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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남성해방을 위하여

진정한 남성해방을 위하여

이제 남성은 성별의 편견을 떨쳐버리고 가정과 직장에서 역할을 확대 재창조해야 한다

남자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지난 몇 년 동안 각종 미디어는 남성이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남성의 지위가 ‘하락했다’, ‘남자와의 전쟁’이 시작됐다는 둥 온갖 끔찍한 예측을 내놓았다. 급기야 지난여름엔 종합시사지 애틀랜틱의 해너 로신이 ‘남성의 종말’이 목전에 닥쳤다고 선언했다.

여러모로 일리 있는 주장이다. 지난 30년 동안 미국 경제가 근육을 쓰는 육체 노동에서 머리를 쓰는 일로 이동하면서 점점 더 많은 여성이 일터로 진출했다. 노동력에서 남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1945년의 70%에서 현재 50% 아래로 떨어졌다. 미국의 대도시에서는 젊고 독신이며 아이가 없는 여성 근로자(다시 말해 차세대의 주인공이다)의 소득이 동료 남성보다 8% 높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여학생 수는 남성과 같거나 더 많다.

남성이 주도권을 쥐는 분야는 알코올 중독, 자살, 노숙자, 폭력, 범죄다. 거기다가 글로벌 경제위기까지 겹쳐 건설과 제조 등 남성 지배 산업이 초토화되면서 인류학자로서 언론에 기고하는 사람들은 당연스럽게 남성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 남성이 처한 상황을 우려하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의문은 너무도 분명했다. 만약 그런 남성성이 정상적인 궤도를 이탈했다면 다시 본궤도에 올려놓을 방법이 뭘까? 하지만 바람직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부 남성은 별다른 대책 없이 무조건 남성성의 옛 방식과 관습에서 구원을 찾는다. 예를 들어 럿거스대 인류학자 라이오넬 타이거는 “일종의 힘,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서 남성다움”을 되찾고 싶어한다. 하버드대의 정치학 교수 하비 맨스필드는 행동과 공격성을 주창한다. 잡지의 라이프스타일 섹션은 ‘메트로섹슈얼(metrosexual=metropolitan+heterosexual: 패션에 민감하고 외모에 관심이 많은 도시 남성을 가리킨다)’ 대신 ‘레트로섹슈얼(retrosexual: 외모에 관심을 접고 전통적인 남성다움을 지향하는 남성을 일컫는다)’이 장악했다. 그런 잡지에는 사냥복을 입고, 명품 도끼를 구입하고, 블로그에 ‘남성다움의 기술’을 논하는 부유한 도시 남성들 이야기로 가득하다.

남성다움의 복고주의는 다른 미디어도 지배한다. 서점가에선 나이 불문의 남자들을 위한 모험, 도전, 게임, 운동, 역사의 모든 정보를 담은 ‘남성의 위험한 책(The Dangerous Book for Boys)’, 쓸 물건을 직접 만들자는 진심어린 호소를 담은 ‘영혼의 양식, 공작(Shop Class as Soulcraft)’ 같은 책이 인기다. TV에선 ‘더티 잡스(Dirty Jobs)’ ‘액스 멘(Ax Men)’ ‘데들리스트 캐치(Deadliest Catch)’ 같은 프로그램이 지저분하고 힘이 드는 육체 노동을 다시금 낭만적으로 그려낸다. 랩가수의 축 늘어진 청바지, 사냥꾼의 은닉 무기, 교외 주택의 남성전용 공간,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의 돈 드레이퍼(드라마 ‘매드맨’의 주인공으로 ‘TV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남성’으로 선정됐다) 열광 등은 모두 똑같은 대처 방식의 변형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런 충동은 인종과 계급을 초월한다.

