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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출 기준 높인 한국 증시… 일본·미국처럼 효과 볼까

[좀비기업 퇴출]② 상장만 늘고 퇴출은 없었다…한국 증시 구조적 문제
금융당국 개편 추진…일본·미국 사례처럼 실효성 거둘까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이 1월 21일 열린 'IPO 및 상장폐지 제도개선 공동세미나'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 한국거래소]


[이코노미스트 정동진 기자]국내 증시에서 한계기업 정리가 본격화된다. 금융당국이 상장폐지 기준을 대폭 강화하면서, 적자를 지속하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업들이 신속히 퇴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국내 증시는 그동안 상장 요건이 느슨해 부실기업이 장기간 존속하는 구조였는데, 이는 증시 전체의 신뢰도를 낮추고 ‘코리아디스카
운트’ 문제를 심화하는 주요 원인으로 지적돼 왔다.

금융당국이 발표한 개편안에 따라 앞으로 시가총액과 매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기업들은 단계적으로 상장폐지 심사 대상이 된다. 이번 개편은 국내 증시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강도 높은 조치로 평가된다. 과거에도 유사한 개편이 추진됐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던 사례가 많았던 만큼, 이번에는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주목된다.

퇴출 거의 없었는데, 상장만 계속 늘어

지난 5년간 국내 증시에서 상장기업 수는 빠르게 증가했다. 2019년 2105개였던 코스피·코스닥 상장기업 수는 2024년 2478개로 17.7% 늘었다. 같은 기간 ▲미국(3.5%) ▲일본(6.8%) ▲대만(8.7%)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증가율이다. 그러나 상장기업이 꾸준히 늘어난 것과 달리 퇴출 기업은 거의 없었다.

연평균 신규 상장 기업 수는 99개였지만, 연평균 퇴출 기업 수는 25개에 불과했다. 특히 2023년에는 112개 기업이 새로 상장됐지만, 퇴출된 기업은 단 19개였다. 증시의 신규 진입이 활발했던 것과 달리, 퇴출은 극히 드물었다.

이로 인해 국내 증시에서는 시장 경쟁력이 떨어진 기업들이 적자가 지속되더라도 상장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구조가 고착화됐다. 금융당국이 상장폐지 요건을 강화한 배경에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그동안 금융당국은 상장폐지 기준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기준을 강화하더라도 실제 적용 과정에서 기업들의 반발과 투자자 보호 논란이 제기됐고, 결국 퇴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상장폐지 제도에 매출액 기준을 지난 2003년 처음 도입하고, 2009년에는 시가총액 요건을 상향 조정했다. 2010년대에도 금융당국은 제도 개편을 검토했지만, 기업들의 반발과 시장 충격 우려로 인해 논의가 지연됐다. 하지만 이후 추가적인 개편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난 10년간 시가총액과 매출액 기준으로 상장폐지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최근 5년간 상장폐지 사례 71건 중 87%가 상장폐지 사유 발생 후 1년 이상 심사를 거쳤다. 코스피의 경우 최대 4년, 코스닥은 최대 2년 동안 개선기간이 부여됐다. 퇴출 요건이 존재했음에도 실제로 적용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면서, 좀비기업들이 오랜 기간 시장에 남아있는 구조가 이어졌다.

결국 우리나라의 상장폐지 개편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완화되거나, 실제 적용 과정에서 후퇴하는 경우가 반복됐다.



국내 증시의 상장회사 수 증가율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지난 5년 간 국내에서 주식 거래가 가능한 상장사 수는 17.7% 증가했다. 이는 같은 기간 미국의 약 5배, 일본의 2.6배에 달한다.

일본 도쿄증권거래소는 2022년 4월 기존 5개 시장을 ‘프라임’, ‘스탠다드’, ‘그로스’의 3개 시장으로 재편했다. 프라임 시장은 글로벌 투자자들의 참여가 활발한 상위 시장으로, 개편 이후 유동주식 시가총액 100억엔 이상, 유동주식 비율 35% 이상을 유지하도록 했다. 또한 신규 상장 기업의 경우 과거 2년간 이익 합계 25억엔 이상이거나, 매출 100억엔 이상이면서 시가총액 1000억엔 이상이어야 하도록 기준을 강화했다.

이러한 개편을 통해 일본 증시는 상장 기업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시장의 신뢰성을 강화해 글로벌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했다. 실제로, 프라임 시장의 상장 기업 수는 2022년 7월 1838개사에서 2024년 4월 1652개사로 감소했지만, 시가총액 중앙값은 같은 기간 573억엔에서 960억엔으로 증가했다.

뉴욕증권거래소(NYSE)도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해 상장폐지 절차를 개선하는 등 시장 정비에 나서고 있다. 기존에는 상장유지요건 미달 시 후속 조치를 거치는 절차가 길었지만, 최근 개편을 통해 주요 상장요건 미달 시 신속하게 퇴출 절차를 개시할 수 있도록 규정을 확대했다. 이러한 흐름은 비효율적인 기업을 정리하고, 시장의 건전성을 높이려는 글로벌 금융 시장의 방향성과 맞닿아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좀비기업 퇴출, 국내 증시 변곡점 될까

국내 증시는 좀비기업이 쉽게 퇴출되지 않고 시장에 남아있으면서 시장의 질적 성장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번 개편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번 개편이 한국 증시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금융당국이 추진하는 개편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일본·미국 사례처럼 기업들이 재정비 후 재진입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함께 마련될 필요가 있다. 퇴출 요건을 강화하는 것만큼이나 퇴출 이후의 절차를 정비하고, 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구조적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이번 개편이 국내 증시의 체질을 바꾸는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지속적인 제도 개선과 시장 모니터링이 병행되어야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며 "단순히 퇴출만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량 기업 중심의 시장 재편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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