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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을 위해 헌신하다

여성의 몸을 위해 헌신하다

이브 생 로랑은 악성 뇌종양과의 싸움 끝에 2008년 6월 1일 파리 자택에서 타계했다. 72세. 나흘 뒤 파리 생로슈 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장 폴 고티에,발렌티노, 존 갈리아노 등 세계적 디자이너와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내외까지 참석해 애도했다. 그야말로 국장 수준이었다. 스모킹 슈트, 몬드리안 룩,사파리 룩…. 그는 갔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가 남기고 간 것 속에서 살고 있다.
▎여성의 몸은 이브 생 로랑에게 영감의 원천이 됐다.

▎여성의 몸은 이브 생 로랑에게 영감의 원천이 됐다.

1936년 8월 1일 알제리에 있는 오랑(Oran) 지역에서 이브 마티유 생 로랑은 태어났다. 오랑은 남아프리카 태양 아래 모든 색조가 패치워크돼 찬란히 빛나는 곳으로, 마을 사람들과 외지인들이 모여 물건을 파느라 늘 북적댔다. 돈을 벌기 좋은 장소였고,그의 집 또한 부유했다. 아버지는 보험사업과 몇몇 영화 제작에도 참여했다. 그는 해변가 빌라에서 친구, 친척과 여름을 보내곤 했다. 집에서는 디너파티가 자주 열렸다. 훗날 이브 생 로랑은 ‘하얀 긴 명주베일 원피스와 진주 모양의 시퀸을 곱게 장식하고 무도회로 가시기 전 내 방에 들러 굿나잇 키스를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회고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디자이너가 된 후에도 늘 패션쇼의 첫째 줄에 앉아 응원하는 열혈 팬이었다. 옷도 이브 생 로랑 이외에는 입지 않았다고 한다.



무대의상에 감동한 소년어린 소년은 디자이너가 될 운명을 알아챘던 것일까? 이브 생 로랑은 9세 생일 때 촛불을 끄면서 이렇게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내 이름이 샹젤리제 거리에 빛나게 해주세요.”

열한 살 때 그는 주베가 감독한 <아내들의 학교(ecole des femmes)> 라는 연극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 본격적으로 디자이너가 되는 꿈을 꿨다. 크리스티앙 베라르가 디자인한 무대와 의상은 환상적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연극에 나왔던 의상을 작은 사이즈로 만들어 두 누나와 부모님께 선물했다.

이브 생 로랑은 다른 디자이너 지망생들처럼 파리로 건너가 파리의상조합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수업은 그에게 지루한 과정이었을 뿐이어서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1953년 국제양모사무국이 주최한 디자인 콘테스트에 참가했다. 검정 칵테일 드레스를 만들었는데, 최우수상을 받았다. 보그 편집장 미셀 드 브루호프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당대의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에게 소개한다. 컬렉션이 열리기도 전이었는데, 로랑이 그린 스케치가 디올의 컬렉션과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디올은 그를 곧장 인턴으로 채용했다. 항상 디올을 동경해 온, 겨우 19세의 어린 소년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다 1957년 10월 크리스찬 디올이 뇌졸중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한 달여 뒤 이브 생 로랑은 디올 하우스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다. 이 젊은 청년이 수석 디자이너가 된 것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아무리 천재적 재능을 가진 디자이너라 해도 적어도 30, 40대가 될 때까지 자신의 순서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다음해 1월 그는 디올에서의 첫 컬렉션을 내놓는다. 여기에서 바로 그 유명한 ‘트라페즈 룩’을 선보였다. 쇼가 끝난 후 파리지엔들은 거리에서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브 생 로랑이 프랑스를 구했다!’. 당시 크리스찬 디올은 프랑스 패션업계 수출의 50%를 차지하고 있었다. 컬렉션의 성공은 프랑스 경제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니 영웅 대접을 받을 만했다.

하지만 이브 생 로랑은 점점 위축되고 있었다. 프랑스가 패션에 쏟는 열정과 정치적 상황까지 이해하기에 그는 너무 어리고 고집도 셌다. 디올 내부에서는 로랑의 의상이 너무 모던하다고 비판했다. 로랑은 디올의 ‘양복 입은 사람들’이 자신을 제어하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1960년 봄·여름 컬렉션까지만 해도 로랑이만든 디올 의상은 가장 아름다운 컬렉션으로 찬사를 받았다.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해 가을·겨울 컬렉션. 악어가죽소재의 모터사이클 재킷, 스웨터 소매를 덧댄 밍크코트, 깔끔하게 떨어진 플라넬 슈트, 아래 받쳐 입은 터틀넥 스웨터…. 이 모든 것은 거리 패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비트룩’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역작이었지만 황금빛 의자에 앉아 이를 지켜보던 우아한 사람들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카트린 드뇌브와 이브 생 로랑.

