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팬덤의 힘
아이돌 팬덤의 힘
‘지상파 방송엔 못 나오는 JYJ의 음악을 종일 틀어주는 인터넷 방송을 만들어 보자. 같이 일할 분은 지원해 달라. 그러나 비영리단체로 운영되며 보수는 없다.’
1월 13일 연예인과 관련된 영상과 글을 올리는 다음텔존의 JYJ(동방신기 전 멤버 재중·유천·준수가 꾸린 그룹) 게시판에 올라온 어떤 글의 요지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이 글의 조회수는 6600건을 넘어섰고 댓글은 180여 개가 달렸다. 일주일 만에 지원자 240여 명이 몰렸다. 아이디어를 내고 모집에 나선 헬레나(그는 실명 대신 닉네임으로 써주길 원했다)는 “반응이 폭발적이었다”며 “현직 방송작가, 공연기획자, 웹 개발자, 광고 종사자, 유학생, 교수까지 지원자의 직종도 다양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만난 70명이 지금 방송 개국 준비에 한창이다. 방송작가 출신은 대본을 쓰고 웹 개발자들은 홈페이지를 만드는 식이다. 영상팀, 작가팀, 음향팀, 운영팀, 총무팀, 홍보팀, 번역팀 등 조직도 꾸렸다. 방송국 이름은 ‘아이러브제이와이제이(ILoveJYJ·www.ilovejyj.com)’로 정했다. 국내에선 듣도 보도 못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헬레나를 비롯해 방송국 구성원은 모두 JYJ의 팬이다. 헬레나 같은 40대 ‘이모팬’부터 10~20대 ‘원조팬’까지 연령층도 다양하다. 헬레나는 “10~20대, 30대, 40대 이상이 고르게 포진했다”고 말했다. 10~30대까지 젊은 층은 동방신기 시절부터 JYJ의 팬이었던 사람이 많다. 이모팬은 두터운 매니어층을 만든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 출연한 유천에 매료돼 JYJ의 팬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십대 팬에서 ‘이모팬’까지 70명 모여JYJ 팬들이 인터넷 방송국을 개국하려는 이유는 뭘까? JYJ는 동방신기의 전 멤버다. 동방신기는 영웅재중·믹키유천·시아준수와 유노윤호·최강창민 등 다섯 명으로 이뤄진 아이돌 그룹이었다. 그들의 팬카페 가입 회원만 80만 명을 헤아릴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런데 2009년 7월 재중·유천·준수가 SM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전속계약 해지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 팀이 깨졌다. 가처분 신청의 사유는 이른바 노예계약이었다. 계약 기간 13년은 이례적으로 긴 데다 수익배분도 정당하게 이뤄지지 않았고 계약 해지 시 위약금은 앞으로 벌어들일 수익의 2배를 지불하게 돼 있었기 때문이다.
SM은 그러나 “세 멤버가 회사를 통하지 않은 채 한 화장품업체의 사업에 참여한 뒤부터 회사와 의견 충돌이 있었다”며 “화장품 사업을 이유로 대형 화장품 브랜드의 CF 출연 제의를 거부하고 그 직후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고 반박했다. 양측은 SM과의 전속계약을 둘러싸고 아직도 법정에서 공방을 벌인다.
그러나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에서는 법원이 JYJ의 손을 들어줬다. 2009년 10월 JYJ가 SM을 상대로 “부당한 전속계약을 유지할 수 없다”며 낸 전속계약 효력정치 가처분 신청을 일부 받아들였고, 2월 17일엔 SM이 JYJ를 상대로 낸 가처분 이의신청을 기각했다.
JYJ는 지난해 말 첫 앨범 ‘더 비기닝(The Beginning)’을 내고 본격적인 활동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지상파 방송에선 이들의 모습을 보기는 힘들었다. JYJ의 홍보를 맡은 프레인 측은 “음반을 출시한 지난해 10월부터 지금까지 지상파 방송사 음악·예능 프로그램으로부터 섭외가 한 건도 없었다”며 “드라마나 뮤지컬 출연을 빼고 국내에서 가수로 정상적인 활동을 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반면 SM 소속으로 남은 유노윤호·최강창민은 동방신기란 이름으로 최근 각종 음악·예능 프로그램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재개했다.
