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그룹 주력사의 내일 >> 자원·소재 개발에 미래를 걸다
4대 그룹 주력사의 내일 >> 자원·소재 개발에 미래를 걸다
기름값이 묘하다.” 1월 13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민경제대책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한 말이다. 이후 3개월간 국내 정유업계는 심한 몸살을 앓았다. 대통령의 발언 직후 공정거래위원회는 SK이노베이션 등 국내 정유사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3개월 조사 끝에 과징금 폭탄을 예고하는 담합 심사보고서를 발송했다. 지식경제부와 기획재정부는 석유가격 TF(태스크포스)팀을 꾸려 휘발유 가격 비대칭성(국제 석유제품 가격이 오를 때에는 국내 석유제품 가격이 왕창 오르고, 내릴 때에는 찔끔 내리는 현상을 일컫는 말)과 결정 구조 등을 들여다봤다.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내가 회계사 출신인데 기름값 원가를 직접 계산해 보겠다”고 나섰다. “이익 나는 정유사들이 성의표시라도 해야 한다”고 직설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석유시장은 경쟁시장이 아닌 과점시장이기 때문에 과점으로 발생한 이익은 소비자에게 환원 가능하다는 게 최 장관의 논리였다.
정부의 고강도 압박에 못 이겨 정유사들은 결국 이익을 토해내기로 했다. 지난 2월 서민용 난방유 가격을 L당 50~60원 인하한 데 이어 4월 7일부터 휘발유와 자동차용 경유 가격을 L당 100원 내렸다. 국내 정유업계 맏형인 SK이노베이션은 휘발유와 경유 가격인하 조치로 3000억원가량의 손실을 입을 것으로 추정했다.
정유업계가 정부로부터 기름값 인하 압박을 받은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유가가 치솟았던 2008년을 비롯해 유가가 오를 때마다 유사한 시나리오는 되풀이됐다. 원가와 물류비 등 전방위로 파급 효과가 미치는 유가는 물가 우려가 나올 때마다 정부의 타깃이 된다. 정유업계가 이른바 ‘규제 리스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다. 규제 리스크가 불거질 때마다 정유업계는 “해외시장 경쟁도 점점 치열해지는데…”라고 항변한다. 그냥 볼멘소리가 아니다. 과거 원유를 팔아 이문을 남겼던 중동 산유국이 직접 석유 및 화학제품을 생산하고, 관련 산업에 뛰어들고 있다. 국내 정유·화학업체들의 전통적인 수출시장인 중국·인도·베트남·인도네시아도 자체적으로 정유공장을 짓고 있다. 이들의 기술은 아직 세계적 수준의 국내 정유·화학업체들에 미치지 못하지만 직접 보유한 원유를 가공해 시장에 내놓을 것이라는 점에서 위협적이다. 이들이 잉여분을 수출하기 시작하면 업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구자영 SK이노베이션 사장은 “이대로 가다가는 급물살에 휩쓸려 현상 유지도 어렵다”고 말한다. 개선 수준을 넘어선 퀀텀 점프(대약진)를 위한 과감하고 혁신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위기의식을 드러냈다. 퀀텀 점프를 위한 SK이노베이션의 변신은 진행형이다. 무대를 세계로 넓히고, 녹색성장 시대의 미래 에너지와 신소재로 영역을 확장해 글로벌 종합 에너지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각오다.
5년 누적 수출액 100조원 돌파지난해 SK이노베이션의 수출액은 26조1544억원. 전체 매출액에서 수출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59%였다. 2008년에는 27조원을 넘어서 수출액 비중이 60%를 기록하기도 했다. SK이노베이션은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누적 수출액 101조원을 올렸다. 국내 기업 가운데서 삼성전자에 이어 두 번째로 5년 누적 수출액 100조원을 돌파했다.
SK이노베이션은 정체된 내수시장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일찌감치 수출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홍콩, 베트남 등의 고정 거래처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면서 휘발유, 경유 등 고부가가치 경질유 제품 중심으로 체계적 수출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수출을 확대했다”고 설명했다.
석유개발 사업은 수출 확대에 일조했다. 원유 생산량 전체를 수출하고 있는 석유개발 사업의 경우 연간 일 평균 생산량이 2009년 4만 배럴에서 지난해 말 7만 배럴로 증가했다. 현재 SK이노베이션은 16개국 27개 광구에서 매장량 기준으로 5억 배럴가량의 지분 원유를 확보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7~8개월 사용할 수 있는 분량이다.
2004년 10개국에서 15개 광구를 보유했던 SK이노베이션은 2007년 베트남에서 3개 광구, 2008년 콜롬비아에서 3개 광구를 추가했으며, 2009년에도 5개 새 광구에 투자했다. SK이노베이션 측은 “최근 5년간 지분 원유 생산량이 3배 이상 늘었고, 석유개발 부문 영업이익이 2배가량 증가했다”고 밝혔다. 2015년까지 지분 원유 보유량을 현재의 두 배 수준인 10억 배럴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원유 10억 배럴은 우리나라가 1년4개월간 사용할 수 있는 분량이다.
