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음악가들 그들의 울림이 우리를 울린다
바보 음악가들 그들의 울림이 우리를 울린다
화려한 무대도, 스포트라이트도 없다. 전국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어려운 이웃에게 노래를 선사하는 이탈리아 유학파 성악가들이 있다. 이들의 스케줄은 늘 꽉 차 있다. 9월에만 14번 연주회를 가졌다. 기름값만도 만만치 않지만 불평 한마디 없다.
이들은 2004년부터 지금까지 650여 회의 공연을 했다. 8월 셋째 주의 경우 화요일과 수요일은 전남 장흥·나주, 목요일은 경기 파주, 금요일은 제주를 다녀왔다. 비슷한 일정이 거의 매주 반복된다. 극장을 떠난 바보 음악가 ‘우주호와 친구들’(Woo’s music
friends)이 그 주인공이다.
화려한 무대, 돈과 명성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해서 ‘바보 음악가’란 애칭이 붙은 이 팀은 솔리스트 우주호(42)씨를 중심으로 구
성됐다. 멤버 14명 중 13명이 이탈리아에서 공부했다. 성악가로서 명성을 쌓고 싶은 욕심보다 소외된 이웃을 노래로 위로하고 싶
은 진심을 가진 이들이다.
지난 8월 30일 오후 2시.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정신지체장애인 보호시설 박애원. 강당의 박수 소리가 앞마당까지 울렸다. 연미복 차림의 성악가 여덟 명이 무대에 등장하자 강당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들은 할머니·할아버지들의 손을 꼭 잡고 ‘넓은벌 동쪽 끝으로’로 시작되는 가곡 <향수> 를 불렀다. 정신지체장애 청년들을 무대로 불러내 어깨동무를 하고 열창했다. 마지막 곡인 <마법의 성> 을 함께 부를 때 관객은 눈물을 훔쳤다. 성악가들의 울림은 그들의 마음을 적시고 긴 여운을 남기는 듯했다. 공연을 마치고 대기실로 들어서는 모두의 콧등과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음향설비가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7~8곡을 부른다
는 건 전문가들도 쉽지 않은 일이다.
사회를 맡은 테너 박영욱(41)씨는 재치 있는 솜씨를 뽐내며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쉽고 재미있는 곡 해설은 물론이고 할머니·할아버지들을 위한 퀴즈도 냈다. 2006년부터 바보 음악가 대열에 합류했다는 그는 “스킨십으로 사람들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면 어디라도 가서 그분들을 안아 드릴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유학 시절을 회상했다. “유럽에서는 공원·거리를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조그만 연주회가 많이 열려요. 사람들이 음악을 듣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꼭 극장에서만 연주해야 한다는 편견이
사라지더라고요. 한국에서도 이런 연주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11월에 있을 오페라 카르멘 준비와 대학 출강으
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마법의> 향수>
이들의 바보 정신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바보 철학과 맞닿아 있다. 선종 전 따뜻한 사랑의 정신을 묵묵히 보여주었던 그를 따라 이들도 바보 음악가가 되기를 자처했다. 운은 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가 뗐다. 2004년 홍 대표는 유학에서 돌아온 성악가들을 불러놓고 ‘극장에서 노래하기보다 음악을 접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선물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김병종 서울대 미대 교수, 이명헌 서울대 철학과 교수, 배규한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 차광은 포천중문의대 부총장 등이 바보운동에 뜻을 보탰다. 테너를 맡고 있는 구형진(43)씨는 2007년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이듬해 4월 합류했다. “내가 가진 몫으로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했어요. 신이 주신 게 목소리라면 남을 위해 노래해야 할 운명인 거죠.” 그는 현재 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며 성결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앙상블을 위해서는 최소 8명이 필요하다. 테너·바리톤·베이스 각 두 명과 피아노, 이들을 지휘할 단장이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 파트별로 세 명을 둬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빡빡한 스케줄인 만큼 각자의 일정 조율이 어렵지만 공연 펑크를 내는 일은 없다. 바보 음악가들은 앞으로도 전국 구석구석을 찾아 노래를 전할 생각이다. 노래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살려 그들의 끝나지 않은 여정에 동참해 보는 건 어떨까. 우리나라에 더 많은 바보가 나타나는 날이 오길 기다려 본다.
