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악마에게도 입힌 원초적 패션혼

악마에게도 입힌 원초적 패션혼

1913년, 이탈리아 왕족 가방을 제작하던 마리오 프라다. 그가 밀라노의 갤러리아 비토리오 에마뉘엘에 낸 첫 매장은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의 귀족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1919년에는 이탈리아 왕실에 가방을 납품하는 브랜드로 공식 지정되며 왕가로부터 오늘날까지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그 로고를 수여받았다.

마리오 프라다의 외손녀인 미우치아 프라다는 오늘날 프라다라는 이름을 알리고, 전 세계 곳곳에서 문화적 이슈를 만들어내는 주인공이다. 1949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룸바르디아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1970년 밀라노에 위치한 ‘Statale University’에서 정치학을 전공한다.

정치학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미우치아는 매우 급진적인 학생이었고, 페미니스트였다. 하지만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회주의당에 몸담으며 이브 생 로랑이나 꾸레주의 의상을 입고 학생 시위에 참여하는 그녀는 많은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옷에 대한 열정, 그리고 정치적인 신조.

이 두 가지가 서로 조화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던 그녀는 결국 1971년, 외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패밀리 비즈니스에 뛰어든다. 그녀가 처음 시작한 것은 액세서리 디자인이었다.



파격의 시작

▎창업주 마리오 프라다와 블랙 나일론 백팩.

▎창업주 마리오 프라다와 블랙 나일론 백팩.

1978년 미우치아 프라다는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든다.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으니 데생이나 재봉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타고난 패션감각은 신선한 결과물을 낳았다.

그중에서도 나일론으로 만든 검은 백은 충격 그 자체였다. 전통적인 가죽 백을 만드는 방식을 그대로 사용해 나일론 백을 만든 것. 낙하산에나 쓰이던 나일론을 백에 적용한 결과는 놀라웠다.

가죽으로 만든 백보다 훨씬 가벼웠고 견고했다. 이는 곧 활동적인 여자들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다. 럭셔리 브랜드에서 저렴한 나일론 소재를 사용하고자 한 발상의 전환은 패션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 됐다.

미우치아는 이처럼 파격을 즐겼다. 밀리터리 룩을 여성복에 도입해 모델들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무대 위에 서게 했으며, 아주 오래된 빈티지 드레스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자신의 컬렉션에 도입하기도 했다. 이런 파격이 처음부터 지지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1988년 그녀의 첫 패션쇼를 보고 W 매거진은 ‘잭슨이 프린스턴을 만난 것 같다’고 혹평했다.

나일론 백 역시 첫 프레젠테이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미우치아의 기억에 의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그 백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았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본인의 선택으로 인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일궈온 프라다는 럭셔리 브랜드로서는 상당히 독특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부를 과시하고 사치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먼 것. 특별히 아주 섹시한 몇몇 소수의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들지도 않는다. 스스로의 삶을 즐기는 보통 여자들, 바쁘게 사는 현대의 직장 여성들, 프라다의 뮤즈는 바로 그들이다. 미우치아 프라다가 젊은 시절 가졌던 이념, 그리고 패션에 대한 열정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미우치아 프라다의 남편이자 현 프라다의 CEO인 파트리지오 베르텔리. 그는 1946년 이탈리아 중부 아레초 지방의 법조계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University of Bologna’에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했고, 1967년에는 아레초에 작은 공장을 설립했다. 벨트와 백을 생산하는 사업을 시작한 것.

그가 미우치아와 만난 1977년, 프라다라는 이름으로 액세서리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독점 계약을 따냈다. 둘이 결혼하고 10년 후, 프라다는 디자인과 그 외 생산, 유통을 나눠 담당하는 완벽한 부부 경영 체제 회사가 됐다. 디자인과 생산이 철저한 감독 아래 일관되게 이뤄져 퀄리티가 좋아졌다.

사업은 더욱 비약적인 발전을 거뒀다. 1993년 ‘CFDA International Awards for Accessories’를 시작으로 1995년, 1998년 ‘VH1 Music and Fashion Awards’, 미국판 <보그> 가 선정한 ‘패션업계의 가장 탁월한 7인’ 중 하나 등 프라다라는 이름에 수여된 상은 셀 수 없이 많다. 그중 가장 독특한 상은 2006년 <타임> 지가 선정한 ‘전 세계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의 커플’이다.
▎감각적인 프라다 광고.

