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vore BOOKS >> 이것이 ‘맛있는 유학 요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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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우 석김영두의 신간 ‘퇴계, 인간의 도리를 말하다’를 소개하면서 약간의 혹평을 곁들였다. 100점 만점에 80점을 겨우 준 셈이다. 아쉽다면 전 시대 정신유산의 큰 몫인 유학을 보다 탄력 있고, ‘맛있게’ 저술해서 동시대에 유통시킬 만한 젊은 학자가 무척 드물다. 거기에 근접한 사람이 한형조(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다. 그가 갖는 매력은 ‘구질거리거나 곰팡내가 풍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만큼 신선하다.
몇 해 전부터 중앙선데이에 유학 관련 에세이 ‘교과서 밖 조선유학’을 연재했던 그가 유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체적으로 더듬어볼 만한 좋은 책으로 딱 한 권을 추린다면 ‘왜 조선유학인가’를 꼽아야 한다. 2년여 전에 출간됐지만, ‘젊은 유학 관련서’로 유감없다. 신간 ‘퇴계, 인간의 도리를 말하다’가 옛 이야기를 단순 반복한 혐의가 있다면, ‘왜 조선유학인가’는 2000년대에 걸맞은 새로운 유학 이야기로서 손색없다.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유학책이다.
한형조에 따르면 유학은 지금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서는 국면인데, 이게 참 역설이다. 근대화 돌입과 함께 전시대의 도그마인 유학의 유산이 거의 전부 와해됐기 때문에, 그 잿더미 위에서 21세기에 유학을 논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지 않은가! 지난주 소개했던 대로 19세기 말 조선의 망국 앞에서 단재 신재호는 “일찌감치 육경(六經)을 불 싸질렀어야 했다”고 유학을 저주하면서 그 책임을 물었다면, 이제 시대가 다시 바뀌긴 바뀌었다. 포스트모던한 지금 은근히 옛 것에 관심이 쏠린다. 이제 조선 망국의 책임이 유학에 있다는 준엄한 시선은 조금 무뎌졌다.
“(유학을 말하는) 전통론자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근대화는 (유학 등) 전통의 기억을 지운 원흉이지만, 그 기억을 되살리게 한 은인 또한 근대화라는 사실이다. 근대화의 성공과 자신감이 없었다면, 전통은 여전히 굳게 봉인된 채, 열어서는 안 될 상자 속에 갇혀 있을 것이다.”(15쪽) “요컨대 시대정신이 학문을 규정한다. 한국 또한 근대화(를 못 이뤘다는) 콤플렉스를 벗어 던지면서 이제 또 다른 실용적 목표 아래 전통과 유학 읽기를 실험하는 중이다. 나는 그것이 고맙다.”(154쪽)
“그가 물려받은 나라는 두 번의 전쟁을 겪고 민생은 피폐한데다가 정치는 당파에 찢겨 정약용의 말처럼 ‘터럭 끝 하나 썩어 문드러지지 않은 것이 없는’ 그런 나라였다.”(246쪽) 쉽게 말하자. 한 나라를 다스리려던 정조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선 인재가 없었다. 있는 것은 괜히 헛기침하면서 도학(道學)을 외치는, ‘인품이나 잡고 있는’ 엉터리 도덕군자는 수두룩했어도 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정치와 행정의 실무를 맡기기에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정조의 한숨과 속생각을 담은 어록 ‘홍재선서’를 읽어 보라. 그건 ‘사대부의 나라’ 조선을 냉정하게 관찰한 기록이자, 이어지는 19세기 ‘역사의 대 실패’의 전주곡이 아닐까 싶다.
“천하에 혹 사리에 어두운 군자는 있지만, 어리숙한 소인은 없다. 사람들은 단지 소인이 능히 나라를 그르친다는 것은 알지만, 군자도 나라의 병폐를 끼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모른다. 만약 군자가 재주와 덕이 없어 시의에 어둡다면, 나라에 끼치는 병폐가 쉬 드러나는 소인의 병폐보다 심하다.”
그런 유학이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는 500년을 다스려 왔다. 세계 역사에서 보기 드문 장구한 세월 동안 유지된 왕조가 분명하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 시기에 사회는 명분상으로나마 예(禮)의 사회였다는 점이다. 정치와 경제도 그랬다. 지금처럼 호흡이 가쁘지 않았기 때문에 도덕정치에 중농주의의 메커니즘 아래 느리고 한가롭게 굴러가는 데 성공했다. 결함 없는 이념이 어디 있고, 단점이 없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어디 있을까? 그렇다면 유학은 훌륭한 ‘장기지속의 이념’이 분명하다.
그런 유학이 원했던 사회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형조 식의 레토릭으로 그건 한마디로 “인(仁)과 의(義)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였다. 그것이 유학의 창시자 공자가 원했던 그림이었고, 이상주의자 맹자가 외쳤던 왕도정치의 이념이었다. 모든 게 전문적인 실무와 효율 지상주의의 발가벗은 경제 원리로만 돌아가는 지금의 시선으로 보자면, 에덴시대의 정치윤리가 분명했다. 근대 이전이라지만 너무도 한갓지다면 한갓지고, 너무 멋스럽다면 멋스러운 이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형조는 유학을 “영원의 도전자”(45쪽)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그가 쓴 입문서 ‘왜 동양철학인가’의 이런 대목도 함께 기억해두자.
“유학은 성학(聖學) 즉 성인이 되기 위한 공부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섬뜩한 가르침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라, 즉 근자는 한 가지 직업이나 기능을 획득하는 공부가 아니라 바로 진정한 인간을 목표로 했다. 그런 성현들은 자연과 우주의 의미를 미리 체득한 선각(先覺)이다. 그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후인들을 교육하는 지침이 바로 사서삼경을 비롯한 경전들이다. 그런 점에서 독서란 객관화된 정보를 얻자는 것이 아니요, 바로 인간의 본성을 최고도로 발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71~72쪽)
아마도 유학은 인류가 만들어낸 사회이념 중 가장 높고 아름다운 것의 하나다. 천지와 우주 그리고 인간사회를 한꺼번에 통합한 통치 이념이란 굳이 비견하자면 서양 중세의 기독교 나라, 지금 21세기 이슬람 근본주의 중동 국가 말고 또 있을까 싶다. 문제는 바로 그 점이다. 한형조가 새롭게 일깨워준 유학이란 효율과 속도를 최우선으로 하는 모더니즘 즉 근대의 사회원리와는 전혀 종류가 다르다. 아니 발상 자체가 구분된다.
지금 우리 한국인들은 너나 구분할 것이 없이 ‘근대의 아이들’로 탈바꿈했다. 지난 100년 우리가 그렇게 변했다. “인과 의가 강물처럼 흐르던 사회”에서 “효율과 속도가 빛의 속도로 지나가는”, 그런 엄청난 변화를 맞았다. 조상들의 유교가 아직은 일부 친근하면서도(제사 등 관혼상제와 공동체의식 때문에) 동시에 너무도 낯선(가부장적 권위주의와 서열의식 때문에) 이유는 그런 까닭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이제 한형조를 길라잡이 삼아 유학을 다시 생각할 때다. 그 유학 안에서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지혜로움이 필요하다.
[필자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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