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 넘어갈 때 환율이 널뛰었다
패권 넘어갈 때 환율이 널뛰었다
환율전쟁의 시초는 제1, 2차 세계대전 기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 환율 체계는 몇 차례 큰 변동을 겪었다. 본격적 환율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인 1870~1914년 기간의 금본위제도, 환율전쟁이 발발한 양차 세계대전 기간, 종전 이후 환율전쟁이 중단됐던 브레턴우즈 시기, 그리고 환율전쟁이 다시금 격화된 1973년부터의 변동환율 시기다. 환율전쟁의 역사를 돌아보면 최근 환율 갈등의 원인을 풀 단서가 나온다. 환율전쟁은 패권 다툼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달러를 금과 바꾼 금본위제도제1차 세계대전 이전인 1914년까지 환율제도는 금본위제였다. 금본위제는 각 국가가 금과 자국 통화 간에 일정한 교환비율을 설정하면 통화 소지자는 이 교환비에 따라 자유롭게 금으로 바꿀 수 있는 제도다. 각 나라 중앙은행의 통화량 발행은 금태환 의무로 인해 보유한 금이 커버할 수 있는 범위로 한정된다. 그리고 외환시장에서 양국 간 환율은 각국 통화와 금의 교환비를 매개로 설정된다. 예를 들면 미 달러의 금 교환비가 금 1온스당 10달러로, 일본은 100엔으로 설정됐다면 엔-달러 환율은 ‘$1:¥10’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금본위제도는 정부가 통화량을 멋대로 조절할 수 없다는 맹점이 있다. 금 채굴량이 일정할 경우 경제규모가 확대되더라도 이에 상응하는 통화량 확대가 불가능하다. 반대로 경기침체가 심각하더라도 경기부양을 위한 확장적 금융정책이 불가능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각국은 전시재정에 필요한 통화발행을 위해 금본위제를 포기한다. 그리고 전시 중 발생한 통화증발은 이후 미증유의 초인플레이션을 가져온다. 독일은 1919~1923년간 물가가 무려 4815억 배나 상승했다. 초인플레이션에 대한 쓰라린 기억 때문에 1919년 미국을 선두로 속속 금본위제도로 복귀하게 하다. 그런데 복귀 과정에서 영국은 금과 파운드화 간 교환비를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수준, 즉 인플레이션을 무시한 채 설정한다. 파운드화를 고평가한 것이다. 반면 프랑스는 이듬해인 1926년 프랑화를 저평가한 상태로 금본위제도로 복귀한다.
파운드화 고평가 탓에 영국의 무역적자는 지속된다. 무역적자로 보유한 금이 프랑스로 유출되면서 영국은 통화량 부족과 이로 인한 경기침체를 겪게 된다. 견디다 못한 영국은 1931년 금태환을 포기하고 파운드화를 평가절하하게 된다.
당시 환율공조 실패는 부적절한 금태환비 설정, 그리고 불태화(돈을 말리는 것)정책에 기인한다. 불태화란 금 유입에 따른 물가상승을 우려한 프랑스가 국내 여신규모를 축소해 수출 호조로 발생한 통화증발을 상쇄한 것을 말한다. 불태화가 발생하면 금본위제도의 무역수지 불균형 조정기능은 그 힘을 잃는다.
1930년대 들어 대공황이 발발하자 각국 정부는 보호무역주의를 더욱 강하게 표방한다. 수입을 억제하고 자국 수출증대를 위해 환율을 경쟁적으로 절하했다. 그 결과 국가 간 교역규모는 축소되고 서로가 궁핍하게 하는 인근궁핍화(beggar-my-neighbor)가 나타난다. 이 와중에 투기자금은 수익을 좇아 대규모로 이동하면서 환율의 불안정성을 가속시켰는데, 당시 이루어진 경쟁적 평가절하가 바로 오늘날 환율전쟁의 시초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던 1944년 44개국 대표는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에 모여 전후 신경제질서를 구상한다. 기본 골격은 크게 세 가지였다. 양차 세계대전 기간에 발생한 환율전쟁 방지를 위해 조정가능한 고정환율제도 채택, 인근궁핍화 방지를 위한 무역장벽 해제, 투기자본의 국가 간 이동은 방지하는 대신 일시적으로 유동성 공급에 애로가 발생한 나라에 대한 자금대출 담당 기구로서 IMF(국제통화기금) 설립이었다.
이때 각국은 조정가능한 고정환율제도의 구현 방법으로 기축통화로 달러를 선택하고 다른 통화의 가치는 달러를 기준으로 산정하기로 한다. 대신 달러화에는 금 1온스당 35달러로 교환해줄 태환 의무를 부가하고 무역 불균형 해소를 위한 환율변경은 허용했다.
