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도 사람이 살았다네’
‘그 시절에도 사람이 살았다네’
“형님은 국내 인문학자로 누구를 최고로 치십니까?”
“글쎄. 느닷없는 질문이지만, 좋아하는 학자로는 서양사의 주경철(서울대 서양사학과)교수, 같은 학과의 선배인 최갑수 교수가 떠오르는구먼. 하지만 최근 10~20년 내에 국사학자로는 이렇다 할 이가 없어. 지난해 정년퇴임했던 서울대 국사학과의 이태진 교수도 전 시대 거물에 비해 중량감이 떨어지지.
하나같이 좁은 민족주의 논리를 벗지 못했고…. 국제정치학을 전공했지만 시야 넓은 역사책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를 쓴 한림대 이삼성 교수를 보라고…. 일국사(一國史)를 벗어난 동아시아 비교사인데, 그런 게 바로 책이지. 문학에는 국문학자 조동일 교수가 꼽히지만, 연세가 좀 많으신가?”
“저도 조동일 교수의 ‘한국문학통사’를 본 기억이 나는데, 좀 놀랐던 것은 송강 정철 등의 가사문학을 아예 언급하지 않았더군요. 입맛이 달라 축소할 수는 있어도 누락시킨 의아한 대목이죠. 그럼 한양대 정민, 부산대 강명관 교수는 어떻습니까?”
“정민과 강명관이라면 인문학 시장의 출중한 스타 필자가 분명하지. 모두 한문학을 했기 때문에 콘텐트가 새롭고, 현대 문장도 안정적이지. ‘미쳐야 미친다’의 정민 교수가 조금 더 유연하고, 세계사가 요동쳤던 18세기 틀에서 조선시대를 바라보니 시야가 넓다면, ‘조선의 뒷골목 풍경’으로 유명한 강명관은 뚝심이 장기야. 힘이 좋지. 아쉬운 점은 ‘체제 밖 마인드’가 너무 강하다고나 할까? 뒷골목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조선문화의 중심부까지를 함께 읽어내야 하는데, 뒤에서 조롱하고 삿대질하려는 태도가 좀….”
“그럼 강명관은 마지널 맨이라는 뜻입니까?”
“나는 그걸 개인의 스타일이기보다는 시대의 증후군이라고 보는 쪽이지. 1960~70년대 이후 시작됐던 이른바 민중주의의 폐해야. 그런 태도로는 뒷골목과 광장을 함께, 그리고 역동적으로 읽어내기가 좀 어렵지.”
6월 마지막 주말 목포, 장흥, 장성, 해남 등 전라도 일대를 쏴 다녔다. 1박2일 일정인데, 첫날 저녁 동양철학자 조용헌이 합류했다. 그날 저녁 나는 운 좋게도 민어회를 난생 처음으로 먹었다. 여름철 보양식으로 사람들이 개장국을 먹었다면, 임금이 따로 드셨다는 게 민어다.
조용헌은 “요즘 제철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다면, 그게 양반”이라고 한마디 했다. 앞의 대화는 잠시 양반 행세했던 우리 둘이 그날 저녁 목포시내 여관방에서 나눴던 객담이다. 조용헌은 말이 고픈 듯했다. 전남 장성 집필실에서 혼자 사니, 서울촌놈인 나를 만난 기회에 인문학 구라를 펼치려고 작심했다.
모자란 내가 단정(斷定)을 서슴지 않은 건 그의 기대치를 알기 때문인데, 그와 나에게 구라란 口羅 즉 입에서 나오는 비단인데, 화제가 강명관의 ‘조선 풍속사’ 1,2,3권(푸른역사 펴냄)에 오래 집중됐다. 어쨌거나 ‘조선 풍속사’ 1,2,3권은 우리시대 콘텐트를 가진, 몇 안되는 학자가 내놓은 ‘물건’이다. 지난 10여 년 그는 ‘조선의 뒷골목 풍경’(2003년)은 물론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2007년)로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하지만 그는 뒷골목 전문가가 아니다. 조선의 서적문화를 다룬(그러나 비판적으로 다뤘다)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를 보라. 그건 조선시대의 공식문화인 ‘광장’을 다룬 대중적 읽을거리가 분명하다. 하지만 재미로 치면 조선의 뒷골목 이야기가 한 수 위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덕분에 우리는 사대부 나라 삶의 현장과 사람냄새를 즐겁게 확인할 수 있었다.
