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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간다는 꿈

집으로 돌아간다는 꿈

올여름은 견디기 힘들었다. 불볕더위에 때때로 소나기까지 겹쳐 모두가 진이 빠지고 짜증이 심해졌다. 이런 무더위 속에서는 그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곤 하지만 겨울이 오면 살을 에고 뼛 속을 파고드는 추위에 다시 익숙해져야 한다.

하지만 노숙자에게 극단적인 추위와 더위는 단순히 짜증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들에겐 딴 세상의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노숙자는 그런 날씨에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보호센터 등 갈 곳 없는 사람을 돌봐 주는 시설이 있지만 요즘 거리를 전전하는 노숙자를 모두 수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노숙자를 돕는 사회적 기업도 있다. 노숙자들이 거리에서 판매하는 잡지‘빅이슈 코리아’다. 그들은 잡지 판매수익으로 충분히 생활비를 충당한다. 현재 2호가 발행됐으며 20명의 판매원이 서울의 길거리를 누빈다. 앞으로 판매원 수를 더 많이 늘리겠다는 포부다.



노숙자 판매원 김씨김영철씨도 판매원 중 한 명이다. 그는 매일 빅이슈 유니폼 자켓을 입고 고속터미널역 앞에 서서 행인들에게 말을 걸며 잡지를 권유한다. 그는 영등포에 있는 빅이슈 사무실에서 권당 1400원에 잡지를 구입해 3000원에 팔아서 이익을 남긴다.하루 35부 안팎이 팔리는데 판매부수가 증가하는 추세다. 이는 먹고살 만큼 벌이가 된다는 뜻이다. 지금은 돈을 저축해서 보호소와 거리를 오가는 생활을 청산하고 셋방을 얻어 살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다. 그는 빅이슈를 발판 삼아 언젠가는 번듯한 일자리를 구하고 살 집을 장만하겠다는 목표까지 세웠다.

김씨도 한때는 건설업에 종사하며 아내와 자식이 있었다. 10년 전 일자리를 잃은 뒤 그런 처지에 놓인 많은 사람처럼 돈벌이를 찾아 떠돌이 생활을 하며 수입이 생길 때마다 집으로 돈을 부쳤다. 지금도 가끔씩 가족과 연락하지만 10년 동안 거리에서 생활하다 보니 가족과의 행복한 생활은 먼 옛날의 추억처럼 여겨진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의 행운을 빌며 친절하게 대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너그럽지는 않다. 고속터미널과 가까운 한 건물의 주인은 그를 쫓아내 달라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들려는 사람이 있다는 건 불행한 일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서울시는 빅이슈의 후원자다.

서울시는 그의 일에 정당성을 부여할 뿐 아니라 그 단체의 직원들에게 법정최저임금을 지급한다.



구매자와 판매자, 정반대의 집단그는 잡지를 읽을 시간이 별로 없지만(하루 종일 거리에서 잡지를 판매한다) 기사를 재미있게 본다. 하지만 50대 남성인 그는 빅이슈의 표적 독자층이 아니다. 조사 결과를 보면 20대의 교육받은 여성이 잡지를 구입할 가능성이 가장 컸으며 따라서 기사도 유행과 교양을 추구하는 젊은이 취향이다. 예컨대 한 최신 기사는 ‘빈티지 매장’의 패션 바겐세일 정보를 다뤘으며 빅이슈 코리아의 진무두 국장에 따르면 이런 컨텐트 덕분에 홍대역이나 서울대역 등 대학생이 많이 몰리는 지역 주변에서 잡지가 상당히 잘 팔린다.

7월 창간호는 4200부가 팔렸지만 8월초는 불과 보름 정도 지난 시점에서 3500부가 판매됐다. 분명 잡지가 상승궤도에 올라섰지만 50명의 판매원을 고용해 한 달에 2만 부를 판매한다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아직도 할 일이 많다. 한국판은 글로벌 빅이슈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다른 외국어판과콘텐트를 공유하지만 다음 단계로 올라서려면 독자적으로 양질의 콘텐트를 개발해야 한다. 빅이슈 영국 본판은 폴 매카트니경, 데이비드 베컴, 조지 마이클 같은 정상급 스타들을 수시로 인터뷰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 잡지에 시간을 내주겠다는 스타가 아직 나오지 않는다.



