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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닫은 정부 '배출권 거래 강행'

귀 닫은 정부 '배출권 거래 강행'

지난 1월 11일 대한상의에서 열린 배출권 거래제 도입에 관한 경제·산업계 대토론회.

“기후변화 대책과 관련해 2008년부터 정부와 34회, 산업계 자체 18회 등 50여 차례 토론과 협의를 거쳤다. 하지만 산업계 생각이 수렴되지 않은 것 같다. 고민이 깊은 상태다.”

대한상공회의소 산업계 기후변화 대책단장을 맡고 있는 이종인 현대제철 전무의 토로다. 1월 11일 대한상의에서 열린 ‘배출권 거래제 도입에 관한 경제·산업계 대토론회’에서다. 이 전무는 “산업계의 절박한 상황을 정부에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을 반성한다”는 말도 했다.

절박함. 정부가 2013년 시행하겠다는 ‘탄소배출권 거래제’에 대한 산업계 입장은 이 한 단어로 정리된다. 배출권 거래제는 온실가스 감축 의무가 있는 사업장 혹은 국가 간 배출권한 거래를 허용하는 제도다. 정부는 이 제도 시행을 위해 오는 2월 법안을 제출하겠다는 방침이다. 산업계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배출권 거래제 도입은 정부 내에서도 혼란이 있었다. 녹색성장위원회와 환경부가 주도하고 지식경제부는 반대 입장이었다. 최경환 지경부 장관은 지난해 11월 말 국회에 출석해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가 산업계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국익 차원에서 도입 논의 자체를 그만둬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12월 27일 열린 환경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혼선은 사실상 정리됐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대부분 기업이 탄소배출권 거래제를 규제라고 인식하는데 규제라고 인식하면 협력이 어려워진다”며 “정부는 산업계가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말했다. 같은 날 김상협 청와대 녹색성장환경비서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년 2월 임시국회가 열리자마자 배출권 거래제 관련 법안을 국회에 제출한다는 게 청와대 입장”이라고 밝혔다.



녹색위·환경부는 토론회에 불참산업계는 격앙돼 있다. 한 정유회사 임원은 “정부가 아예 귀를 닫아버렸다”고 했다(1월 11일 열린 토론회 패널에 녹색위와 환경부 공무원은 참석하지 않았다. 정부에서 유일하게 참석한 나승식 지경부 과장은 “녹색위가 와서 들어야 할 자리”라고 말했다). 한 산업협회 임원은 “대통령 치적을 위해 공무원이 산업계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온실가스를 줄이자는 목적의 배출권 거래제에 산업계는 왜 이렇게 반발하고 불안해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일부 업종은 ‘존폐’를 걱정해야 할 만큼 기업 부담이 크다는 데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해 펴낸 ‘배출권 거래제의 경제적 파급효과’ 보고서에 따르면 이 제도가 시행돼 이산화탄소 가격이 t당 4만5000원(EU 기준)에 거래될 경우 국내 9개 업종 매출은 연간 12조원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추정액이고 감소분 역시 9개 업종 전체 매출의 2%가 안 되는 수준이기 때문에 괜한 호들갑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매출 감소보다 배출권 거래로 기업이 부담해야 할 비용과 파급효과를 주목해야 한다.
2009년 12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정부는 2020년까지 온실가스를 BAU(배출전망치) 대비 30% 감축하겠다고 국제사회에 선언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감축량이다. 배출권 거래제는 정부가 기업에 온실가스 배출 할당량을 정해주는 것인데,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무상할당이고 또 하나는 경매를 통해 돈을 받고 주는 유상할당이다. 정부는 2013~2015년 할당량 중 90%는 무상, 10%는 유상으로 계획이다. 이 비율은 2020년 유상 100%로 늘게 된다.

산업계에 따르면 2009년 매출 27조원, 영업이익 3조1000억원을 기록한 포스코의 경우 배출권 거래제가 시행되면 낮은 단계, 즉 BAU가 10%고 유상할당이 10%인 조건일 때 온실가스 감축에 드는 비용은 4200억원으로 추정된다. 유상 100%일 경우에는 2조3000억원으로 늘어난다. 더 심각한 곳도 있다. 국내 최대 시멘트 회사의 경우 지난해 매출은 약 1조8000억원, 영업이익 700억원 정도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회사는 포스코와 동일한 조건일 경우 감축 관련 비용은 최소 720억원에서 최대 3960억원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 한국시멘트협회 이기석 팀장은 “거래제가 도입되면 영업이익 잠식 정도가 아니라 초과할 수도 있어 기업의 존폐가 달려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석유화학 업종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난해 1조7000억원 정도 매출을 올린 모 석유화학 업체의 경우 BAU 10%, 유상할당 10% 시행 때 감축 비용은 330억원이 들 것으로 추정된다. 유상할당이 100%로 늘면 1815억원이 든다. 이 회사의 2010년 영업이익은 1800억원 안팎으로 추정된다. 한국석유화학협회 김대용 과장은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도 나서지 않는데 우리나라가 먼저 시행한다면 국가경쟁력 약화는 자명하다”고 말했다.