브레턴우즈의 출범과 붕괴그런데 여기서도 금본위제와 유사한 문제점이 나타난다. 선진국들은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가 미칠 대외신인도 하락을 우려해 절하를 꺼렸다. 그리고 무역수지 흑자국은 불태화와 외환보유액 확충으로 평가절상을 기피했다. 이 결과 영국과 미국은 만성적 무역적자를, 일본과 독일은 무역흑자가 누적된다. 이러한 기초적 불균형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한 투기자금은 파운드화 매도, 마르크화 매입과 같은 투기 패턴을 보임에 따라 환율은 다시금 불안정해진다.
한편 기축통화국인 미국은 1960년대 베트남 전쟁 수행과 경상수지 적자 보전을 위해 능력 이상으로 달러화를 발행한다. 이 결과 1970년 들어 미국 이외 국가들이 보유한 달러화가 미국이 보유한 금의 네 배를 초과하게 된다. 결국 미국은 1971년 8월 금태환 중지를 선언한다. 이 선언으로 달러당 엔화는 360엔에서 250엔로 급락한다. 그러면서 달러화는 1973년까지 지속적으로 절하된다.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이 주창한 ‘강한 미국’은 강한 군사력과 달러화로 요약된다. 반면에 군사력 증강을 위한 재정지출과 강한 달러 유지를 위한 미국 내 고금리 정책은 무역적자를 심화시킨다. 결국 이로 인해 무역 불균형이 커지자 1985년 9월 G5(미국·일본·영국·서독·프랑스) 재무장관은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달러화 약세의 공동유도를 합의한다. 엔화는 달러당 237엔에서 2년간 143엔으로 66% 절상된다.
엔고는 처음에는 전혀 힘을 내지 못하는 듯했지만 차츰 미국과 일본 경제를 움직였다. 미국 기업의 수출은 증가했다. 반면 일본은 수출둔화와 경기하강이란 늪에 빠진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환율전쟁의 실질적 수혜자 중 하나가 한국이란 것이다. 소위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를 말하는 ‘3저 호황’이 플라자 합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약이 된 플라자 합의2차 오일쇼크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단행된 달러화 절하는 세계 석유의 절반 이상을 소비하던 미국 소비 수요에 타격을 가하면서 국제유가는 급락한다.
한국은 1970년대 과도한 중화학공업 투자 때문에 늘어난 외자와 무역적자 지속으로 플라자 합의 직전까지 세계 4대 부채국의 오명을 얻고 있었다 그런데 엔고 덕분에 일본과 경쟁관계에 있던 전자, 자동차업계의 가격경쟁력이 개선된다. 유가 및 금리하락은 생산원가도 낮추게 됐다. 결과적으로 1986년을 기점으로 한국의 경상수지는 흑자로 반전되고, 1980년대 GDP증가율은 연평균 무려 10%대를 기록한다. 급기야 1990년 들어서는 외채국이란 오명도 탈피한다. 반면에 중국은 이제 막 사회주의 체제에서 시장경제로 이동하던 때여서 플라자 합의의 수혜자가 되지는 못했다.
일본 정부는 엔고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생산거점을 해외로 이동하고, 내수진작을 위해 국채발행을 통한 공공투자를 확대한다. 그러나 내수부양책은 1990년대 들어 부메랑이 돼 자산버블 붕괴로 표현되는 ‘잃어버린 10년’과 만성적 재정적자로 돌아온다. 이런 일본경제의 침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990년대 들어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에서 발생한 통화위기는 이들 국가에 대출이 많았던 미국의 채권 회수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키면서 엔화 환율을 지속적으로 하락시킨다. 마침내 엔화는 1995년 4월 달러당 80엔까지 하락한다.
결국 숨통이 막힌 일본의 경기불황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는 합의가 G7(G5+캐나다·이탈리아) 간에 도출되면서 엔화 환율은 100엔으로 반전된다. 이것이 역플라자 합의다. 당시 미국과 유럽 국가의 경기가 호조였던 탓에 G7 간에 엔화 약세 합의 도출은 상대적으로 수월했던 점이 있다.
2000년대 들어 미국 IT(정보기술) 버블 붕괴와 이라크전 등 국제정세 불안으로 추가적 달러 약세가 시현되자 2003년 일본 정부는 외환 시장 개입을 시도한다. 당시 미국 수출을 발판으로 고성장을 지속해온 중국은 달러화에 대한 위안화 환율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결국 중국의 무역흑자와 일본의 시장개입이 빌미가 돼 위안화 절상을 겨냥한 미국과 일본·중국 간의 환율전쟁이 벌어진다. 이 결과 2003년 9월 G7은 두바이 성명서에서 유연한 환율 제도를 택하게 된다. 이로써 일본은 이듬해인 2004년부터 시장 개입을 중단하고 중국도 위안화를 소폭 절상하는 선에서 다툼은 휴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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