▎카트린 드뇌브와 이브 생 로랑.

그러던 중 알제리 전쟁이 일어났다. 그에게 27개월간의 군복무 영장이 날아왔다. 프랑스군이 그의 고향인 알제리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이미 한 차례 군복무를 연기한 로랑은 입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전장에 나간 지 3주 만에 심각한 신경쇠약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 군병원 의사들은 그에게 많은 약을 투여했다. 건강상 문제로 다시 파리로 돌아왔지만 디올 의상실의 자리는 로랑의 어시스턴트였던 마크 보한에게 이미 넘어간 뒤였다. 이브 생 로랑은 디자이너로서의 좌절과 약물 후유증으로 한동안 알코올과 약물 의존증 치료를 받아야 했다. 치료 후에도 건강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1961년 1월 로랑 대신 보한이 디자인한 디올 컬렉션은 큰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그해 5월 로랑은 복직을 거절한 디올 하우스를 고소했다. 밀린 월급에 대한 보상금 68만 프랑(현재 가치로 약 1억원)을 받았다.



피에르 베르제와의 만남57년 10월 30일 프랑스 몬타록스 지역. 신문기자들이 크리스찬 디올의 관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 사이 두 명의 젊은이가 약간 떨어져 서 있었다. 그들은 서로 알지 못했지만 운명은 그들을 만나게 했다. 바로 21세의 이브 생 로랑과 27세의 피에르 베르제였다. 피에르 베르제는 로랑의 평생 파트너였다. 그는 로랑이 군병원에서 약물에 취해 사지를 절단할 위기에 처했을 때도 곁에서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로랑이 디올에서 해고된 뒤에는 디자이너로서 독립할 수 있도록 도운 사업 파트너이기도 했다. 62년 1월 29일 이브 생 로랑이 스폰티니 거리의 한 저택에서 첫 컬렉션을 발표했다. ‘라이프’지는 그의 디자인을 가리켜 “샤넬 이후 최고의 슈트”라고 평했다. 가을·겨울 컬렉션에서는 피코트와 스모크 슈트를 선보였다. 장식적인 오트 쿠튀르 무대에서 선보인 심플함과 간편함은 파격 그 자체였다. 곧 로랑은 세계적 디자이너가 됐다. 피에르 베르제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 어느 것도 62년 1월 29일 첫 컬렉션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날은 모든 것이 위태로웠다. 우리는 떨림, 그리고 불안투성이의 모험을 시작했다. 로랑은 첫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날 이후 나는 깨달았다. 25세의 이 어린 대장이 우리를 승리, 또 승리로 이끌 것이라는 것을….” 63년에는 이브 생 로랑 고유의 로고를 만들었다. 그래피스트이자 아티스트인 카산드라가 디자인했다. 이는 훗날 코스메틱, 향수, 액세서리 등 라이선스 사업까지 확장한 이브 생 로랑의 핵심 이미지가 된다. 이브 생 로랑은 70년대 일본, 한국 등 아시아 시장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패션쇼 피날레에 선 이브 생 로랑.

▎패션쇼 피날레에 선 이브 생 로랑.



이브 생 로랑의 역작들하우스를 오픈한 62년에서 80년대까지 그는 패션사에 길이 남을 컬렉션들을 선보였다. 몬드리안의 작품을 사용한 기하학적 드레스는 패션잡지 역사상 가장 많이 촬영된 것으로 기록됐다. 그가 늘 관심을 가졌던 피카소나 미로, 마티스와 같은 추상화가의 작품들도 컬렉션에 종종 등장했다. 로랑의 색채 감각은 아티스트 못지않았다. 그린, 블루, 로즈,옐로 컬러를 한 룩에서 보여주는 것은 그 어떤 아티스트도 해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는 오리엔탈적인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러시아 발레 컬렉션, 중국 궁중 드레스에서 영감을 받은 오트 쿠튀르 드레스도 만들었다. 오늘날 ‘사파리 룩’ 혹은 ‘콜로니얼 룩(식민지 룩)’이라고 불리는 것도 아프리카 밀림에서 로랑의 런웨이로 승격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뉴욕에 간 로랑이 그곳 해병들이 입는 피코트를 보고 여성복으로 만든 일화는 그의 모던한 감각을 증명한다.