그러나 남자들이 옛 남성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영속화할 뿐이다. 우선 그런 발상은 남자들이 과거 격변에 대처했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새 도전에 맞서도록 부추긴다. 여성을 탓하고, 숲에 들어가 은거하며, 남성다움 아래 불안감을 묻어버리는 방식을 말한다. 지금의 경제는 말버러 담배 광고에 나오는 남성다운 이미지를 급속히 탈피해 간다. 따라서 그런 태도는 학교에서 성공하거나 안정된 직장을 얻거나 더 나은 아버지가 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진실은 이렇다. 남성성의 온전한 회복은 외모와 태도를 어떻게 취하느냐가 아니라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좌우된다. 남성과 여성 문제 전문 저술가인 수전 팔루디에 따르면 시추작업, 용접, 보일러 제조에 종사하는 남자들이 과거 수세대에 걸쳐 상하의 일체형 작업복을 입은 것은 남성다움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회에서 자신들이 특별한 쓸모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남성다움을 느꼈다”고 팔루디가 말했다. “남성다움을 하나의 역할로 간주하면 장식품이 될 뿐이다. 가짜 속눈썹이 고유한 ‘여성성’이 아니듯이 그런 요소도 진정한 ‘남성성’이 아니다.”

미국 여성의 이미지는 1950년대 이래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남성을 향한 기대치는 늘 똑같았다. 그 기대치에 부합할 기회가 더 적어지는데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결과 “남성은 스스로 무능하다고 느끼든지 훨씬 창의적이 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고 ‘직장-가정 논쟁의 재고(Reshaping the Work-Family Debate: Why Men and Class Matter)’를 쓴 존 C 윌리엄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필요한 일은 과거와의 재연결이 아닌 과거로부터의 해방이다. 옛 역할의 부활이 아닌 역할의 확대라는 뜻이다. 남성의 종말이 임박하지도, 마초(macho: 우락부락한 남성다움)가 죽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남성다움의 정의가 미스터 T(프로레슬러 출신의 우람한 배우)와 미스터 맘(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아빠) 둘 다를 아우르도록 확대돼야 할 때가 됐다. 다시 말해 ‘새로운 마초(New Macho)’의 시대가 왔다. 늘 남성의 가치를 규정해온 가정과 직장이라는 두 영역에서 남성의 역할을 재창조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미국 사회는 경쟁이 치열하며 보수적이다. 도시에 사는 아버지들, 헤지펀드 운영자들, 자동차 회사의 간부로 일하다가 해고된 남자들이 자녀를 돌보려고 여러 달 양육 휴가를 내거나 간호사 같은 새로운 분야의 일자리에 관심이 없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여성이 주류를 이루는 직종에 발을 들여놓을 엄두를 낼 남성은 아직 드물다. 사실 대다수 남성은 구조가 필요하지도 않다. 적어도 아직까진 그렇다. 남성은 여전히 업계와 공직에서 과도한 비율을 차지하며, 소득이 높고, 영화를 만들어도 대형작을 제작하고, 가사일을 적게 한다.

그러나 ‘성별 전쟁(gender wars)’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남성이 패하면 여성과 아이들도 피해를 본다. 따라서 한때 남성이 독점하던 위치에 여성이 오르고, 경제에서 ‘남성이 지배하던’ 부문이 더욱 줄어들면서 남성다움의 개념을 확대하는 일은 이제 사치가 아니다. 그런 확대된 개념은 새로운 정책과 새로운 태도 둘 다의 산물이다. 어쩌면 그런 개념이 21세기에 미국 남성과 미국이란 국가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일지 모른다.

그런 변화를 시작하기에 자연스러운 장소는 가정이다. 소설가 마이클 셰이본은 2009년 펴낸 에세이 모음집 ‘아마추어를 위한 남성다움(Manhood for Amateurs)’에서 아들과 수퍼마켓에 갔을 때 미국 사회가 여전히 아버지에게 거의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돌이켰다. 그가 계산대에서 기다리는 동안 한 여성이 그에게 “아주 좋은 아빠시네요”라고 말했다. “딱 보면 알아요.” 그녀가 정확히 무엇을 알았는지 셰이본에겐 수수께끼일 뿐이었다. 그러나 여성이 냉동식품 판매대 사이를 아이와 함께 다닌다고 해서 칭찬 받지는 않는다. 셰이본은 “아버지로서 편리한 점은 전통적인 기준이 너무도 낮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현대의 기준도 그리 높지 않다. 젊은 부부들이 자녀 양육과 가사를 분담하는 등 겉보기에 진보는 분명히 있지만 실제론 거의 변하지 않았다. 평균적으로 볼 때 미국의 아내가 하는 집안일은 남편의 약 두 배다. 전체 시간으로 따져 여성은 매주 이틀 꼬박 추가적인 집안일에 매달려야 한다. 남편은 직장이 없어도 아내가 가사의 대부분을 담당한다. 자녀 양육도 마찬가지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여성이 자녀와 보내는 시간이 남성의 네 배다. 한편 미국의 아버지 없는 아이들 수는 1960년 이후 거의 세 배로 늘었다. 스스로 전업주부(主夫)라고 칭하는 남성의 비율은 계속 3% 미만을 맴돈다. 사회학자들은 오래 굳어진 역할은 떨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역할이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가 쌓여 간다. 스웨덴의 현대 가정생활을 보자. 과거에는 아이를 낳으면 부모 두 사람이 유급 출산·육아휴가 390일을 나눠 월 단위든 주 단위든, 일 단위든 시간 단위든 원하는 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여성이 남성보다 휴가를 훨씬 많이 썼다. 그러나 요즘의 새 아버지들은 아기를 아내에게만 맡겨두고 서둘러 직장에 출근하지 않는다. 현명한 공공정책 덕분에 가능해진 변화다.

