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건강도 가진 사람이 나눠야
돈도 건강도 가진 사람이 나눠야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5월 18일 오후. 기자가 찾은 교보생명 12층 회장실 회의실은 신창재 회장의 소탈함을 보여주듯 소박했다. 체크 재킷에 화사한 셔츠를 입고 나온 신 회장은 가냘퍼 보이는 체구지만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인터뷰 내내 “내가 무식해서…”라는 말을 많이 했다. 하지만 조리가 있고 경영자로서 내공이 깊어 보였다.
셔츠 색깔이 화사해 보기 좋습니다.“내 얼굴이 차잖아요. 표정이 없고. 옷이라도 밝게 입어야죠.”
한국의 40대 부자 순위에서 5위에 올랐는데요.“주식 가치가 올라서 그런가 본데, 어떻게 계산한 건지 나도 모르겠어요. 비상장이고, 교보생명에 대해 정보도 없을 텐데. 친구들 만나면 ‘오늘은 한 10억원어치만 술 사라’ 그러는데, 허황되죠. 내 자산은 다 주식에 붙잡혀 있는 건데. 그럼 나는 ‘너도 먹고살 것 있는데, 남 도와줄 생각해라. 그럼 나도 같이 하마’라고 해요.”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상을 받으시는데, 회장님께서 생각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무엇입니까?“영화 <슈퍼맨> 을 보면 재능을 가진 게 축복이자 저주인 걸 알 수 있죠. 거기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말이 나오죠. 돈이든 건강이든 재능을 가진 사람이 나눠야 하는 건 의무죠. 어차피 내가 죽고 세금 내면 재산의 절반은 날아가요. 그 전에 그걸 잘 쓸 수 있는 단체에 내놓거나 업무 프로세스를 확립시켜 놓으려고 해요. 아버님은 생전에 ‘너 평생 먹고살 돈이 얼마냐, 그것만 떼어 주마’라고 했어요. 나머지는 줄 생각이 없었죠. 아버지 뜻을 기려 사회에서 그런 활동을 해야겠다고 맘먹고 있어요. 경영권을 물려줄 순 있어도, 재산 자체를 물려줄 생각은 없어요. 물려주면 다 날아가니까.”
경영권 물려줘도 재산은 안 물려줘
최근 삼성생명이 상장했는데, 교보는 언제쯤 상장됩니까?“상황이 좋을 때 해야죠. 우린 삼성생명처럼 주식을 유통시켜 달라는 주주들의 급한 요구도 없어요. 대한생명처럼 자본을 급히 확충할 이유도 없어요. 회사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때 상장하면 된다는 생각이에요. 4~5년 전에는 급해서 해 달라고 했지만, 상장 관련 제도가 만들어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그사이 열심히 해서 돈을 많이 벌었어요. 이젠 서두를 필요가 없죠.”
신창재 회장의 꿈은 사업가가 아니었다. 그래서 유학을 가서 경영학을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마다했다. 대신 의대에 진학해 산부인과 의사이자 대학 교수가 됐다. 하지만 지금은 선친이 창업한 교보생명의 경영을 맡고 있다.
그는 요즘 고객 만족도 면에서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기 위한 10개년 계획 마무리 작업에 바쁘다. 그 결과 계약 체결 3개월 이내 해지 고객이 12.9%에서 2.9%로 줄어들었다. 그는 “우리는 ‘화룡점정’에서 마지막 점을 찍고 있다”고 말했다.
교보생명 기업문화가 과거에 비해 달라졌다는 사람이 많습니다.“입사 초창기 땐 뭣도 몰랐죠. 배우고 듣기만 했어요. 다들 날 어려워만 하고…. 선친도 ‘너는 주장 맡을 능력이 없으니까 부장 맡아라. 부회장 하면 무식하다고 건드리진 않을 거다’고 했죠. 불가근 불가원이죠. 적당한 거리에서 회사를 파악하라는 말이었어요. 처음 느낀 건 회사가 관료적이라는 거였어요. 상사와 부하, 부서 간 소통이 없었죠.”
