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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화경영 남겨두고 하늘 부름 받다

인화경영 남겨두고 하늘 부름 받다

설원봉 대한제당 회장이 10월 20일 오전 폐암으로 별세했다. 62세. 평북 출신인 인송 설경동 대한전선 창업주의 4남으로 맏형은 설원식 전 대한방직 회장, 셋째 형은 고 설원량 대한전선 회장이다. 경기고와 연세대 법학과, 미 브루클린대 경영대학원을 나와 학교법인 연세대 이사,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대한제당협회 회장,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1991년 대한제당 회장에 올랐다. 유족으론 미망인 박선영씨와 설윤호 대한제당 부회장 등 1남1녀가 있다. 설 회장과 40년 우정을 나눈 박상은(한나라당) 국회의원이 고인을 기리는 추모 글을 보냈다. <편집자>
▎ 설원봉 1948년 서울 출생 2010년 10월 20일 별세 연세대 법학과 1976년 대한전선 입사 1985년 대한제당 사장 1991년 대한제당 회장

▎ 설원봉 1948년 서울 출생 2010년 10월 20일 별세 연세대 법학과 1976년 대한전선 입사 1985년 대한제당 사장 1991년 대한제당 회장

얼마 전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을까. 내 친구 설원봉 회장이 기어이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중환자실로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병원으로 갔지만 친구의 호흡은 이미 멈춘 상태였다. 따뜻하게 손 한번 잡아주지 못했는데…. 안타까움과 회한이 동시에 밀려온다.

설 회장과 나는 40년 지기이자 대학 동문이다. 더 큰 인연은 한 회사의 오너와 CEO로 박자를 맞췄다는 것이다. 나는 설 회장이 회장에 오른 지 3년 후인 1994년 대한제당 대표에 취임했다. 2002년까지 대표를 맡았으니 10여 년은 오너와 CEO로 생활한 셈이다.

옆에서 본 설 회장은 말수가 적었다. 나서길 좋아하지 않아 경영도 소리 소문 없이 했다. 하지만 투병 생활까지 조용히 할 줄이야. 설 회장은 1년 전 폐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출장을 미루지 않았다. 해외 인사와의 만남도 늦춘 적 없다. 그만큼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았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싫어했다. “암은 결국 나와 함께 가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지 않은가.

그는 조용했지만 뚝심 있는 오너였다. 한번 결정하면 고집스러울 정도로 밀어붙였다. 일부 사람이 추상적이라며 깎아내렸던 ‘인화(人和)경영’을 줄기차게 펼친 끝에 1956년 창업 이후 계속된 대한제당의 무분규 전통을 잇는 데 성공했다. 어쩌면 그였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설 회장은 인화경영을 위해 직원의 이름을 일일이 외우고 불렀다. 직원에게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서려 애썼다. 대부분의 기업이 허리띠를 졸라맨다며 서슬 퍼런 구조조정의 칼을 뺐던 1998년, 그는 ‘직원을 지키겠다’며 다른 길을 갔다. 당시로선 파격에 가까운 무감원·무감봉·무분규의 ‘3무(無) 경영’을 외환위기 기간 내내 특유의 뚝심으로 실천에 옮겼다. 온화한 성품의 그였기에 가능했고, 절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음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오너의 고뇌를 누가 알아주랴.

그렇다고 그가 뒷방에 앉아 남 몰래 ‘자기 식구’만 챙긴 건 아니다. 그는 조용했지만 은둔하진 않았다. 한국무역협회 및 한일경제협회 부회장으로 한국의 대외통상 활성화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한국학술연구원을 지속적으로 후원해 한국학이 전 세계에 전파되는 데 일조했다. 한국학술연구원은 SSCI(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 등재지로 전 세계 100여 개국에 판매·배포되고 있다. ‘코리아 옵저버’지를 낸다. 이 연구회는 1968년 설 회장의 스승인 연세대 김명회(국제정치학) 교수와 내가 창립했다.

1998~2002년엔 대한핸드볼협회장에 취임해 내부 파벌 싸움을 뿌리 뽑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회사 경영에 전념한다며 2년 만에 회장직에서 물러났지만 그 뒤에도 고문을 자임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그의 기업가 정신이 유명을 달리한 이제야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게 한편으론 아쉽지만 뿌듯하기도 하다.

그는 사회공헌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지금도 다소 생소한 해비타트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후원한 인물이 설 회장이었다. 해비타트운동은 무주택자를 위해 집을 지어주는 사업을 말한다. 1990년 정근모 박사가 주거 복지를 위해 이 운동을 소개했다. 해비타트운동에 설 회장이 초기부터 참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만큼 그는 선행도 남모르게 했다.

설 회장과 나 사이엔 동고동락하면서 겪은 수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그중 대학 모교에 멋진 교사(校舍)를 짓자고 의기투합했던 일이 생각난다. 우리는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2년 연세대 법대 교수 출신으로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하던 함병춘 박사, 역시 연세대 법대 출신인 남재두 당시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 연세대 철학과 교수 출신으로 문교부 장관이었던 이규호 박사 등에게 법학과를 법과대학으로 독립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 법대 건물을 짓겠다고 했다. 당시로선 가당치 않은 제안이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변호사·의사 같은 이른바 ‘사’자의 문턱이 너무 높다며 신규 대학 수를 늘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법대 독립을 요구했으니 관철될 리 있었겠는가.

그런데 말이 씨가 됐다. 법대는 독립했고, 설 회장과 나는 연세 법학 50주년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동문을 상대로 건립기금 43억원을 모았다. 37억원은 광복관 건립에 썼고, 나머지 6억원은 연세법학진흥재단에 기부했다. 제법 패기만만했던 설 회장과 나는 모교의 법학 중흥에 기여했다며 뿌듯해했다. 지금은 국내 굴지의 법과대학으로 성장한 모교 법대 캠퍼스를 보면 설 회장이 떠오를 것 같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설원봉’ 하면 떠오르는 일화가 너무 많다. 하지만 4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한 친구를 몇 개 일화로 설명하긴 여간 어렵지 않다. 아마도 사진 속에 남아 있는 설 회장의 온화한 표정이 많은 이에게 더 많은 설명을 해줄 거라 믿는다.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이 말을 전한다. “이제 고인이 된 친구여! 젊다면 젊은 나이에,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그저 안타깝구나. 마음 깊이 명복을 빈다. 그래도 걱정 마라. 자네의 못다 한 뜻을 내가, 우리가 이룰 테니….”

▎ 박상은 한나라당 국회의원

▎ 박상은 한나라당 국회의원

박상은 한나라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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