1995년 스웨덴은 간단하면서도 혁명적인 법을 통과시켰다. 그에 따르면 아버지가 육아휴가를 사용하지 않으면 부부 전체의 휴가 일수가 한 달이 줄어든다. 2002년엔 아버지가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육아휴가 일수가 한 달이 더 추가됐다. 지금은 스웨덴의 아버지 80% 이상이 아기가 태어나면 4개월의 휴가를 낸다. 10년 전엔 그 비율이 4%에 불과했다. 스웨덴 기업의 41%는 아버지의 양육 휴가를 공식 장려한다. 1993년엔 그런 기업이 겨우 2%였다. 간단히 말해 스웨덴의 남성은 일을 적게 하고 아버지 노릇을 더 많이 하도록 요구받는다.

스웨덴의 남성 육아휴가법은 아버지 역할과 근로자 역할의 수정을 통해 남성의 생활관습을 바꿔놓았다. 그로 인해 여성의 생활관습도 달라졌다. 온라인 잡지 슬레이트에서 일하는 네이선 헤게두스(미국인으로 스웨덴에서 그런 제도를 직접 경험했다)는 이렇게 말했다. “내 세대와 그 아래 세대의 스웨덴 아버지들은 자녀 양육에 자신감을 갖도록 교육받았다. 아내가 기대하듯이 자신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거부하면 친구와 가족, 그리고 다른 남자들의 질문 공세에 시달린다. 정책의 변화가 개인적인 변화를 이끌면서 서서히, 하지만 확고하게 사회도 변했다.

그 비슷한 변화가 이미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독일에선 2007년 스웨덴식 법을 제정한 이래 육아휴가를 내는 아버지의 비율이 일곱 배로 치솟았다. 일본에선 최근 들어 아버지에게 육아휴가를 더 많이 제공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와 함께 후생노동성은 ‘이크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크멘(아이를 키우는 남자)’을 선언한 남성의 사례를 공모해 매달 한 사람을 ‘이크멘의 별’로 뽑아 널리 알리는 프로그램이다. 영국과 호주도 유급 육아휴가법을 제정했다(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딸아이 육아휴가로 여러 주를 집에서 보냈다). 지금 부유국 중 아버지에게 유급 육아휴가를 제공하지 않는 나라는 미국뿐이다.

미국도 생각보다 빨리 변할지 모른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원의 62%, 민주당원의 92%, 무소속의 71%가 유급 남성 육아휴가제를 지지한다. 대기업(특히 텍사스 인스트루먼츠, 선 마이크로시스템스, 언스트 앤 영 같은 남성 직원이 많은 기업들)은 적어도 2주의 유급 육아휴가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뉴저지, 워싱턴, 캘리포니아주는 이미 부분적인 유급 휴가제를 시행한다. 다른 20개 이상의 주도 현재 육아 남성 육아휴가법 제정을 검토 중이다.