JYJ와 동방신기의 지상파 활동이 이처럼 대조적인 양상을 보이는 이유는 뭘까? 방송국 측은 SM과의 법정 공방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JYJ의 출연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스타를 많이 거느린 SM의 눈밖에 날까 봐 방송국이 알아서 JYJ를 차별대우하기 때문이라는 추측에 무게가 실린다.
법원도 SM이 JYJ의 연예활동을 방해할 개연성을 인정했다. 지난 2월 21일 서울중앙지법은 “SM은 JYJ의 연예활동을 방해해서는 안 되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에는 위반행위 1회당 2000만원을 지급하라”는 간접강제명령을 내렸다. SM이 2009년 11월 2일 ‘JYJ가 전속계약을 따라야 한다’는 기자회견을 열고 2010년 10월 2일 워너뮤직코리아에 내용 증명을 보내 ‘JYJ의 월드 와이드 음반 제작, 유통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던 일이 JYJ의 연예활동 방해 사례였다고 법원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방송사들의 공공연한 ‘JYJ 보이콧’ 기간이 늘어나면서 팬들의 갈증도 커갔다. JYJ의 음반 판매량은 소리 없이 9만 장을 넘어섰다. “그렇다면 아예 방송국을 하나 차리자. 인터넷 방송국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헬레나는 “JYJ를 TV방송에서 볼 수 없는 팬과 노예계약의 부당성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방송에 출연하지 못하는 JYJ를 모두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개국(3월 3일)을 앞두고 방송국의 멤버들은 최근 하루하루를 48시간처럼 보낸다. 직장인이 대부분이라 퇴근 후부터 제2의 일과가 시작된다. 둥지는 서울 서초구의 한 오피스텔에 마련했다. IT업계에서 일하다 합류하게 된 최은진(40)씨는 “매일 저녁 6시쯤 모여서 밤을 새우기 일쑤”라며 “휴일도 반납하고 준비한다”고 말했다.
방송국 문 닫는 날 빨리 왔으면…
헬레나 등은 방송국 개국을 준비하면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사무실 임대료는 그렇다 쳐도 방송장비의 구입이나 임대 등에 수천만원 가까이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국 후엔 팬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방송 이용료를 운영에 보탤 계획이다. 또 방송국의 비영리 법인 등록 문제나 저작권료 지불 등의 각종 법적인 문제도 있었다. 이는 변호사 두 명이 무료로 자문에 응해줘 어려움을 헤쳐나갔다.
최은진씨 등 방송국 개국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억측이나 뜬소문 혹은 괜한 오해를 살까 봐 매우 조심스러워한다. JYJ나 이들의 매니지먼트를 맡은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측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방송국의 배후에 JYJ 측이 있지 않느냐는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측 모두 팬들의 순수한 마음이 만들어낸 방송국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JYJ 인터넷 방송국을 의미 있게 바라본다. 문화평론가인 탁현민 성공회대 겸임교수는 ‘팬덤의 진화’로 풀이했다. 탁 교수는 “팬덤이 소극적 소비자에서 적극적 소비자로 성장한 사례”라며 “JYJ가 여느 아이돌 스타와 다른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팬심의 밀도가 높아진 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부 거대 기획사가 음반 시장을 독점한 상태에서 소비자가 새로운 플랫폼을 구축한 것”이라며 “작지만 의미 있는 시도”라고 평가했다.
영화평론가이자 임상심리학자인 심영섭 대구사이버대 교수는 JYJ의 팬임을 ‘커밍아웃’하고 공개적인 지지를 선언했다. 특히 그는 ‘이모팬’들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그는 “이모팬들의 팬심에는 모성본능과 사회적 정의감이 뒤섞여 있다”며 “좋아하는 가수를 TV에서 볼 수 없다는 허탈감과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모성본능이 사회적 분노로까지 발전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개국을 눈앞에 뒀지만 ‘아이러브제이와이제이’ 멤버들은 하루라도 빨리 방송국이 문 닫는 날이 오길 꿈꾼다. 이들은 “JYJ가 불합리한 제약 없이 지상파 방송에 나오는 날 방송국의 문을 닫을 예정”이라며 “그날이 앞당겨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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