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R ‘고스트’의 환생
RR ‘고스트’의 환생
‘노란 롤스로이스(The Yellow Rolls-Royce)’라는 1964년작 영화는 유독 번쩍거리는 한 자동차가 여러 주인의 손을 거치면서 유럽을 전전하는 과정을 그렸다. 무엇보다도 렉스 해링턴, 잉그리드 버그만, 오마 샤리프 등 출연진이 화려하다. 당시 롤스로이스는 금빛 라이프스타일의 필수조건을 상징하는, 자동차 패션의 최고봉이었다. 곧 톰 존스나 잉글버트 험퍼딩크 같은 인기 가수가 자신의 근사한 자가용 롤스로이스를 탄 채 사진을 촬영했다. 자자 가보가 롤스로이스 안에서 베버리힐스 경찰관의 뺨을 때리는 순간은 그녀가 연기한 최고 명장면으로 꼽힌다. 디스코가 유행하던 70년대를 거쳐 경제가 과잉으로 치달았던 80년대 내내 롤스로이스는 스타일 선도자들의 필수품이었다.
그러나 사용자들이 모르는 사이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70년대 롤스로이스의 적자투성이 제트엔진 사업부가 이익을 모두 삼켜버렸다. 1973년 석유파동을 기점으로 분에 넘치는 사치를 누리던 운전자가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롤스로이스는 벼랑 끝에 내몰렸다. 한편 BMW, 메르세데스-벤츠, 그리고 훗날 렉서스 같은 새로운 고급 브랜드가 더 작고 날렵한 모델로 각광받았다. 1980년대 말 롤스로이스는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은 셈이었다.
롤스로이스의 신형 초호화 세단 2010년형 고스트를 타고 캘리포니아주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의 햇살 가득한 도로 위를 달리는 동안 그런 사실이 거의 믿겨지지 않았다. 고스트(유령)라는 이름처럼 환영은 아니지만 이 차가 지옥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건 거의 확실했다. 고스트는 2003년 롤스로이스의 주인이 바뀐 뒤 대표 모델인 팬텀을 성공적으로 재현한 이후 나온 둘째 모델이다. 2003년 독일 자동차 메이커 BMW가 공장과 인력, 차는 놔둔 채 롤스로이스라는 이름만 6330만 달러의 헐값에 인수했다. 이 새 모델의 이름은 100여 년 전인 1907년 데뷔한 롤스의 실버 고스트에서 따왔다.
따라서 고스트를 처음 볼 때 경계하는 눈빛으로 뭔가 빠지지 않았나 유심히 살펴보았다. 당초부터 비싼 가격이 영 못 미더웠다. 가격은 24만5000달러로 모회사의 어떤 모델보다 비싸지만 BMW는 이 차를 롤스로이스의 입문용 모델로 간주한다. 촉각을 곤두세워 곳곳을 만지고 당겨보면서 이상한 소리가 나지 않나 귀를 기울였다. 과거의 롤스로이스 구입자들은 옛 주인 시절 덜컹거리는 소음이 나고 부품이 풀렸다고 불평했다. 아직도 그럴까? 고스트는 아름답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근사하다. 강해 보이고 자신감 넘치고 위엄이 있다. 그러나 배를 곯은 수퍼모델처럼 행동하지는 않을까? 겉보기엔 매력적이지만 속은 텅 비어 있지 않을까?
고급스러운 운전석에 올라 앉으면서 수를 놓은 가죽의 호화스러움에 탄성을 올렸다. 시동 버튼은 아직 눌러보지도 않았다. 마치 루이뷔통의 여행용 더펠 가방이나 단순한 퀼트 장식 디오르 핸드백처럼 차가 어떻게 이처럼 최신식이면서도 고전적인지 감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스트의 냉난방 장치, 오디오, 네비게이션 시스템을 제어하는 센서 바는 손가락으로 건드리기만 하면 작동된다. 아홉 가지 색깔의 부드러운 가죽 중에서 택일하며 원할 경우 상반되는 색깔의 실로 바느질을 해 대비효과를 낸다. 내장용의 나무 베니어도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그 다음 무엇보다도 터무니없이 고급스러운 기능이 눈에 들어왔다. 1만9600달러짜리 맞춤 피크닉용 케이스였다. 마술사의 비밀상자처럼 열리는 이 케이스는 음식을 따뜻하게 또는 차갑게 보관하는 스테인리스 스틸 상자와 특수 디자인된 크리스털 샴페인 잔을 갖췄다. 이 케이스를 열 때는 정말 고급스러운 뭔가를 준비했다는 뜻이다. 평범한 그레이 푸퐁 겨자병으로는 어림도 없다.
