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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망치는 네 가지 독은 위사방사(僞私放奢)”

“나라 망치는 네 가지 독은 위사방사(僞私放奢)”

김태호 총리 후보자와 신재민·이재훈 장관 후보자의 낙마, 딸 특혜 취업 의혹으로 유명환 외교부 장관 사퇴. 여기에 민주당 강성종 의원의 체포 동의안 가결, 한나라당 강용석 의원의 제명까지…. 한국이 중병(重病)을 앓고 있다. 나쁜 세균은 사회 고위층이 전파한다. 그들의 도덕적 불감증은 위험수위를 넘은 지 오래다. ‘위장전입, 막말, 탈세는 기본’이라는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고위층에 대한 민심은 차갑다. 한 설문조사에선 응답자 10명 중 8명이 ‘사회 지도층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경제는 또 어떤가. 경제지표는 호전되지만 체감경기는 쌀쌀하기 그지없다. 물가는 치솟고 집값은 떨어진다. 청년 실업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좌표를 잃은 대한민국호(號)에 필요한 건 뭘까. 9월 8일 원로 경제학자 조순(82) 전 부총리를 서울 서초동 개인 사무실에서 만나 해답을 물었다. 조 전 부총리는 특유의 낮은 톤으로 때론 냉정하게, 때론 완곡하게 쓴소리를 쏟아냈다. 아울러 애제자인 정운찬 전 국무총리에 대한 아쉬움,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에 대한 기대도 밝혔다.

- 사회 지도층의 모럴 해저드가 또다시 도마에 올랐습니다.

“위장전입 등 부정부패를 절대 용인해선 안 됩니다. 그러면 국가 기강이 완전히 무너집니다. 나쁜 관례가 무엇이고, 그것이 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세심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의 딸 취업 특혜 의혹에 많은 국민이 실망하고 있는데요.

“이를테면 그런 거죠. 그런 사람이 어떻게 공무원 조직을 이끕니까?”

- 고위층의 도덕적 불감증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까요.

“중요한 건 위정자(爲政者)입니다. 위정자의 철학이 제대로 서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조 전 부총리는 연필을 들고 ‘위사방사(僞私放奢)’라는 자구를 직접 쓰며 설명했다. “거짓말(僞), 이기심(私), 방만(放), 사치(奢)는 나라를 망치는 네 가지 독입니다.” 사회 지도층이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다.

조 전 부총리의 좌우명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이다. 학교에서 배운 걸 현장에서 써야 한다는 것이다. 학자의 현실정치 참여에 누구보다 긍정적이다. 스스로도 그렇게 했다. 한국은행 총재·부총리·서울시장·국회의원을 지냈다. 짧지만 정당 대표도 했다. 그를 두고 ‘상아탑을 벗어나 현실에 몸을 던진 학자 중 가장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상아탑과 정치판은 본질부터 다르다. 점잖은 학자가 권모술수가 판치는 현실정치판에서 성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권 후보로 거론됐던 정운찬 전 국무총리도 취임 10개월 만에 사퇴하지 않았는가.



- 학자의 공직 참여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 적응하는 게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정운찬 전 총리도 그랬고요.

“(정 전 총리는) 경험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총장 하다가 곧바로 국무총리가 됐으니…. ‘다른 공직 경험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 세종시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게 결정타였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조 전 부총리는 이 질문에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말을 꺼냈다가 다시 삼키는 일을 반복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듯했다.)

“세종시 문제는 국민투표로 풀어야 했습니다. (정운찬) 총리에게도 그렇게 말했죠. 그런데 정부는 국회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죠. 원안을 통과시킨 국회에 수정안을 또 맡긴다? 형식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국회에서 수용하지 못할 제안이었죠. 전략의 실패였습니다.”

- 정 전 총리가 전략을 잘못 썼다는 말씀인가요?

“총리가 잘못했는지 정부 차원에서 그랬는지 모릅니다. 확실한 건 정 전 총리가 제 뜻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 정 전 총리가 사퇴한 후 만나신 적 있습니까?

“사퇴하기 전날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내일 사퇴할 생각입니다’고 하더군요.”

말리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정 전 총리의) 결심이 이미 선 상태였다”고 답했다. 제자의 실패에 스승은 침묵했다. 제자는 다음날인 7월 29일 실제로 사퇴를 선언했다. 말이 나온 김에 김중수 한은 총재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 역시 조 전 부총리의 애제자다. 김 총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화두를 경제 분야로 옮겼다.

- 김 총재는 지독한 일벌레라고 하던데요.

“학창 시절에도 그랬어요. 지독하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죠. 머리도 좋고 노력파였습니다.”

- 하지만 김 총재의 임명을 두고 한국은행의 독립성이 훼손된 게 아니냐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가장 잘한 인사입니다. 김 총재는 적임자 중 적임자였습니다. 이론에 해박하고 경험이 많아요. 대학 총장(한림대), 경제수석비서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대사까지 지내지 않았습니까. 무엇보다 사고가 건전합니다.”