한발 떨어져서 회사를 보니 더 잘 보이던가요?“내가 (의사만 하다 와서) 무식하니까 고객 입장에서 회사를 봤죠. 당시 교보생명은 대기업 병이 심했어요. 고객이 아닌 공급자 중심으로 돌아갔고요. 대신 일사불란하게 결집하는 응집력은 대단했죠. 그땐 일명 ‘가라계약’도 성행했죠. 계약 10개 들어오면 진짜는 서너 개고 나머지는 다 보험설계사들이 가입한 거죠. 인센티브 얻고 얼마 있다 해약해요. ‘보험회사는 설계사가 주요 고객인가’ 착각도 했죠.(웃음)
몇 년 지나니까 임원이 와서 알려주더군요. 알면서 왜 안 바꾸느냐고 하니 ‘그걸 누가 이야기하겠습니까’ 하더군요. 그때부터 직접 나섰죠. 사원들과 대화 기회를 만들었어요. 운동회·등산도 하고, 맥주도 날라주고, 기타도 치고, 춤도 추고…. 친근감 쌓은 후 물어보면 다 얘기해 줘요. 그걸 듣고 바꿔나가니까 ‘얘기하면 되는구나’ 해서 점점 호응을 하더군요. 결국 전체 사원 중 4분의 1 정도의 선도그룹이 끌고 나가는 거예요.”
조직 혁신을 어떻게 했나요?“인트라넷을 터놓고 제안 받은 걸 재배분하는 역할만 했어요. 내가 수렴해서 현업부서에 던지고, 부서에서 오케이 하면 사원들이 신나는 거죠. 내가 현장에 밝지도 않고, 잘할 수 있는 일도 아니죠. 내가 무식하기 때문에, 중간에 끼면 좋을 게 없어요. 처음에 분위기만 띄워주고, 나는 싹 빠져야죠.”
중간에 빠지는 건 누구한테 배웠나요?“아버지에게서요. 아버지께서 경영할 때 임원들이 사실을 얘기 안 하더군요. 얘기해도 못 알아듣고. ‘당장 그 사람 교체하라’는 과장된 반응이 나오기도 했죠. 그걸 보고, 조직에서 소통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내가 망원경으로 산을 보는 전문가라면, 사원들은 산기슭에서 나무 하나하나를 아는 현장 전문가죠. 각자 역할이 있고 그걸 건드리는 건 좋지 않죠. 내가 영업을 직접 맡기 시작한 게 3년밖에 안 돼요. 그동안 나는 모른다, 저 양반이 나보다 낫다고 미뤘죠. 카네기 묘비명에 ‘여기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을 부리다가 간 사람이 누웠다’고 쓰여 있어요. 그게 리더죠. 천재 같은 내 친구가 경영하던 회사는 망하더군요. 천재 한 사람이 다 결정했으니까.” 슈퍼맨>
CEO가 천재일 필요는 없다
천재 같은 CEO는 안 된다는 말로 들립니다.“사람이 다스리는 회사가 아니라, 비전이 다스리는 회사가 돼야죠. 회사의 응집력, 정직, 성실한 기업문화, 도전정신 등 회사의 장점과 전통을 집대성해 비전체계라는 틀을 만들었어요. ‘비전을 제시하라’는 사원들 말에 자극 받아서 했죠. 제일 중요한 건 성과 중심의 인사관리예요. 비전전략을 제대로 따라가고 기여를 많이 한 사람에게 더 많은 보너스를 주고, 빨리 승진시켰죠. 고객지향·정직·성실 같은 핵심가치에 투철한 사람을 리더로 쓰고요. 간부사원에 대한 데이터를 축적해 놨어요. 임원이 그만둬도 후계 1순위, 2순위가 다 있어 하루 안에 교체인사를 할 수 있죠.”
신 회장은 어릴 때는 교보생명에 관심이 없었다. “집이 커지면서, 고등학교 시절 자가용 운전사 같은 여러 모습을 보면서 회사의 성공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내가 사업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어렸을 때 발명가, 선생님 같은 꿈은 많았지만 CEO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매형이 된 누나의 의대생 남자친구에게 자극 받은 그는 의사가 되리라 결심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조용하고 신중한 성격이 사업가보다는 의사에 더 적합하다는 데 동의했다. 그는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고, 10년간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산부인과 의사로 일했다. 그러던 1993년,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게 돼 3년간 아버지를 돌봤다.