앞으로 그런 지역이 더 늘어날 전망이다. 내년도 연방예산에 주정부의 유급 육아휴가 프로그램을 지원할 목적으로 1000만 달러 기금이 할당됐기 때문이다. 근로 인구의 약 절반에게 무급 육아휴가를 제공하는 가족·의료 휴가법도 그와 비슷한 전철을 밟아 1993년 제정됐다. 여론의 변화가 민간 부문의 프로그램으로 발전한 뒤 주정부의 법개정을 촉발했으며, 궁극적으로 연방정부가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촉진제가 됐다. 유급 육아휴가의 가장 유력한 모델은 사회보장제도처럼 피고용자들이 직접 재원을 납부하는 보험 프로그램이다. 정책연구소인 미국진보센터(CAP)의 경제전문가 헤서 부시에 따르면 근로자 1인당 월 10달러만 납부하면 12주의 유급휴가가 가능하다. 급여세의 0.3% 인상 효과만 있을 뿐이다. 가장 관대한 프로그램, 예컨대 미국의 모든 근로 부모에게 1년의 유급 육아휴가를 제공하는 제도도 국가예산에서 250억 달러면 족하다고 직장-가정 균형 문제를 연구하는 제인 월드포겔 컬럼비아대 교수가 설명했다. 연방정부는 매년 사기, 낭비, 남용으로 그 네 배를 지출한다.

물론 남성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정책 변화도 무의미하다. 미국 최초로 부모 두 명에게 합해서 6주간의 유급 육아휴가를 제공하는 캘리포니아주에선 남성의 26%만이 그 기회를 이용한다. 반면 그런 휴가를 사용하는 여성은 73%나 된다. 대다수 아버지가 아이가 태어나면 2주 미만의 휴가를 낼 뿐이다. 육아가 남성다운 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런 개념을 불식하는 유일한 길은 이미 직장과 가정 둘 다에 충실한 이중 삶을 사는 남자들이 ‘자신의 상황을 떳떳이 밝히고’ 의회와 회사에 탄원서를 내는 방법이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지난 35년간 맞벌이 가정의 아버지 중 직장과 가정 생활 사이에서 갈등에 시달린다고 말한 비율이 35%에서 59%로 높아졌다고 존 윌리엄스가 말했다. 제러미 애덤 스미스는 근저 ‘아버지 역할의 이동(The Daddy Shift)’에서 “이제 공격에 나서는 일은 21세기의 아버지들 몫”이라고 말했다.

직장 생활에서도 ‘새로운 마초’ 운동이 중단돼선 안 된다. 영화 ‘미트 페어런츠’가 나온 지 이미 10년이 지났지만 그 영화에서 남성과 직장을 다루는 방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유명한 한 장면에서 순진한 처녀의 전 남자친구인 은행 간부가 그녀의 새 애인(벤 스틸러)에게 직업을 묻는다. 스틸러가 간호사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 은행가는 이해하지 못한다. 신랑감이 간호사라는 생각은 너무도 뜻밖이라 간호가 취미라고 생각한다. “그런 봉사는 참 좋은 일이지요”라고 그가 말한다. “나도 시간을 내서 자원봉사를 하고 싶군요.”

이젠 남자들이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된다. 앞으로 10년 동안 창출될 새로운 일자리 1530만 개 중 대부분이 현재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더 많이 종사하는 분야에서 나올 전망이다. 2008년에서 2018년 사이에 가장 많이 늘어나리라 예상되는 직종 열두 가지 중 두 가지(건설 근로자와 회계사)에서만 남성이 압도적이다. 교사(창출 예상 일자리 50만1000개), 간호사(58만2000개), 가정 보건사(46만1000개), 고객 서비스직(40만 개) 등 나머지는 전부 여성이 지배한다. 경제의 사회 부문에서 2018년까지 모두 합해 690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전망이다. 그러나 노스이스턴대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노동력의 성별 양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중 250만 개가 채워지지 않으리라 예상된다.