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달렸다. 오른쪽으로는 사암색 절벽이, 왼쪽으로는 널따란 태평양이 펼쳐졌다. 파도타기를 즐기는 서퍼 두어 명을 본 듯도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오른발 아래, 손안, 그리고 몸으로 느껴지는 차의 매력에 완전히 넋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 차는 세단이면서도 크고 강하다. 길이가 5.3m로 거대한 메르세데스-벤츠 GL 클래스보다 0.3m 더 길다. 중량은 2495kg으로 메르세데스 SUV보다 20kg가량 적다.
가공할 크기와 무게에도 불구하고 가속페달을 살짝 밟으면 이 괴물은 쏜살같이 달려나간다. 메르세데스의 GL550은 정지상태에서 시속 97km에 이르는 데 6.4초가 걸리지만 고스트는 4.9초 만에 그 속도에 이른다. 2인승인 포르셰 케이먼과 거의 같은 빠르기다. 고스트의 놀라운 이동능력은 힘이 넘치는 6.6L, 12기통, 563마력 엔진 덕분이다. 마치 아놀드슈워제네거가 5파운드(2.3kg) 짜리 바벨을 다루듯 움직임이 경쾌하다. 그러면 연비는 어떨까? 고스트는 시내에서는 L당 5.5km, 고속도로에선 L당 8.5km를 주행하는 반면 GL550의 경우 시내는 L당 5.1km, 고속도로는 7.2km다.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동급 중 가장 적다. “뭐니 뭐니 해도 이건 롤스로이스다. 뭔가 달라야 한다”고 CEO 토르스텐 뮬러-오트보스가 말했다. “이 차는 생각보다 크다. 그리고 운전자는 차의 움직임, 노면 접지성능에 놀란다. 품질은 흠잡을 데 없다.”
캘리포니아 해안을 끼고 돌아가는 1번 고속도로를 고속 질주하면서 고스트의 개발에 얼마나 많은 공과 돈을 들였는지 쉬 짐작이 갔다. 팽팽한 조작성능, 빠른 속도, 정확한 조향성, 그리고 강하고 빠르게 반응하는 브레이크 등 곳곳에 BMW의 지문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BMW는 또한 차의 바탕에도 그들의 DNA를 깔았다. 일례로 고스트의 전기 중추는 모두 BMW이며 파워트레인(동력 전달장치) 부품도 마찬가지다.
BMW 이사이자 롤스로이스 회장인 이언 로버트슨은 고스트의 지금 모습에 만족한다. “이 롤스로이스가 이름만 바꾼 또 다른 BMW에 불과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고 그가 말했다. “롤스는 지금까지 나온 최고의 브랜드 중 하나이며 자신만의 개성과 스타일을 자랑할 만한 자격이 있다.” 로버트슨은 차기 모델 구상을 밝히진 않았지만 컨버터블이나 쿠페 등을 포함한 고스트의 변형 모델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롤스로이스는 우수한 세단, 위엄 있는 리무진, 쿠페, 컨버터블, 심지어 로드스터(2~3인승 오픈카)도 만들었다”고 그가 말했다. “롤스는 폭넓고 다양한 역사를 가진 브랜드이기 때문에 무엇을 내놓겠다고 해도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다.” 한편 롤스로이스의 올해 자동차 생산대수는 고스트의 탄생 덕분에 갑절로 늘어 2000대가 될 전망이다.
한 가지 의문이 있다면 어째서 ‘보이지 않는다’는 뜻의 이름을 택했을까? 그만큼 눈길을 끄는 차라면 고스트보다 보스트(자랑)라고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번역·차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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