- 한은은 지난 7월 글로벌 금융위기 후 처음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했습니다. 시기가 적절했다고 보십니까.

“이성태 전 총재가 금리를 인상하고 퇴임하길 바랐어요.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적절한 조치였다고 봅니다.”

- 정부는 당시 시장이 제 기능을 찾는 게 먼저라며 금리 인상을 반대했는데요.

“아닙니다. 인플레이션이 현실화하면 시장이 망가집니다. 더구나 한국은 인플레에 걸리기 쉬운 체질이죠. 돈 쓰기 좋아하고 빚지는 걸 무서워하지 않지 않습니까.”

조 전 부총리는 물가관리를 정부의 첫째 과제라고 했다. 2008년 한 세미나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플레는 세금 중 가장 고약한 세금이다. 내가 왜 세금을 내는지 모르고 내는 게 인플레다.” 물가관리의 중요성을 세금에 비유해 역설한 것이다. 더 좋은 예도 있다. 서울 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1989년, 한국경제는 불황에 직면했다. 모든 예산을 당겨 쓴 탓이었다. 성장은 멈췄고, 수출은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주가 하락에 노사 분규까지 줄줄이 겹쳤다. 당시 경제기획원을 이끌었던 조 전 부총리는 정치권의 인위적 경기부양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다. 물가안정을 위해서였다. “곡식과 잡초가 함께 자라는데 성장이 더디다고 비료를 뿌렸다간 잡초만 무성하게 자란다”는 유명한 말도 이때 남겼다.

- 체감경기가 좋지 않은데 물가마저 치솟습니다. 최근 엥겔계수(총지출에서 식료품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을 계산한 값)가 9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보도도 있었는데요. 집값 하락과 맞물리면서 서민경제가 더 위축될까 우려됩니다.

“집값 하락은 부동산 가격의 정상화 과정으로 봐야 합니다. 정부가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시장의 힘에 의해 집값이 떨어지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국이라고 꼭 부동산 가격이 올라야 한다는 법은 없죠. 지금의 집값 하락은 심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물가죠. 제아무리 서민정책을 내놔 봐야 소용없습니다. 물가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말입니다.”

- 정부가 물가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별 효과가 없어 보입니다. 확장적 재정정책의 후유증이라는 시각도 있는데요.

“부분적으론 그렇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정부로선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사실 배추·과일 값이 상승한 건 정부 탓이 아닙니다. 홍수 등 기후변화 때문이죠.”

- 정부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까요?

“긴축재정이 답이 아닐까 합니다.”





더블딥 '희박', 탈동조화 '가속'- 한국경제는 올 2분기 전년 동기비 7.2%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GNI(국민총소득)는 5.4% 증가하는 데 그쳤죠. 양극화가 심각합니다.

“한국은 대기업 중심 아닙니까. 대기업이 수출을 잘하면 거시지표는 당연히 좋아집니다. 문제는 대기업이 잘된다고 고용이 늘거나 지방경제가 살아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체감경기가 거시지표를 따라갈 수 없죠.”

- 수십 년째 외쳐온 대기업 중심의 경제체질을 이젠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한꺼번에 해결하려 들면 안 됩니다. 한두 가지만이라도 정부가 잘 챙기는 게 중요합니다. 쾌도난마식으로 한국경제의 체질을 바꿀 순 없죠.”

- 하지만 언제까지 ‘중소기업을 살려야 한다’는 구호만 외칠 순 없습니다.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인식을 바꿔야 합니다. 중소기업을 육성하겠다며 돈을 주는 인식 말입니다. 왜 중소기업이 어려운지 그 이유부터 따져야 합니다. 중소기업이 맥을 못 추는 건 인적 자원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수한 인재가 중소기업에 취업하려 하지 않는 게 문제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기술도, 마케팅 능력도 부족한 겁니다. 물론 돈을 주면 당장은 괜찮겠죠. 하지만 장기적 비전은 만들 수 없습니다. 중소기업 스스로 비전을 갖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중소기업에 희망이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필요하죠. 한 단계씩 밟아 나가야 합니다.”

- 중소기업에 대한 인식이 쉽게 변하겠습니까? 청년 실업자는 증가하지만 정작 중소기업은 인력난에 시달립니다.

“잘못된 교육 문화 때문입니다. 일등주의가 경제를 죽입니다. 삼성·LG가 아니라 중소기업에 취업하면 ‘머저리’라고 여기니 누가 중소기업에 가고 싶겠습니까. 적어도 한 세대는 지나야 할 겁니다. 이마저 고치겠다고 적극적으로 노력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입으로만 교육문화를 바꾸자고 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성심성의껏 노력하지 않으면 앞으로 더 불행해질지 모릅니다.”

- 중소기업을 육성하기 위해선 내수도 진작해야 할 텐데요.