시멘트 회사 “비용 부담하면 적자” 우려김 과장의 말대로 정부 방침은 국제 흐름과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다. 현재 배출권 거래제를 시행하는 곳은 EU(유럽연합)와 뉴질랜드뿐이다. 미국은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배출권 거래제에 반대하는 공화당이 압승하면서 관련 법안 도입이 불확실하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12월 말 2013년에 배출권 거래제를 도입하려는 기존 방침을 사실상 연기했다. 에너지경제연구원 김현석 책임연구원은 “제조업의 국제경쟁력 약화와 산업계 반발, 그리고 국제적 흐름을 지켜본 뒤 신중하게 검토하자는 중지가 모인 결과”라고 말했다. 국내 산업계가 정부에 바라는 것과 같다.

산업계는 배출권 거래제로 국내 산업의 국제경쟁력이 약화될 것으로 본다. 배출권을 사는 비용 부담 때문에 감산, 생산원가 상승, 생산기지의 해외 이전 가속, 연계산업으로의 파급, 그에 따른 고용 및 투자 감소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배출권 거래제로 직접적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되는 업종은 대부분 온실가스를 추가 감축할 여력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관련 업계가 그동안 에너지 회수 설비 투자와 에너지 고효율화 등에 막대한 투자를 했기 때문에 더 줄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에너지관리공단에 따르면 국내 일관제철소의 에너지 회수 설비 도입률을 100으로 봤을 때 일본은 96, 미국은 90, 중국은 70으로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제지업종 역시 국내의 생산량 단위 에너지 소비는 일본보다 약 21% 우수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 때문에 업계는 “추가 감축 여력이 많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그동안 산업계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투자한 것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할 것인가도 문제”라고 주장한다.

제도 자체에 문제도 많다. 배출권 거래제는 정부가 기업에 배출권을 할당하는 것이다. 이때 기준은 과거 실적이다. 이 때문에 성장기에 있는 기업은 배출권을 적게 할당 받아 불리하다. 반면 온실가스 배출이 많았던 사양산업은 초과 할당 받아 ‘횡재 이윤’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생산량은 갈수록 주는데 과거 수치를 기준으로 하면 배출권을 많이 할당 받게 돼 다른 기업에 팔아 돈을 챙길 수 있다는 얘기다. 김현석 책임연구원은 “이는 정부의 녹색성장 정책에도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배출권 거래제는 투기세력이 개입할 여지가 많은 파생상품으로 변질할 것으로 우려한다. 배출권 거래 가격의 변동성을 노린 투기세력이 개입할 경우 기업이 예상하지 못한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전기요금도 대폭 오를 전망이다. 한국전력거래소에 따르면 배출권 거래제가 시행되면 전기요금은 2013~2015년간 3% 오르고, 2021~2025년에는 누적 11.9% 상승할 것으로 분석했다. 한국전력거래소 곽왕신 차장은 “유상 할당량과 이산화탄소 의무 감축 정도에 따라 전기요금 인상폭도 증감할 것”이라며 “거래제 도입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산업계나 국민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도입 강도를 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탄소 배출 줄인 회사가 불리한 역설1월 12일 박영준 지경부 제2차관은 한 강연회에서 “배출권 거래제로 산업계에 충격을 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날 대한상의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한 지경부의 나승식 과장은 “법안을 입안하는 주체는 입안 자체가 중요하고 강조하다 보니 오해가 있는데 산업 경쟁력을 우선한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산업계와 경제단체는 이 말을 곧이 믿지 않는다. 오히려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관리제에 이어 배출권 거래제로 이중 규제를 펼치려 한다고 본다.

정부는 올해부터 이산화탄소 배출이 많은 기업을 선정해 감축 목표치를 부여하고 이를 어길 경우 과징금을 물리는 제도를 시행한다. 이에 대해 대한상의 지속가능경영원 최강림 실장은 “목표관리제와 배출권 거래제를 동시에 시행되는 이중 규제 문제가 발생한다”며 “어차피 거래제를 도입하려 한다면 2015년 이후로 연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 실장은 “2015년 시행하자는 것이 아니라 시행을 검토해 보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산업계가 정부에 바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말을 경청해 달라”는 것이다. 산업계가 배출권 거래제 자체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국제 흐름을 지켜보면서 전략적으로 대응할 여지는 없는지, 산업계의 입장은 충분히 반영됐는지, 국가경제에 미칠 악영향은 무엇인지, 법안이나 제도 자체에 문제는 없는지 시간을 갖고 검토해 달라는 것이다. 철학자 칼 포퍼는 “최선의 선택보다 최악의 회피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다.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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