굽히지 않는 도전정신빅이슈 코리아의 사무실은 영등포 청과시장 한복판에 있다. 서울에서 가난하기로 손꼽히는 지역에서 허름한 식료품점이 빽빽이 들어선 곳이다. 진 국장에 따르면 잡지는 근근이 버텨나가는 수준이다(하지만 간신히 수지는 맞춘다). 그는 또 사회학자, 자선단체 운영자 등 한국의 노숙자 문제 ‘전문가’ 중 다수가 그들 사업의 실패를 점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신념에는 흔들림이 없다. “우리가 실패하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흥미롭게도 외부의 회의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빅판(빅이슈 판매자)’들은 이른바 그런 전문가보다 더 앞날을 낙관한다.”

잡지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속단하기 이르지만 적어도 김영철씨는 거기서 얻는 수익으로 살아 간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덕분에 희망이 생겼으며” 10년 동안 거리에서 생활한 사람에게 그것은 분명 축하할 만한 일이다.

창간 파티(필자도 참석했다) 때도 빅이슈 코리아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모두 앞날을 낙관하는 분위기였다. 방송기자들뿐 아니라 방문객과 축하객도 상당히 많이 몰렸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전 세계의 다른 많은 나라에서 이 모델이 주효했으며 20년 동안 성공적으로 노숙자들을 후원해 왔다는 점이다.



국제적인 네트워크빅이슈 코리아는 세계 각지에 있는 빅이슈 잡지 패밀리의 일원이다. 이 잡지는 1991년 잉글랜드에서 처음 탄생했다. 윤리적 화장품 업체 바디 숍 창업자 애니타 로딕의 남편 고든 로딕이 창간한 이잡지는 보잘것없는 길거리 신문에서 잡지계의 성공 신화로 우뚝 솟았다. 가끔은 ‘상업주의’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잡지가 돈을 많이 벌수록 더 많은 노숙자가 혜택을 본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비판 받을 일도 아닌 듯했다. 처음에는 런던 거리에서 50명의 판매원이 한달에 3만 부를 팔았다. 그리고 불과 2년 만에 빅이슈 UK는 주간지로 전환하면서 판매부수가 8만부에 달했다.

1994년에는 아일랜드로 판로를 넓혔으며 같은해 국제 가두신문 네트워크의 출범에 참여했다. 이 네트워크는 현재 일본·케냐·호주 등 세계 각지의 36개국 107개 도시에서 잡지 판매를 총괄한다.

영국판은 지금도 한 주에 30만 부가량이 팔려 영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절정의 잡지로 손꼽힌다. 원래 미국의 가두신문 스트리트 뉴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안타깝게도 1989년에 창간된 그 뉴욕 신문은 이렇다 할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독자적으로 자립기반을 구축하지 못하고 주로 개척자 또는 다른 관련지의 모델로 알려졌다. 빅이슈의 편집장이자 공동설립자인 존 버드는 영국 여왕이 하사하는 대형훈장 등 수많은 상을 탔으며 잡지도 유엔 해비태트 특별대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버드도 한때는 거리의 아이였다. 다섯 살에 처음 거리생활을 시작했으며 그 뒤로 청소년기 내내 고아원과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그 자신의 인생 스토리야말로 빅이슈가 창간 이후 약 20년 동안 어떤 업적을 이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진무두 국장은 자신들이 약간 “시대를 앞서간다”고 생각하며 한 달에 2만 부를 팔아 50명의 노숙자를 고용하면 다행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 사회적 기업의 성장세를 볼 때 언젠가 빅이슈 코리아가 한국에서도 비슷한 영향력을 갖게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젊은층 특히 여대생들의 경우 윤리적 소비에 관심이 많다. 그들은 자발적인 빅이슈 고객이며 홍대와 서울대 지역에서 잘 팔린다면 예컨대 고대 또는 나아가 부산이나 광주 같은 다른 대도시의 대학 인근에서 잘 나가지 않을 까닭이 없다.

김영철씨를 비롯한 20명의 판매원들은 빅이슈코리아에서 희망을 본다. 김씨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일거리가 생겼으며 거리 생활을 정리해도 좋을 만큼 돈을 번다. 중요한 사실은 빅이슈가 단순한 노숙자 돕기 캠페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빅이슈 영국판은 정말로 독자로부터 호응을 얻는 인기 잡지이며 실제로 내용이 좋기 때문에 사람들이 잡지를 읽는다. 영국의 일류스타들이 그랬듯이 한국의 유명인사들도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해 더 많은 사람에게 잡지를 구입할 명분을 제공하고 더 많은 사람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도록 도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번역·차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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