그런 빈 일자리는 근로계층의 남성과 그들이 부양하려고 애쓰는 가정에 좋은 기회다. 그러나 문제는 여성과 달리 남성은 여전히 용인되는 좁은 역할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변화하는 고용 환경에 어울리지 않는 태도다. 제조업이 계속 해외로 이전되고, 이민자들이 계속 보수가 적은 육체노동을 떠맡으면서 그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지속되는 경기침체가 그 추세를 악화시켰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직장을 잃었을 때 노동력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남성보다 훨씬 컸다. 그러나 이제는 남성도 그런 대열에 합류한다. 지난 한 달 동안만 볼 때 미국 남성 140만 명이 ‘구직’ 상태에서 ‘구직 포기’ 상태로 바뀌었다. ‘남자다운’ 일거리가 부족해지자 낙담하고 포기했다는 의미다. 신규 고교·대학 졸업자들의 경우는 더 심하다. 그런 남성의 실업률은 20.5%로 같은 연령층의 여성보다 3%포인트 높다.

보호주의 무역과 이민 정책으로 근로계층의 고용률을 올리는 일을 상상하기는 가능하다. 그러나 미국이 세계화를 멈추는 일은 불가능하다. 남성의 사기와 미국 경제를 되살리려면 미국 남성은 해외로 이전된 제조업에서 일자리를 찾지 말고 교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이런 전환을 가속화하려면 전문직업인을 배양하는 학교들이 남성을 대상으로 공격적인 홍보를 하고, 전문 기술과 경력 개선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남성 대 남성 채용운동을 펼쳐야 한다. 전문대학들은 미래의 사회 부문 일자리에 적합한 교육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입학 요건을 강화하는 방안도 있다. 피츠버그대 간호학교는 그런 전략으로 지난 5년 동안 남성 지원자를 34% 늘리는 데 성공했다. 정부의 재정 지원도 필요하다.

시도할 의욕만 있다면 이런 전환은 생각보다 고통이 적을지 모른다. 미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일자리 성장률이 가장 높은 30대 직종 중 약 3분의 2는 직무 연수만을 요구한다. 오랜 시간과 돈을 투자해 학교에 다시 들어가야 하는 과정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남성은 상대 성이 지배하는 분야에 진출할 때 여성보다 고통을 덜 받았다. 또 일단 채용되면 자리를 잡는 데도 어려움이 적었다. 1992년의 연구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남성이 지배하는 직업에 뛰어든 여성은 예측 가능한 차별을 당하지만 여성의 분야에 뛰어든 남성은 ‘승진 가능성을 높이는 구조적 이점’을 누린다. 그런 이점은 자신의 능력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좀 더 남성적인’ 분야로 이동이 가능한 일종의 ‘유리 컨베이어 벨트’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남성은 영어 교사보다는 체육 교사가 된다. 어린이 도서관의 사서보다는 일반 도서관의 사서로 자리 잡는다. 소아과 병동의 간호사보다는 응급실 간호사로 일한다.

회의론자들은 “남성이 특정한 직업에 적합하게 설계됐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남녀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지만 여성은 이미 오래전에 성별 본질주의가 일자리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했다. 물론 지금도 여성은 주로 교사, 간호사, 사회복지사로 활동한다. 하지만 CEO, 군인, 각료도 있다. 이제는 남성의 직업도 그처럼 확대될 시기가 됐다. 일부 통계를 보면 이미 변화가 진행 중이다. 남성 간호사의 비율이 지난 25년 동안 두 배로 늘어 전체의 약 6%에 이른다. 초등학교 교사 중에도 남성이 늘어난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광부와 기계공 일자리는 미래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 수는 대폭 줄어든다. 따라서 이제 남성은 그와는 다른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얼마 전까지 남성다움의 개념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해 왔다. 역사사회학자 마이클 키멜에 따르면 미국에서 1776년 이전에는 완벽한 남성이 상류층의 가부장으로 구세계의 생활방식이 몸에 밴 멋쟁이 지주였다. 19세기 초가 되자 이상적인 남성상이 영웅적인 장인(기능 보유자)과 서부를 개척할 만한 강건한 개인주의자(농부, 신발 제조가, 목수 등)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통나무 오두막집 모델이 좀 더 현대적인 이상형으로 대체됐다. 자수성가한 남자, 활동적이고 경쟁력을 갖춘 가장을 말한다. 그들의 남성다움은 산업화되고 물질화된 사회에서는 성공을 좌우했다.

