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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ITY] 리버풀이란 거대한 ‘교향악’

[THE CITY] 리버풀이란 거대한 ‘교향악’

리버풀에는 아직도 배와 뱃사람들, 난파와 폭격 등 바다와 관련된 수많은 기억의 부유물이 떠다닌다.

괴테가 말했던가?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내 생각엔 도시도 마찬가지다. 명쾌한 클라리온 소리를 내는 곳도 있고, 현악 사중주단의 아름다운 화음이 흐르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우렁찬 트럼펫의 행진곡과 어울리기도 하고, 또 어떤 곳은 불협화음에 엇나간 소리를 내기도 한다. 잉글랜드 서부 해안에 위치한 리버풀은 언제나 내게 오페라에 나오는 영웅적인 군마를 떠올리게 한다.

이 억센 산업 항구도시에는 힘찬 드럼 소리라면 모를까 섬세한 선율은 어울리지 않는다. 또 슬픈 아리아와 멋진 합창, 그리고 가슴 저미는 커튼콜과 난해할 정도로 복잡한 대본, 저속한 유머의 충돌이 얽힌 오페라가 어울린다. ‘스카우스(Scouse)’라고 이름 붙여진 기이한 콧소리 방언마저도 마치 오페라처럼 선동적인 듯하면서 흥미롭다.

이 기세등등한 오페라의 첫 주제는 바다의 노래다. 리버풀은 머지강 어귀의 하찮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지만 영국의 전성기에 세계 제일의 항구 중 하나로 성장해 미국으로 가는 유럽 배들의 주요 기항지가 됐다. 아일랜드인부터 스칸디나비아인, 중국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외국인이 리버풀에 정착했다. 그리고 박물관, 미술관, 유명 대학과 교향악단 등 몇몇 뛰어난 공공 건물과 기관은 당시 축적된 부를 짐작케 했다. 오늘날까지 리버풀의 주된 이미지는 여전히 장대한 에드워드 7세 시대의 건물 숲이다. 아이로니컬한 스카우스 방언의 표현으로 이름하여 ‘삼미신(三美神)’이다. 삼미신이 리버풀의 부둣가를 압도한다. 도시 중심부의 거의 모든 곳에도 바다의 영향이 역력하다.

증기선의 전성기엔 대형 여객선이 이곳을 드나들었다. 전시엔 수많은 군함이 이곳에서 미국으로 출항했다. 그리고 ‘삼미신’ 뒤편의 벙커는 대서양 전투의 지휘소였다. 지금도 리버풀의 거리엔 배와 뱃사람들, 거대한 선박회사들, 난파와 폭격, 대서양 횡단 기록 등 바다와 관련된 수많은 기억의 부유물이 떠다닌다.

그러나 이 모든 기억도 이제는 점차 사라져가면서 이 도시의 오페라에 비애감을 더한다. 지금은 ‘삼미신’ 아래 정박하는 대형 선박이 거의 없다. 머지않아 거대한 굴뚝을 드러내며 위엄을 자랑하던 여객선, 그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던 은색 증기와 웅장한 뱃고동소리를 기억하는 사람을 찾기조차 어려울 듯하다. 선적 사무실은 다른 용도로 변경됐다. 오래된 부두와 창고는 박물관이나 관광 명소가 됐다. 상류의 최신식 부두로 가다가 지나치는 배들을 제외하곤 강 건너 버컨헤드를 오가는 머지 연락선만이 그곳을 지나다닐 뿐이다.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머지강을 가로지르는 연락선’이라는 노래가 실제로 있다. 게리 앤 더 페이스메이커스가 부른 그 옛 명곡을 기억하시는지? 우리 시대 들어서 리버풀은 운명의 격렬한 부침을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무자비한 폭격, 끔찍한 불황, 건물 해체의 광분, 계속 미뤄진 재건축 계획. 하지만 가히 세계시민이라 칭할 만한 이곳 사람들은 묵묵히 견뎌냈다. “너무도 낙천적이라 계속 힘이 난다”라는 리버풀의 그 유명하고도 오래된 구호처럼 말이다. 리버풀FC는 열광적으로 사랑받는 축구팀이며 이곳에서 태어난 시인, 코미디언, 가수와 춤꾼들은 국내외에서 리버풀의 활달한 명성을 지켜나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비틀스는 베르디와 푸치니에 버금갈 만한 족적을 리버풀에 남겼다. 그들이 처음 공연을 시작한 캐번 클럽을 보려고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피어 헤드 아래의 머천트 해전 기념비에 기록된 희생자를 애도하는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관광객이 캐번 워크 쇼핑센터에 세워진 비틀스 동상에 경의를 표한다.

그래서 이 오래되고 고집불통인 도시는 비틀거리면서도 전진한다. 전성기의 멋진 건축물은 여전히 이 도시에 상처투성이 영광의 위엄을 보여준다. 불완전했던 도시 재건계획도 이제 마침내 21세기에 어울리는 몇몇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늘 그렇듯이 리버풀이라는 오페라엔 오만과 후회, 향수와 냉소, 희망과 환멸, 해학, 분노와 관용 등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있다. 2008년 리버풀은 ‘올해의 유럽 문화수도’로 지정됐다. 하지만 그보다는 ‘영구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수도’라는 명칭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필자는 저술가이며 최근 ‘접촉! 조우의 책(Contact! A Book of Encounters)’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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