▎감각적인 프라다 광고.



브랜드 라인 확장프라다는 하루에 2500켤레의 신발을 만들어낸다. 직원 7000명에 세계 전역에 300개가 넘는 매장을 갖췄다. 하지만 정작 디자이너 본인은 처음부터 큰 기업을 만들려는 계획은 없었다고 말한다. 백을 만드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한 프라다는 1983년, 슈즈 컬렉션을 론칭하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갔다.

첫 번째 매장을 오픈하고 70년이 흐른 1983년에야 밀라노 비아 델라 스피가에 두 번째 매장을 오픈했다. 여성 기성복을 론칭한 것은 미우치아가 사업을 물려받고 10년 뒤인 1988년. 이어 1993년에는 세컨드 브랜드인 미우미우와 프라다 남성 컬렉션을, 1997년 초에는 프라다 스포츠를 론칭했다.

라인을 확장한 뒤에는 대담한 인수합병을 시도했다. 1999년에는 헬무트 랭, 질 샌더, 처치스 그룹을 인수했다. 2000년에는 인수 및 합병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해 아제딘 알라이아, 카슈와 제니 그룹의 지분 일부를 인수해 그룹에 흡수했다.

2003년에는 피그 뷰티 앤 패션 그룹과 조인트 벤처를 설립해 프라다 향수와 스킨케어 제품 개발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같은 해 룩소티카와 함께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해 아이웨어를 론칭한다. 2005년에는 프라다 SPA를 설립했다. 인수합병으로 인해 오래된 브랜드들이 LVMH로 흡수되고 구찌 그룹이 규모를 키워나갈 때, 프라다 역시 이들 ‘위너 그룹’에 속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브랜드에만 집중했다. 2006년에는 질 샌더를 런던 체인지 캐피털파트너스에 매각했고, 헬무트 랭 역시 티오리홀딩스에 매각했다. 2007년에는 아제딘 알라이야를 창업 디자이너인 아제딘 알라이아에게 매각해 되돌려줬다.



독특한 세일즈

▎미우치아 프라다와 남편이자 CEO인 파트리지오 베르텔리.

▎미우치아 프라다와 남편이자 CEO인 파트리지오 베르텔리.

프라다의 개성은 매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뉴욕 소호, 베벌리힐스, 도쿄 아오야마에 위치한 프라다 매장은 일명 ‘에피센터’라 불린다. 패션 매장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갤러리를 연상케 하는 건축물로 이미 현지에서는 유명한 관광코스가 됐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쇼핑의 공간과 개념을 보다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차원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로 설계된 것이었다. 혹 프라다 매장에서 어딘가 썰렁한 기운을 느꼈다면 그건 일종의 세일즈 컨셉트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때로는 예술가들이 프라다를 소재로 사용하기도 한다. 미국 텍사스 사막 위에 세워진 ‘프라다 마파’가 그것. 프라다 숍 형태로 만든 설치미술품으로 이 안에는 실제 프라다의 신상품이 진열되고 외형도 프라다 숍 그대로인데 문제는 이것이 인적 드문 사막 위에 있다. ‘낯설게 보기’ 기법을 통해 예술가들이 알아서 프라다를 재조명해 주니, 이보다 더 좋은 마케팅이 없을 것이다.



패션, 예술이 되다프라다는 정치학도였지만 피콜로 테아트로에서 6년간 마임을 공부하기도 했다.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며 마임이스트가 되는 훈련을 받았던 것. 이런 특이한 이력은 이후 프라다라는 브랜드와 예술의 끈끈한 관계로 이어진다. 프라다가 예술과 첫 공식적인 밀회를 펼친 것은 1993년 밀라노에서 연 현대예술전시회 ‘밀라노 아르테프로젝트’에서였다.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아티스트의 활동을 격려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버려진 옛 공장 건물을 전시장으로 개조한 아이디어부터 새로웠다. 밀라노 아르테프로젝트는 2년간의 정비 기간을 거쳐 현대예술을 후원하는 재단 ‘폰다지오네 프라다’로 발전했다. 여기서는 매년 2회, 현대예술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그들을 후원하며 출판물과 카탈로그, 비디오 리코딩 등 관련 자료를 제작하기도 한다.