술과 풍악으로 일생을 보낸 오렌지족의 원조가 조선에 있었고, 과거시험장을 누비고 다니던 족집게 대리시험 전문가도 안다. 이뿐인가? 반(反)양반을 기치로 한 폭력조직도 조금은 가늠하는데, 3부작 ‘조선 풍속사’는 그 연장선이다. 즉 9년 전에 썼던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다’를 제3권으로 하고, 새로 쓴 두 권을 앞에 보탠 것이다.
구성은 제1권 ‘조선사람들 단원의 그림이 되다’ 제2권 ‘조선사람들 풍속으로 남다’,그리고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다’는 개정판이다. 그의 문제의식은 ‘조선의 뒷골목 풍경’에서 잘 드러났다. 강명관 식 민중지향은 “양반·남성의 목소리에 가려있던 상놈과 노비와 여성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일이다.
국내의 민중주의자에게 민중과 민족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데, 그는 민족을 배제한다. 그에게 민족이란 다양함과 개성을 억압하는 거대담론에 불과하니까.
“한국사를 민족이라는 코드로 읽고 그에 맞춰 얼개를 짠다면, 민족이란 코드에 걸려들지 않는 무한한 다른 것들은 어떻게 되겠는가?…실제 우리역사를 만들어간 대다수의 상놈 개똥이, 종놈 소똥이, 여성 말똥이들은 과연 나날을 살면서 한국민족임을 의식하고 살았을까?…존재했던 다양성과 구체성을 지워버리고 오로지 단일한 중심만을 내세워 대상을 왜곡시키는 권력이야말로 중심적 담론의 독재가 아닐까?”(‘조선의 뒷골목 풍경’15쪽)
즉 그는 요즘 역사학의 유행 코드인 생활사·사회사에 크게 끌린다. 이번 ‘조선 풍속사’ 3권의 컨셉트는 혜원 신윤복과 단원 김홍도 등이 남긴 꽤 많은 양의 풍속화를 글의 소재로 했다. 기존 연구가 풍속화의 미학과 미술사적 해석에 그쳐온 걸 염두에 두자면, ‘스토리의 보물단지’를 꿰차는데 성공한 셈이다.
그림 별로 글이 구성돼 있어 호흡이 길지 않은 게 좀 아쉽지만, 들밥·타작·나무하기·윷놀이·어살(전통 고기잡이)·빨래터·길쌈 등에서 담배 써는 가게, 서당, 활쏘기, 신행길까지 옛사람들 삶이 이야기는 어제 일처럼 다가온다.
“그림은 미학적, 미술사적 관점에서 해독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풍속화는 이미 사라진 사회와 인간의 삶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달리 볼 소지가 적지 않다.”(‘조선풍속사’2 책머리) “단원의 풍속화가 무엇을, 어떤 풍속을, 어떤 사회를 그렸는지 아는 것은 조선시대를 시각적으로 아는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조선풍속사’1 211쪽)
좋은 문제제기다. 역시 풍속의 주종목은 먹고 마시기 그리고 남녀상열지사가 아닐까? 기생집·술집, ‘조선의 포르노그래피(春畵)’, 그리고 성생활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조선 풍속사’는 한문학자 저술이라는 한계를 피할 수는 없다. 풍속사의 핵심인 관혼상례 그리고 종교·샤머니즘에 대한 언급이 우선 드물다. 관혼(冠婚)은 조금 내비친다해도 상례(喪禮)는 아예 펑크가 났다.
역시 그가 사회사·생활사에 정통한 이가 못 된다는 증거다. 항변할 수는 있다. 그걸 소재로 한 그림 자체가 드물거나 없기 때문이다.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3부작에 ‘조선풍속의 이모저모’에 그친 건 못내 아쉬운 대목이다.
[필자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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