전기차 배터리, 이산화탄소 핸드백도 개발SK이노베이션은 소재 부문에서도 일가를 이뤘다. 구자영 사장은 최근 다임러 그룹 메르세데스 AMG의 전기 수퍼카 모델인 ‘SLS AMG E-CELL’의 배터리 공급업체로 선정된 뒤 “이젠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후발주자 꼬리표를 떼어달라”고 말했다. 이 회사는 일찌감치 2차전지 소재인 분리막 시장에 뛰어들어 세계 3위에 올랐다.
‘소재의 강자’ 떠오른 SK이노베이션은 완성품인 전기차 배터리 개발에 나서 결실을 보고 있다. 2009년 10월 독일 다임러 그룹 산하 미쓰비시 후소의 하이브리드 자동차에 장착될 배터리 공급업체로 선정된 데 이어 현대차가 국내 첫 순수 전기차로 양산 예정인 블루온과 기아차의 차기 양산형 전기차 모델에도 배터리를 공급하기로 했다. 특히 메르세데스 AMG의 전기 수퍼카 모델에 대한 배터리 공급은 기술력을 세계에 입증한 것이라는 평가다.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 부품소재부터 최종 제품까지 모든 과정의 기술을 확보해 소재 국산화율을 높이고 시장점유율을 늘려나간다는 복안이다.
이 회사는 또 본격적인 전기차 배터리 양산을 위해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충남 서산시 서산일반산업단지 내 23만1000㎡(7만 평) 부지에 내년 3월 완공을 목표로 연산 500㎿h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생산라인을 짓고 있다. 이는 하이브리드 자동차 약 50만 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원료로 친환경 플라스틱을 만드는 ‘그린 폴(Green Pol)’ 사업은 상업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SK이노베이션 고유의 촉매 기술을 이용해 이산화탄소(44%)와 폴리프로필렌 옥사이드(56%)를 결합해 만드는 그린 폴은 건축 내장재, 인조가족, 식품 또는 제품 포장재, 유리 접착제 등의 원료로 사용할 수 있다. 최근 구 사장은 그린 폴 인조가죽으로 만든 핸드백을 직접 선보이기도 했다. 김동섭 SK이노베이션 글로벌테크놀로지(옛 기술원) 원장은 “2025년 그린 폴 시장이 26조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며 “이산화탄소를 자원화해서 녹색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은 올해 말 목표로 충북 증평에 정보통신 첨단소재로 각광 받고 있는 편광필름과 연성회로원판 공장을 짓고 있다. 편광필름은 LCD 패널 한 개에 4~6개 들어가는 핵심 소재다. 그동안 일본의 후지필름과 코니카미놀타가 세계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해 왔다. 현재 삼성, LG 등 LCD 제조업체들이 전량 일본 수입에 의존해 대일 5대 수입 품목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공장이 완공되면 소재 국산화에 크게 기여할 전망이다. 연성회로원판은 LCD, PDP TV, 휴대전화 등에 사용되는 연성인쇄회로기판의 핵심 소재다.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SK이노베이션 글로벌테크놀로지에서는 그린 콜(Green Coal), 바이오 부탄올 등 40여 개의 신사업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분사로 경쟁력 강화 기대 글로벌 종합 에너지 기업으로 변신하기 위해 SK이노베이션은 사업뿐 아니라 조직을 과감하게 바꿨다. 1월 1일 사업별로 회사를 분할해 출범시켰다. 분할 이후 존속법인인 SK이노베이션(옛 SK에너지)은 SK에너지(석유), SK종합화학(화학), SK루브리컨츠(윤활유)를 자회사로 거느리게 됐다. SK이노베이션에는 E&P(자원개발)과 글로벌테크놀로지만 남았다. SK이노베이션은 독립·책임 경영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핵심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회사를 쪼갰다. 분할을 통해 가벼워진 몸으로 보다 높이, 멀리 날아 보겠다는 전략이다.
분할 이후 석유 자회사인 SK에너지는 기존 정제·마케팅뿐 아니라 트레이딩 부문을 강화해 자체 경쟁력을 높인 뒤 글로벌 파트너십을 맺어 안정적인 사업 모델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SK종합화학은 정제에 의존하는 경향에서 탈피해 기술 기반의 프리미엄 화학 제품으로 승부하기로 했다. SK이노베이션은 글로벌테크놀로지와 E&P 사업을 중심으로 전기차 배터리, 그린 콜과 같은 미래 성장동력을 발굴·추진하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맡는다.
구 사장은 분사 후 “2015년까지 영업이익 5조원의 글로벌 에너지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비전을 밝혔다. 분사한 SK에너지, SK종합화학, SK루브리컨츠와 SK이노베이션 산하의 E&P, 글로벌테크놀로지 5개 사업부를 2015년까지 각각 영업이익 1조원 클럽에 가입시키겠다는 포부다. 5조원은 지난해 영업이익의 두 배를 넘어선 수치다. 분사 이전인 지난해 SK에너지(1조7068억원)와 SK루브리컨츠(2986억원)의 영업이익을 합하면 2조원을 조금 웃돈다.
구 사장은 “지금은 정유사업을 영위하는 SK에너지의 영업이익이 전체 영업이익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지만 5년 후에는 사정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량 생산과 대량 설비로 경쟁하는 과거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기술력을 기반으로 도전해 승부하는 체제로 변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SK이노베이션이라는 회사 이름에 이 같은 꿈과 포부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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