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판 메디치가 사람들

지난해 가을 금융위기의 여파로 침체에 빠졌던 뉴욕 미술시장이 되살아날 징후가 엿보였다. 하지만 일부 유명 공공미술관은 여전히 파산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뉴욕의 첼시 미술관, 미국 민속미술관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와중에 부유한 수집가들이 독자적으로 전시공간을 여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미술계에서 이들의 역할 확장이 기대된다. 이들은 주로 현대미술이 성장세를 보이는 지역 중 정부의 미술계 지원이 부족한 나라에 전시공간을 설립한다. 이 ‘현대판 메디치가(13~17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재벌 가문으로 예술 후원에 힘썼다) 사람들’은 미술을 대중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앞장선다.
최근 문을 연 이런 전시공간 중 가장 눈에 띄는 곳이 프랑수아 피노(프랑스의 거부)가 베네치아에 세운 ‘팔라초 그라시’다. 피아트 자동차의 전시장으로 쓰이던 공간을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가 개조해 지난 2006년 문을 열었다. 일단의 큐레이터가 돌아가면서 2000점이 넘는 피노의 소장품 중에서 기획 의도 별로 작품을 선별해 전시회를 연다. 소장품 중에는 제프 쿤스, 데이미언 허스트, 신디 셔먼 등 저명한 현대미술가의 작품이 포함됐다. 피노의 미술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엔날레가 열리는 베네치아에 문을 연 덕분에 관람객 유치에 문제가 없지만 다른 수집가들은 현대미술이 아직 인기를 얻지 못한 지역에 전시공간을 열어 대중의 안목을 키우는 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2008년 말 모스크바에서 ‘바이바코프 아트 프로젝트(BAP)’를 설립한 마리아 바이바코바(25)가 좋은 예다. 뉴욕과 런던에서 미술사와 현대미술을 공부한 바이바코바는 막 싹을 틔우는 러시아 현대미술계로 눈을 돌렸다. 그녀는 러시아 현대미술계의 실상에 실망했다. “러시아 정부는 현대미술을 무시하며 대중은 거리감을 느끼는 듯하다”고 그녀는 말했다. “러시아 학교에서는 미술사를 가르치지 않는다. 가르친다 해도 고전이나 19세기 작품,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으로 범위가 한정된다.” 그래서 바이바코바는 모스크바 곳곳의 인상적인 장소를 임시 전시회장으로 삼아 전시회를 연다. 2008~2010년에는 건축된 지 100년이 넘은 유서 깊은 ‘레드 옥토버 초콜릿 팩토리’에서 뤽 타이망스, 폴 파이퍼 등의 전시회를 열었다. 지난해에는 베를린에서 발행되는 한 문화 잡지와 공동 기획으로 파벨레츠카야강 근처의 한 공간(1300평)에서 안드로 베쿠아, 시프리엥 게이야르 등 떠오르는 현대미술가들의 전시회를 열었다.
바이바코바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재능있는 러시아 미술가들의 작품을 국제적으로 유명한 미술가들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해 그들의 이름을 알리려 한다. 하지만 어느 한 장소에서 전시회를 계속하기보다는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전시회를 여는 쪽을 더 좋아한다. 뉴욕에서 유행하는 ‘팝업 갤러리’와 유사한 개념이다. “어떤 한 공간을 전시회장으로 못박아 놓으면 언제나 그곳을 작품으로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질이 떨어지는 작품을 전시하거나,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거나, 재원을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배분하게 될 위험이 있다.” 장소를 바꿔 가며 전시회를 여는 방식은 바이바코바의 프로젝트에 생기를 불어넣고 쉽게 싫증 내는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다.
인도에서는 미술계 후원자 아누팜 포다르가 자신의 소장품을 대중에 공개해 이와 유사한 역할을 한다. 유명한 자본가 집안의 후손인 포다르는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인도 민속미술품과 현대미술품을 5000점 넘게 수집했다. 소장품 중 현대미술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40% 정도다. 이들은 2008년 가을 뉴델리의 집안 소유 건물이 모여있는 지역에 2층짜리 전시공간 ‘데비 아트 파운데이션’을 열었다. “소장 규모가 커지면서 대중에 공개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고 포다르는 말했다. “게다가 인도에선 아직까지 미술이 상류층의 전유물로 여겨지기 때문에 미술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그런 기회를 주고 싶었다.” 데비 아트 파운데이션은 인도 최초의 사립 현대미술관으로서 다른 미술 후원자들에게 일종의 본보기 역할을 한다. 포다르는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유사 프로젝트가 많이 생겨나기를 기대한다. 그는 어마어마한 부동산 가격과 정부의 제한적 지원이 걸림돌이 되리라 예상하면서도 앞날을 낙관적으로 본다. “전시공간의 부족은 사람들이 현대미술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시회장 마련의 준비작업에 따르는 어려움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기부관(觀)의 문제도 있다. 우리 전 세대 기부자들의 사고방식은 지금과 좀 달랐다. 그들은 교육과 의료, 종교에 중점을 뒀지만 우리 세대에 와서는 현대미술과 디자인, 건축, 패션 쪽으로 관심이 옮겨가는 추세다.”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나라 중 국제적 영향력이 가장 막강한 나라가 중국이다. 최근 중국은 세계 각지의 대형 미술관과 수집가들의 관심을 모았다. 벨기에 수집가 기(Guy)와 미리암(Myriam) 울렌스는 베이징 다샨츠(大山子) 예술구에 ‘울렌스 현대미술관(UCCA)’을 열어 방대한 규모의 소장품을 전시한다. 바우하우스 양식으로 지어진 약 6700평의 이 전시 공간은 원래 군수물자를 생산하던 공장을 개조해 만들었다. 3개의 전시홀과 강당, 식당, 도서관, 서점으로 구성됐다. 이런 비영리 모델은 민솅(民生)은행 미술관처럼 대다수가 기업의 소유인 중국의 사립미술관 풍토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다. 일각에서는 기업에서 운영하는 사립미술관들이 개인 기부금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들어 이런 형태의 미술관을 옹호한다. 하지만 기업의 영리추구에 밀려 아방가르드 등 소장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작품이 외면당할 위험이 있다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 중국과 서양의 사립미술관 풍토가 이렇게 다른 점을 고려할 때 지금으로선 중국 사립 현대미술관 설립에 중국인 수집가보다 외국인 수집가가 나서는 편이 더 바람직할 듯하다.
부유한 개인들은 사립 현대미술관 후원에 더 큰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서양의 공공미술관들은 자금 조달에 애를 먹고 신흥시장 국가의 정부들은 현대미술을 자국 경제가 감당하지 못할 사치로 여긴다. 따라서 미술 분야를 풍요롭게 하려면 이 분야의 발전에 개인적 관심을 지닌 부유한 개인들이 나서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들이 지닌 소장품의 가치가 올라간다면 금상첨화다.
번역·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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