그의 업적이 단순히 ‘패셔너블 한 것’으로 평가 받는 것은 아니다. 로랑은 당시 여성과 시대의 요구를 완벽히 읽어냈다. 그는 여성들을 존경했고, 그들의 몸과 행동과 생활에 봉사하기 위해 일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페미니스트들이 브래지어를 태워 버리자고 주장할 때 그는 67년 아프리카 컬렉션을 통해 비딩 브래지어로 아름다운 여성의 가슴을 강조했다. 1년 뒤에는 아예 가슴이 비쳐 보이는 시스루 블라우스와 드레스를 선보였다.

무엇보다 71년 선보인 ‘스모킹 슈트(스모킹은 ‘턱시도’를 부르는 프랑스어)’는 여자들에게 낮이나 밤에 모두 바지를 입을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는 스모킹 슈트를 선보인 당시에도 “쿠튀리에로서 나의 책무는 바로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나는 여자들이 바지를 입고 싶어 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패션계에 새로운 기준들을 만들었고, 이는 아직까지 많은 디자이너에 의해 재현되고 있는 무형의 유산이다. 66년 그는 리브 고쉬(Rive Gauche)를 론칭했다. 기성복 라인을 론칭한 것인데, 이는 부유한 사람들만의 의상이었던 오트 쿠튀르를 대중화한 시도였다. “60년대를 살아가던 흥미로운 여성들이 쿠튀르의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나는 리브 고쉬 라인을 론칭했다.”

그는 오트 쿠튀르 하우스에서 독립한 기성복 부티크를 오픈한 첫 패션 디자이너로 기록됐다.
▎스테파노 필라티

▎스테파노 필라티

71년 그는 자신의 향수에 올 누드로 등장했다. 그는 패션쇼 피날레에 등장한 최초의 디자이너였다. 오트 쿠튀르 무대에 흑인 모델을 세운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자신의 뮤즈인 카트린 드뇌브와 친해지는 데 몇 년이 걸렸을 정도의 은둔형 디자이너였지만 그의 생각만큼은 시대를 뛰어넘어 자유로웠다.



구찌 그룹에 인수되다이브 생 로랑은 1999년 11월 Gucci Group N.V.에 인수됐다. 이후 유로넥스트와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인수 이후 프레타 포르테의 수석 디자이너는 톰 포드가 맡았고, 로랑은 오트 쿠튀르 컬렉션만을 진행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 국민은 자신들의 국민 브랜드가 조종(?) 당하고 있는 것에 연일 떠들썩했다. 항간에는 이브 생 로랑이 무척 화를 냈다는 소문도 돌았다. 2004년 3월 11일 Gucci Group N.V.(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GCCI.AS, 뉴욕증권거래소: GUC)가 운영하는 이브 생 로랑은 새로운 수석 디자이너로 스테파노 필라티를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스테파노 필라티는 톰 포드와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은 뒤 가장 먼저 이브 생 로랑를 찾아갔다. 그와 끊임없이 대화했고 지금까지도 그의 정신과 스타일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브 생 로랑은 2002년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열린 쇼를 끝으로 패션계에서 은퇴했다. 프랑스 패션계의 거장이자 20세기 패션 아이콘인 이브 생 로랑. 그는 2008월 6월 1일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노년의 이브 생 로랑은 이렇게 회상했다.“프루스트는 ‘숭고하면서도 측은한 신경질인 사람들이여….

이들이야말로 세상의 소금과 같은 존재다. 종교를 만들고 걸작을 만드는 이들은 다른 이들이 아닌 바로 그들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군병원에서 약물, 분노, 그리고 두려움에 취해 꼼짝 못하고 누워 있을 당시 나는 정신적 고통을 신의 선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매년 네 번씩 새로운 컬렉션을 만들어내고, 매번 비평가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분노와 컬렉션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창조해내지 못했다는 자기 질책 속에 빠져들었다. 한 달 4주 중 3주는 내 안의 상상력을 물질적 세계로 끌어내기 위한 고된 기다림이 나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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