이제 미국의 남성은 새로운 교차로에 도달했다. 다만 지금은 달라진 시대적 요구에 남성다움의 지배적인 규칙이 적응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남성이 ‘여성과 똑같은’ 무성(無性)의 사회를 주창하려는 게 아니다. 심지어 폴 번연(만화에 등장하는 개척시대의 거인 나무꾼), 타잔, 조종사용 가죽 재킷 등 몸치장으로 상징되는 남성다움이나 남성들이 삶의 실제 알맹이가 가볍다고 느낄 때 빠져드는 현실도피주의를 비난할 의도도 없다. 오늘날의 남성이 사냥꾼, 메트로섹슈얼, 또는 사냥꾼의 복장을 한 메트로섹슈얼이 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그 이상도 돼야 한다. 겉보기에 ‘새로운 마초’는 역설이다. 여자들이 주로 하는 일과 더럽혀진 아기 기저귀로 포장된 남성의 길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깊게 들어가면 남성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남성이 양육휴가제를 수용하면 여성은 ‘마미 트랙(mommy track: 육아 등을 위해 출퇴근 시간을 조절할 수 있지만 보수와 승진의 기회는 적은 허드렛일과 한직)’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게 된다. 남성이 자녀 양육에 참여하면 더 많은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범죄를 멀리하며, 성인이 됐을 때 가난을 면할 수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직장에서 성별 동등(완전 고용된 남녀의 적정한 균형)을 성취한다면 국내총생산(GDP)이 9%나 증가한다.

‘새로운 마초’는 간단한 원칙으로 요약된다. 세계가 급변하는 지금 남성은 가정과 직장에서 공정한 몫을 떠맡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해야 한다. 학교와 정책입안자, 고용주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들을 도와야 한다. 사실 어느 쪽이 더 남성다운가? 강인하고 입이 무거우며 직장이 없으면서도 늘 집을 비우는 아버지일까, 아니면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과 자녀를 양육하는 아버지의 역할을 똑같이 잘하는 남자일까?

번역·이원기



THE AMERICAN MAN

이상적인 남성 이미지의 변천사


미국에선 대중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성은 언제나 거칠고, 백인이며, 동성애자가 아니고,

전형적으로 과묵한 사람이다.
1776 이전

상류층 가부장, 조지 워싱턴은 자기 시대의 이상적인 남성이었다. 명예, 인격, 구세계 생활방식을 소중히 생각한 귀족 지주를 말한다.

1776~1830

영웅적 장인. 새로운 미국의 남성들은 유럽의 멋쟁이들을 싫어했다. 그들은 포장마차를 서부로 이끌 수 있는 강인한 개인주의자가 되고자 했다.

1830~90

자수성가형 인물. 새롭게 탄생한 거부들은 유산을 물려받지도 않았고, 운 좋은 장인도 아니었다. 그들은 상인과 기업가였다.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얼마나 성공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지위가 결정됐다.

1890~1910

블루 칼라 영웅. 대량 생산 제조업이 부상하면서 자수성가적인 남성이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그들은 집단으로 국가를 건설한 영광을 누렸다.

1910년대

가정적인 남성. 최초의 아버지다움 운동은 고된 공장 바닥의 불만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남자들은 아들에게 남성다움을 가르치려 했다.

1920~45

근육질형 남자. 여성들이 일터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남자들은 타잔을 영웅으로 삼고 몸단련에 집착했다.

1945~60

기업가. 전후(戰後) 자본주의는 무자비한 돈벌기 경쟁으로 개인의 영혼을 완전히 파괴했다. 하지만 돈만 잘 벌면 도덕성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60~80

플레이보이. 자수성가형 남자들과 비슷하지만 근사한 재킷과 고급 덴마크풍 현대 가구를 즐겼다.

1980년대

무자비한 자본가. 월스트리트가 새로운 기업 정글이 됐다. 고든 게코(영화 ‘월스트리트’의 주인공)가 기업사냥꾼들을 이끌었다.

1990년대

뉴에이지 남성. 소외감을 가진 남성들이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숲속에서 주말을 지내며 자연보호 운동을 벌이거나 그루터기를 표적으로 사격을 했다.

현대

새로운 마초. 평범하고 소심한 남자보다는 자녀 양육을 분담하면서도 생계도 전적으로 책임지는 브래트 피트가 상징적이라고 할 만하다.

based on manhood in america by michael kimm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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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유소 기름값 또 하락...내림세 당분간 이어질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