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증권계의 산증인 떠나다
한국 증권계의 산증인 떠나다
“대신은 창업 이래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세계 제일의 금융 전업 그룹을 이룩해 국내뿐 아니라 세계 무대에 우뚝 설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가자.” 고(故) 양재봉 명예회장이 지난 6월 대신증권 창립 48주년 기념식에서 남긴 말이다. 그가 참석한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 그의 각오와 격려는 결국 유지(遺志)가 됐다.
대신증권 창업자인 송촌(松村) 양재봉 명예회장이 12월 9일 오후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 노령이지만 10월까지도 서울 여의도 대신증권 본사 구석구석을 다니던 그의 모습은 추억으로 남았다. 노정남 대신증권 사장은 “한국 증권업계의 산 역사이자 한국 금융계의 거목이 쓰러졌다”고 애도했다.
금융업은 신용이 생명”양 명예회장은 국내 증권업계 1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말단 은행원으로 출발해 1973년 대한투자금융을 창업했다. 1975년 중보증권을 인수해 현재의 대신증권으로 키워 대기업 계열 증권사와 경쟁하며 국내 증권업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컴퓨터란 단어조차 생소하던 1970년대 후반에 증권업계 최초로 전산화를 시작했다. 1981년에는 증권사 최초로 전광 시세판을 설치했다. 1980년대 초반 금리가 치솟자 회사채 매매를 통해 회사를 키웠다. 그러면서 금융사고의 여파로 흔들리던 대신증권을 5대 증권사 반열에 올려놓았다.
고인은 1925년 전남 나주에서 농부인 양홍철씨의 2남4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3년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를 졸업했다. 22회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동기다. 상고 졸업 이듬해인 1944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들어가 금융계에 첫발을 디뎠다. 거상의 꿈을 키우던 청년 양재봉에게 안정된 직장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1946년 은행을 박차고 나온 그는 한국전쟁 전 외자관리청 목포부소장을 지냈고, 전쟁 후에는 목포와 나주에서 쌀을 사 부산에 파는 미곡상을 했다. 거상의 꿈을 이루려면 젊은 시절에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전남대 상학과에 진학해 만학의 꿈을 이뤘다.
그의 본격적인 첫 사업인 양조업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는 그러나 당시 모든 자산을 팔아 부채를 말끔히 청산하면서 사업가로서 신용을 지켰다. 훗날 경영의 1대 원칙인 신용의 중요성을 절실히 배웠다.
1960년 한일은행에 들어간 뒤 청량리지점장 시절 9억원이던 지점 수신액을 특유의 영업수완을 발휘해 1년 반 만에 네 배 가까이 불려 은행가에 화제가 됐다. 사업가로서 그의 두 번째 도전은 한일은행 청량리지점장 시절이었다. 1970년대 초 단자사를 세워 금융업 경영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1973년 임대홍 미원그룹 회장, 박병규 해태제과 사장 등과 함께 대한투자금융을 설립하고 1975년 중보증권을 인수해 대신증권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금융업은 신용이 생명’이라는 신념에 따라 회사 이름을 ‘대신(大信)’으로 바꿨다. 같은 해 정부가 ‘증권회사 대형화 계획’을 발표한 데 맞춰 대신증권도 자본금을 20억원으로 늘리며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창업 당시 1.9%에 불과했던 시장점유율은 1977년 증권업계 2위인 9% 수준까지 올랐다.
1977년 사장에 취임했지만 다시 시련을 겪었다. 사장 취임 4개월 만에 당시 대신증권 영업부장이던 박모씨가 회사 주식과 고객 돈을 횡령해 자신의 부채를 갚다 들통난 사건이 터졌다. 결국 도의적 책임을 지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양 명예회장은 3년간 용인에서 농사일을 하며 와신상담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대신증권은 자본잠식에 빠졌다. 1981년 대신증권 사장직에 복귀한 그는 임대홍 전 회장의 보유 지분을 인수해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1980년대 중반엔 증시 활황에 힘입어 사세 확장에 나섰다. 1984년 대신경제연구소, 1986년 대신개발금융, 1987년 대신전산센터, 1988년 대신투자자문, 1989년 대신생명보험, 1990년 송촌문화재단, 1991년 대신인터내셔널유럽 등을 잇따라 설립하면서 오늘의 대신금융그룹을 일궜다.
그는 생전에 금융을 보는 탁월한 안목과 과감한 결단으로 대신그룹의 성장을 이끌었다. 1980년대 초 사장 복귀 후 조달할 수 있는 재원을 총동원해 채권투자에 나선 게 대표적인 사례다. 대신증권은 이 덕에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위기관리 능력도 탁월했다. 1990년대 말 펀드 열풍이 불면서 다른 증권사가 20%대의 고금리 회사채를 편입한 채권형 수익증권을 무차별적으로 판매하고 있었고, 시중 자금은 증권사로 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회사채를 편입한 수익증권을 팔지 못하게 하고 안전한 국공채 위주의 채권형 펀드만 취급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안 가 대우그룹 부도와 하이닉스 사태가 연이어 터지며 이들 기업의 회사채를 편입한 수익증권을 판 증권사에 대규모 환매사태가 벌어지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증권가 IT시스템 도입의 선구자1997년 터진 외환위기는 양 명예회장의 위기관리 능력이 빛난 때였다. 그는 1995년부터 보유 중이던 자산을 처분해 단기차입금을 모두 갚고 무차입 경영에 들어갔다. 2년 뒤 외환위기가 닥쳐 동서증권·고려증권이 문을 닫는 등 당시 5대 대형 증권사 중 네 곳이 사라지거나 주인이 바뀌었지만 대신증권은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증권가에서는 그를 IT시스템 도입의 선구자로 여긴다. 컴퓨터의 개념도 낯설던 1976년 증권업무 전산화 체계를 도입했고, 1978년에는 온라인을 통한 거래 업무를 증권업계 최초로 시작했다. 1997년 증권사 최초로 도입한 HTS(홈트레이딩시스템)는 대신증권을 증권 명가로 끌어올리는 데 효자 노릇을 했다.
2001년 현업에서 물러난 그는 고인이 된 차남 양회문 전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겨줬다. 은퇴 후에는 송촌문화재단을 통해 장학사업과 사회복지시설 지원사업 등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펼쳤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1147회 로또 1등 ‘7, 11, 24, 26, 27, 37’…보너스 ‘32’
2러 루블, 달러 대비 가치 2년여 만에 최저…은행 제재 여파
3“또 올랐다고?”…주유소 기름값 6주 연속 상승
4 정부, 사도광산 추도식 불참키로…日대표 야스쿠니 참배이력 문제
5알렉스 웡 美안보부좌관 지명자, 알고 보니 ‘쿠팡 임원’이었다
61조4000억원짜리 에메랄드, ‘저주받은’ 꼬리표 떼고 23년 만에 고향으로
7“초저가 온라인 쇼핑 관리 태만”…中 정부에 쓴소리 뱉은 생수업체 회장
8美공화당 첫 성소수자 장관 탄생?…트럼프 2기 재무 베센트는 누구
9자본시장연구원 신임 원장에 김세완 이화여대 교수 내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