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놈 시대가 온다
지놈 시대가 온다
1964년, 로버트 홀리 교수가 이끄는 코넬 대학과 미 농무부 연구팀이 인간 유전자 지도의 단서를 제공하는 유전자 구성 염기 4개(아데닌·티민·시토신·구아닌)의 순서를 간접적으로 ‘해독’했다. 이들이 인류 최초로 유전자 서열의 해독에 성공하면서 이와 함께 유전체(genome) 혁명이 시작됐다.
초기만 해도 해독 절차가 매우 느리고 비용이 엄청났기 때문에(77개 염기를 분석하는 데 4명의 연구원이 꼬박 3년을 투자했다), 30억 개에 달하는 모든 인간 유전자 염기를 분석해서 유전자 지도를 만드는 일은 먼 미래의 일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 다수의 연구팀이 로봇 공학의 도움을 받아 유전자 염기 해독 작업에 앞다퉈 달려들었고, 2003년에는 30억 달러를 들이면 인간 1명의 유전체 서열을 분석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미래에는 모든 사람의 유전체 염기서열 분석이 가능하다는 전망이 나왔지만, 유전체 하나를 분석하는 데 수십억 달러가 소요됐던 당시만 해도 이는 실현 불가능한 꿈이었다. 그러나 2004년부터 차세대 분석 기술이 연이어 등장했고, 덕분에 비용은 해마다 90%씩 하락했다.
그 결과 5년 전 1명의 유전체를 분석했던 비용으로 지금은 100만 명의 유전체 분석이 가능해졌다. 분석 비용이 5000천 달러로 줄어들자 제 3자(보험사·기업·정부)가 무료로 개인의 유전체 정보를 제공하고 이를 활용해서 의료비를 감축하게 된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누가 부담하든, 기술 발전으로 비용이 계속 낮아진다면 100달러가 안 되는 돈으로 유전체 분석이 가능해진다.
유전체 분석이 가져올 혜택은 분명하다. 지금은 거의 모든 신생아가 최대 40개에 달하는 유전 질환 검사(DNA 염기분석 검사는 거의 없지만)를 받고, 이에 따라 미국에서만 연간 400만 명의 신생아가 발병 위험이 높은 질환에 걸릴 가능성을 미리 알게 된다. 일례로, 유전자 검사가 도입되기 전에는 PKU 유전자 2개가 손상된 채 태어나면 정신지체아로 자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유전자 검사를 통해 해당 유전자 손상이 확인되면, 예방을 위한 특별 식단이 처방된다. 유전체를 면밀히 분석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수천 명의 아기가 PKU 유전자 손상을 비롯한 다른 고통스러운 질환을 피했다. 지금까지 1500여 개의 질병 관련 유전자가 규명됐고, 그 결과 진단과 치료, 예후 절차가 개선됐다.
성인의 경우, 유방암과 관련된 BRCA1-2 및 neu/HER2 유전자, 결장암 유발 유전자, 심장 부정맥과 관련된 LQT1-12, 혈관 내 응고를 유발하는 유전자(응고 인자 V 라이덴, 프로트롬빈 유전자 등)의 분석이 일상적으로 실시된다. 유전자 검사는 “자, 이게 당신의 운명이니 받아들여라”가 아니라 “이렇게 될지 모르니 미리 조치를 취하자”고 권고하려는 취지다.
질병은 유전적 취약성과 생활 습관이 결합해 발생한다. 특정 질환이 발병할 가능성이 크다면 당연히 그 위험을 줄여주는 생활 방식이나 습관을 실천해야 한다. 나이가 어릴수록 예방 가능성이 더 크다. 유전체 규명은 치료법 선택에도 도움을 준다. 특정 약물에 개개인이 유전적으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아직 초기 단계에 있는 ‘약물유전체학(pharmacogenomics)’은 이미 많은 환자에게 도움을 준다. 유전자 검사 결과는 HIV-AIDS(치료제 아바카비어), 정신병(클로자파인), 혈액응고(와파린), QT 연장 증후군(베타 차단제), 암(이매티닙, 이리노테칸, 5-플루러유러실, 메르캅토푸린, 또는 타목시펜) 등의 처방 약물이나 처방량을 결정할 때도 사용된다.
최근에는 보편적 항응고제 클로피도그렐의 효력을 크게 저하시키는 유전자 변이가 규명되면서 해당 유전자 변이를 가진 사람의 30%에게는 좀 더 강력한 항응고제가 처방된다. 일반 환자와 똑같이 처방할 경우, 심하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다. 유전체 분석의 비용이 낮아지면 생물학 연구는 혁신적 변화를 겪게 되고, 이는 엄청난 의료 혜택으로 이어진다.
유전 지도와 병력 관련 자료가 늘어나면 암·심장병 등 일반 질병을 야기하는 희귀 유전자 변이가 더 빨리 규명된다. 더불어 온라인 암환자 커뮤니티 ‘페이션츠라이크미’나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 바이오 뱅크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유전 정보를 제공하는 자원자도 증가했다.
치료약이나 예방법 연구를 촉진하려고 자신의 병력이나 유전 정보를 기꺼이 제공하는 이들의 진정한 희생정신에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신기술의 등장으로 빈부 격차가 심화된다는 우려가 있는데, 유전체학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유전자 분석은 빈곤층에도 혜택을 준다.
제 3세계에서는 전염병의 기승으로 삶의 질과 교육 수준 향상에 어려움을 겪는데, 유전자 분석 비용이 낮아지면 각종 질병과 신종 질환을 유발하는 미생물과 약물 내성의 추적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최적의 치료법을 찾는 일도 용이해진다. 인간 유전 지도를 연구자에게 공개하면 장점도 있지만 잠재적 위험성도 있다.
유전 지도만큼 자세한 개인 정보도 없다. 따라서 미래 유전체학의 존망은 유전 정보 보호에 좌우된다. 기업이나 의료 보험사, 정부가 개인의 병력이나 유전 정보를 수집하고 보관하게 되면 이들이 개인의 유전체나 세포 관련 정보를 통제하면서 수익을 창출할 위험이 있다. 또한, 개인의 유전 정보가 보험사나 고용주 손에 들어갈 경우 차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런 문제를 방지할 목적으로 2008년 미국에서는 유전 정보에 근거해서 더 높은 보험료를 부과하거나 채용·승진 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유전정보차별금지법(GINA)이 도입됐다(장기치료나 장기생명보험의 경우, 유전자 분석 결과에 따라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큰 사람이 가입하므로 GINA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유전자 분석 1세대’인 우리가 세운 규칙은 미래 세대에 방향을 제시하는 지침이 된다. 유전체는 우리 얼굴처럼 개인의 건강 상태나 선조로부터 내려온 특징, 성격 등의 중요 정보를 보여주면서 항상 다른 사람에게 공개되는 운명에 처할까?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질까? DNA가 공개되면 인간을 기계적으로 인식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다양성을 수용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애가 고양될 가능성도 있다.
이는 인간의 신비감을 줄이는 동시에 경외감을 더욱 강화시킬 듯하다. 인간 유전체는 미래의 무한한 자원이다. 이를 어떻게 다룰지에 따라 인간은 뚜렷한 특징이 없는 평균적 다수에서 미세한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개인으로 인식될 전망이다.
[필자는 하버드 의대 유전학 교수이며 유전체 분석 속도를 높이려는 20개 개발업체 중 15곳, DNA 진단 기술업체 5곳에 자문을 제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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