인터뷰 우주호 단장
클래식은 계층 간 다리가 돼야-------------------------------------------
“처음에는 연미복에 구두를 벗고 노래 부른다는 게 수치스러울 정도였어요. 봉사하겠다는 마음은 먹었지만 쉬운 건 아니더군요.” 우주호 단장은 이탈리아에서 유학할 당시 유명 극장에서 내로라하는 마에스트로와 협연했다. 국제 콩쿠르에서 여러 차례 수상하면서 뛰어난 바리톤으로 국내외에 이름을 알렸다. 볼로냐 전 극장장은 “고음이 화려하고 섬세하면서 드라마틱함을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성악가”라고,
이탈리아 일간지 IL TEMPO는“꽉 찬 소리와 정확한 발음을 가진 연주자”라고 평가했다. 그가 화려한 명성을 뒤로하고 전국 연주여행을 떠난 것은 베이스로 활동했던 샬랴핀이라는 러시아 성악가의 영향이 컸다. 그는 오랜 기간 농민, 어민들을 위해 민요나 뱃노래를 불렀다. 그는 “나 역시 목소리로 재능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소외계층을 위한 공연에서는 매 순간 감동 받는다고 했다. “파주 ‘주 보라’라는 복지관에서 연주할 때는 지체장애를 앓고 있는 아이가 바닥에 드러누워 엉엉 우는 소리를 낸 적이 있었어요. 복지관 교사의 말을 들어 보니 이 아이가 처음으로 낸 소리였다는 거예요.” 그는 그때 온몸에 찌릿한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몸을 가눌 수 없지만 우는 소리로나마 감정을 표현한 아이를 보니 나 또한 울지 않을 수 없었어요.” 때로는 기업 마케팅이나 홍보 수단으로 이 일을 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도 받는다. 그는 “물론 농협중앙회와 함께 농어촌 문화공연을 진행하기도 하지만 홍보 목적이 아니라 ‘음악의 브나로드운동’을 활성화하자는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그는 농촌과 저소득층 가정 등 문화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클래식 문화를 접할 기회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클래식 문화가 귀족화됐지만 특정 계층의 소유물은 아니잖아요. 저희는 클래식이 계층 간 다리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배려가 아닐까 해요.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은 모르게 하는 것이 진짜 봉사고 기부죠.” 그의 앞으로 계획은 뭘까. “음악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 사람을 치유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유명 오케스트라를 불러 독창회를 열어준다는 대기업의 요청을 고사했으니 말 다했죠.”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오히려 제가 너무 유명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조수미씨처럼 유명하면 이렇게 전국을 돌며 복지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을 테니 말이에요. 제 영혼을 불태울 수 있어 너무 감사하죠.”
우 단장은 현재 명지대 성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올 11월 스페인에서 열리는 빌바오 성악 국제콩쿠르 초청가수 겸 명예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그는 파주에서 공연을 끝내고 돌아오는 동료들을 두 팔로 껴안았다. “솔리스트들이 자존심을 낮추고 이렇게 공연하긴 쉽지 않아요.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 해도 이런 공연을 할 성악가는 많지 않을 겁니다.” 그의 모든 생각은 오로지 이 어려운 길에 동행하고 있는 동료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뜻을 함께하는 주요 인사
구자홍 동양투자신탁 부회장
김병종 서울대 미대 교수·화가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
나성린 국회의원
박세일 서울대 교수
서인수 ㈜성도ENG 대표이사
오세정 서울대 자연과학대 학장
이원규 ㈜세실 대표이사
이제훈 한국자원봉사포럼 회장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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