특이한 점은 이렇게 막대한 비용을 써놓고도 이후 이 작품을 프라다 홍보를 위한 그 어떤 용도로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 미우치아는 ‘우리가 브랜드를 홍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예술 발전을 위해 프로젝트를 전개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고 말한다.

2000년 미우치아는 런던 ‘Royal College of Art’에서 독특한 소재의 사용과 근원적인 아름다움의 표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뉴욕의 ‘New Museum of Contemporary Art’에서도 수상했다.

2004년 도쿄를 시작으로 2005년 상하이, 2006년 뉴욕 매장에서 진행된 프라다의 월드투어전시 ‘Waist Down’은 그동안 쌓아온 프라다의 예술적인 행보의 정점을 찍은 것이었다. 1988년부터 2006년까지 프라다의 스커트를 모아 전시한 것. 흔히 아트웨어는 현실과 동떨어져 ‘웨어러블한 것’과 구분되곤 하는데, 프라다의 스커트 전시는 실제 생활에서 여자들이 입는 스커트를 작품으로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스커트를 디스플레이한 방법도 창의적이었다.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와 AMO(1990년대 후반 건축가 램 쿨하스가 설립한 연구소)의 공동 연출은 패션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좋은 예가 되었다.

스커트가 회전하면서 풍성한 볼륨을 보여주는 ‘Spining’를 비롯해 안에서 비치는 조명에 의해 스커트가 전등갓처럼 보이는 ‘Glowing’, 스커트를 액자 속에 그림처럼 박제한 ‘Vacuum’, 빛의 강한 투영으로 생기는 스커트의 그림자가 다른 쪽 벽면에 또 하나의 스커트를 만들어낸 ‘Projaection’ 등 사람의 몸을 떠난 스커트를 보여주는 방식도 가지가지였다.

프라다는 제품 디자인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피렌체 근처 투스카니의 12개 공장과 영국의 1개의 공장에서 이뤄진다. 이곳에서 재료의 선택, 프로토타입의 제작·기획을 거쳐 제품이 만들어진다. 완성품은 최종 품질검사가 이루어지는 2개의 웨어하우스로 옮겨지는데, 그중 하나가 이탈리아 토스카니 지방의 카스틸리온 피보치에 있는 웨어하우스다.

이곳에서는 가죽 제품과 신발 등 액세서리의 물류를 담당한다. 한편 의류는 토스카니의 아레초 부근의 웨어하우스에 집결된 이후부터 유통이 시작된다. 그 다음 과정도 거의 007작전을 방불케 한다. 배송지로 최종 도착하는 것까지 체크하는 상품 추적 부서가 따로 있을 정도다.

사회·문화 현상에 대해 그 누구보다 냉철하고 정확한 안목을 가진 여자, 미우치아. 원칙주의자면서도 디자이너인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는 지적인 것과 패션이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에는 지적이면서도 패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트럼프, 우크라-러시아 특사에 軍 출신 켈로그 지명

2머스크 "오바마 시절 설립 미 소비자금융보호국 폐지해야"

3뉴욕 유가, 美 휘발유 증가에 혼조세…WTI, 0.07%↓

428일 서울 지하철 9호선 일부구간 '경고 파업' 철회

5‘하늘길도 꽁꽁’ 대설에 항공기 150편 결항

6‘이재명 아파트’도 재건축된다…1기 선도지구 발표

7코스피로 이사준비…에코프로비엠, 이전상장 예비심사 신청

8‘3000억원대 횡령’ 경남은행 중징계….“기존 고객 피해 없어”

9수능 2개 틀려도 서울대 의대 어려워…만점자 10명 안팎 예상

실시간 뉴스

1트럼프, 우크라-러시아 특사에 軍 출신 켈로그 지명

2머스크 "오바마 시절 설립 미 소비자금융보호국 폐지해야"

3뉴욕 유가, 美 휘발유 증가에 혼조세…WTI, 0.07%↓

428일 서울 지하철 9호선 일부구간 '경고 파업' 철회

5‘하늘길도 꽁꽁’ 대설에 항공기 150편 결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