친구와 가족들은 아버지의 사업을 도우라고 부추기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의사를 포기하고 1996년 이사회 부회장으로 교보생명에 합류했다. 그는 “분명히 내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며 “하지만 창업자의 아들이어서인지 사람들은 내가 적합한 후계자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의사 출신 CEO라서 특별히 다른 점이 있나요?“보험회사라 의사였던 게 도움이 됐죠. 어떤 건강보험 CEO도 나 같은 사람 없어요. 의료전문가였기 때문에 건강보험이 상당한 손실을 낸다는 걸 알게 됐죠. 나의 리더 경험은 6명뿐인 대산재단의 이사장 직이 고작이었어요. 종합병원 교수였지만 모든 걸 책임지는 수장과는 좀 다른 개념이죠. 의사는 자기 분야 전문가이기만 하면 되지만 회사는 힘을 합치는 게 관건입니다. 결국 의사였던 게 업무 파악엔 도움이 됐지만 조직관리나 팀워크엔 도움이 안 됐죠.”
선친과의 관계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아버지를 피해 의대를 간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는데….“무섭긴 했죠. 집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술 먹고 들어와 힘들어하고, 회사에서 말 많이 해서 목이 부어 말 시키면 싫어하는 거죠. 요새 나하고 똑같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대화를 해요. 그러다 1996년 회사에 들어오면서 아버지의 참모습을 보게 된 거예요. 그 전엔 어떻게 그렇게 집안에 무심할 수 있을까. 왜 어머니만 야단 칠까. 그래서 초등학생 때 항의하는 편지를 쓴 적도 있어요. 어머니를 비호하기 위해. 그래 놓고 큰일 났다고 겁먹었죠.”
원래 의사가 꿈이었나요?“공대 전기과에 가고 싶었어요. 무전기나 라디오, 앰프 만드는 거에 관심이 많았어요. 사제 총도 한번 만들다가, 오발해서 다치기도 하고. 만드는 거 좋아했어요. 아버지는 고등학교 1학년 되니까 상대 갈 생각 없느냐고 한번 물어보시더라고요. 생각 있으면 지금부터 미국 가서 영어 배우고, 미국 대학 상대에 가라. 그런데 내가 ‘노’ 했죠.”
산부인과를 택한 이유가 있나요.“내가 여자를 좋아하니까.(웃음) 산부인과는 내과도 외과도 아닌 중간으로 봤어요. 절충안이죠. 수술이 외과처럼 길지 않고 내과처럼 일이 따분하지 않잖아요. 그리고 다이내믹해요. 아버지도 찬성했어요. 아버지 말씀이 ‘내과는 보고 고치지 못하니까 의사도 같이 가라앉고 우울해지는데, 산부인과는 얼마나 기분이 좋으냐. 환자도 아니고 혼자 들어와 둘이 돼 나가니까’ 하셨죠.”
어떻게 살아야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까?“골고루 잘해야죠. 돈, 건강, 지식, 평안한 가정, 또 이웃에게 잘 베풀고, 전문 직업성을 가져야 하고, 마음이 지혜로워야죠. 세계 최우수 보험설계사들이 만나는 ‘백만불 원탁회의(MDRT)’에 가서 배운 거예요. 보통 우리는 학교 다닐 땐 배우고, 직장에선 돈 벌고, 60대 이후에 쓰며 살잖아요. 이걸 동시에 해야 한다는 거죠.”
CEO로서 고민이 많을 텐데, 어떻게 푸나요?“분야별로 믿을 만한 사람과 얘기하죠. 회사 고민은 임원들과, 건강 고민은 의사와 하죠. 경영자로서의 외로움과 고민은 경영자끼리 모여 수다 떨어요.”
여가시간은 어떻게 보내시죠?“TV나 영화 봐요. <투사부일체> 가 재미있었어요. 이종격투기 UFC도, 동물의 왕국도 자주 보고요. 집사람은 잔인하다고 하는데, 경영의 관점에서 보거든요. 개 눈엔 똥만 보인다고. 투사부일체를 보면 똘마니가 어떻게 보스에게 충성하게 되는가, 조직의 관점에서 보는 거예요. UFC도 권투선수 출신이 레슬링 선수와 붙었을 때 권투가 아닌 레슬링으로 상대했다가 깨지는 걸 보게 되죠. 자신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상대방의 전략에 말려서 지는 거예요. 치타의 생존전략을 보면서, 경영과 똑같다 생각했어요.” 투사부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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