 1933년 2월호.

▎백선행을 소개한 기사. 『신여성』 1933년 2월호.

평양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어도 백선행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집에 온 손님에게 냉면을 대접했다가 찌꺼기를 남기는 이가 있으면 “여보시오! 거 아깝지도 않소?” 하며 따로 보관해 두었다가 나중에 먹을 정도로 검소했다.

백선행은 한평생 학교는커녕 서당 한 번 다녀보지 못했다. 한글은 물론 숫자조차 읽고 쓰지 못해 굵기가 다른 수수깡에다 손톱으로 표시해 금전의 출납을 기록했다.

그런 식으로 30만원 상당의 재산을 관리했지만 한 번도 계산이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문자의 도움 없이 그럭저럭 재산을 관리할 수 있다고 해서 못 배운 것이 서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백선행은 광성보통학교, 숭인상업학교, 숭현여학교, 창덕보통학교 등 평양 시내 사립학교에 수십만원을 기부했다. 친지들이 돈을 그렇게 마구 쓰다간 얼마 못 버틴다고 충고할 때마다 백선행은 이렇게 말했다.

“돈이란 것은 써야 돈 값을 하지, 쓰지 않으려면 돈은 모아서 뭐 하나.”

그렇듯 돈을 아낌없이 기부한 덕분에 글조차 읽지 못하는 백선행은 위대한 교육자로 추앙받게 되었다. 70세 전후 백선행은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 사회사업가로 온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1925년 숭현예배당에서 ‘백선행 여사 교육 열성 찬하회’를 시작으로 백선행의 미거를 기리는 찬하회와 기념비 제막식, 동상 제막식 등이 꼬리를 물고 개최되었다.

1928년에는 근우회 평양지회 주최로 ‘백선행 여사 위안 야유회’까지 열렸다. 야유회가 열린 기림리 공설운동장에는 2000여 명의 여성이 운집해 그때까지 평양에서 가장 많은 여성이 참여한 행사로 기록되었다. 1928년까지 평양에는 조선인이 집회를 열 만한 공회당이 없었다.

부립공회당은 사실상 일본인의 전유물이었다. 조선인은 한여름이나 한겨울에도 야외에서 집회를 열어야 했다. 조만식, 오윤선이 백선행을 찾아가 조선인 중심의 공회당과 도서관을 건축할 뜻을 전하자 백선행은 흔쾌히 건립 자금을 내주었다. 백선행은 6만5000원의 공사비를 전액 부담했을 뿐만 아니라 재단법인 설립을 위해 추가로 8만5000원의 자본금을 출연했다.

개관식 사회를 맡은 조만식은 백선행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새로 지은 공회당의 공식명칭을 ‘백선행기념관’이라 선포했다. 백선행은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은 한 명도 없었지만, 그의 은혜를 입고 그를 어머니, 할머니로 섬기는 사람은 수만, 수십만을 헤아렸다. 백선행은 1933년 5월 8일 새벽 여든여섯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최초의 여성 사회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평양 주민의 3분의 2가 참석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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