“많은 경제 전문가가 서비스 및 지식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관광·보건·의료·물류·교육 분야의 과감한 규제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물론 필요합니다. 여기에 농수산 부문까지 신경 써야 합니다. 이 역시 농어촌에 돈을 퍼주자는 게 아닙니다. ‘농어촌 가도 살 만하다’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자는 겁니다. 농수산 부문이 활성화하면 지방경제가 살아나고 내수가 진작될 겁니다.”

- 글로벌 경제위기 후 세계경제 모습은 어떨까요.

“미국·영국·일본 등 선진국은 저성장 기조를 띨 겁니다. 더블딥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이번 글로벌 경제 위기를 극복하면서 확장적 재정정책이 어떤 효과를 거뒀는지 세계 각국은 경험했습니다. 이 경험이 더블딥 가능성을 차단할 겁니다. 반면 브라질·인도·중국·인도네시아·터키 등 신흥시장은 고속성장이 예상됩니다. 세계경제의 탈동조화가 가속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 선진국이 저성장할 것이라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미국이든 유럽이든 맥이 빠졌어요. 제도가 노후됐고, 생활태도 역시 이전과 달라요. 경제 분야에서 활력을 찾을 만한 요인이 보이지 않죠. 독일처럼 엄격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미국·유럽은 성장동력을 찾기 어려울 겁니다.”

- 우리의 수출전략도 바뀌어야겠군요.

“그렇습니다. 대미·대EU(유럽연합) 수출로는 부족합니다. 신흥시장에 집중해야 합니다. 특히 중국·인도 등 동남아시아를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동아시아 국가와 어떻게 협력관계를 설정하느냐가 한국경제의 미래를 좌우할 겁니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그랬지 않습니까. 치앙마이 이니셔티브가 구체적 실행 단계에 들어가 12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조성한 게 위기 탈출의 견인차 역할을 했죠.”

- 정부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할 듯합니다.

“물론입니다. 정부는 유능해야 합니다. 정부가 엉망인데 시장이 잘된다? 아닙니다. 시장을 활성화하는 건 정부의 몫입니다. 가장 좋은 사례가 소련입니다. 소련 공산당이 망한 뒤 소련 정부는 모든 걸 자유화했습니다. 그 결과 소련이 사기꾼의 손에 들어간 겁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융시장을 감독하지 않았다가 큰코다친 거 아닙니까. 시장과 정부는 쌍두마차입니다. 영국의 사례는 눈에 띕니다. 최근 영국 정부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여왕의 연봉까지 동결하겠다고 했습니다. 강도 높은 긴축을 선언한 거죠. 30대 재무장관 조지 오스본이 주도하는데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오스본 영국 재무장관은 지난 6월 GDP(국내총생산)의 10%에 이르는 재정적자를 2015년까지 1%대로 줄이기 위한 ‘5년 계획 재정 긴축안’을 발표했다. 그는 “2015년까지 공공부문 지출 150억 파운드 감축, 100억 파운드 증세 등을 통해 연간 250억 파운드씩 절감할 것”이라며 “육아수당이 3년간 동결되고 영국 여왕의 연봉도 2년간 현 수준으로 동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경제를 살리기 위한 혁신적 조치다. 조 전 부총리는 이를 정부의 진정한 역할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했다.

- 이명박 정부는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위기 극복은 그런 대로 잘했다고 봐요. 하지만 기본 방향이 모호합니다. 처음엔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하더니 요즘은 친서민이라고 해요.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친서민이라는 단어가 틀렸어요. 그럼 서민이 아닌 사람한텐 불친절하겠다는 얘기인가요? 정부라면 모든 국민을 보듬어야지 부자라고 소외시켜서 되겠습니까.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 국가 원로로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조언하신다면.

“국가의 방향을 잘 잡았으면 합니다. 장기 전략을 제대로 세우라는 겁니다. 국민의 가슴에 와 닿을 만한 인사를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인사를 잘못하면 신뢰가 추락하게 마련이죠.”

조 전 부총리는 몽골 제국의 재상 야율초재(耶律楚材)의 말을 빗대 한마디 더 했다. “칭기즈칸 시대의 최고 재상으로 꼽히는 야율초재는 이렇게 말했어요. ‘한 가지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한 가지 나쁜 일을 안 하는 게 중요하다’고. 일을 벌이지 말고 지금 하는 것에 집중하라는 얘기입니다. 대통령은 업적에 대한 부담감을 버려야 합니다. 조급해서도 안 됩니다. 평가는 후대가 합니다. 중요한 건 성의입니다. 팬티 바람으로 대중 앞에 선다는 기분으로 혼신의 힘을 쏟으라는 겁니다.”

인터뷰가 끝난 후 조 전 부총리는 20분가량 말을 계속했다. ‘통일세를 적립하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대북조치, 강경책만으론 안 된다.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중국의 성장에 주목하라’ ‘동아시아 국가와의 협력이 관건이다’ 등. 사회 고위층에 대한 불만도 거침없이 내뱉었다. 대부분 한국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러면서도 희망은 있다고 했다. ‘한국이 절대 희망 없는, 대안 없는 국가로 치부돼선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배웅하겠다”며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온 노(老)학자의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고민의 흔적이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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