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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SK 회장의 ‘자원부국’ 경영

최태원 SK 회장의 ‘자원부국’ 경영

호주 앙구스 탄광을 방문한 최태원 회장이 지하 400m의 석탄 채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함께 간 관계자는 “얼굴에 석탄가루가 묻은 것을 모를 정도로 열심이었다”고 전했다.

호주 시드니에서 160㎞ 떨어진 앙구스 탄광. SK네트웍스가 지분 25%를 소유한 이 탄광은 연간 350만t의 석탄을 생산한다. 지난 2월 8일 현장 근무자들이 술렁인 ‘사건’이 있었다. 이곳을 방문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직접 지하갱도에 들어가 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현장에 도착한 최 회장은 선뜻 광부 근무복을 집어 들었다. 안전모의 중요성, 랜턴 사용 요령, 비상시 산소 마스크 착용법을 듣더니 다른 사람들이 옷 입는 것을 도와주는 여유까지 보였다. “경험하기 어려운 일인 만큼 이 기회에 탄광에 대해 확실히 공부하자”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광구 입구에 도착한 최 회장은 길게 심호흡을 하고 운반차에 올랐다. 갱도를 따라 30여 분 미끄러져 내려가자 운반차로는 더 이상 전진하기 어려웠다. 다시 걷기를 10여 분, 지표면에서 수직으로 400m 아래에 있는 석탄을 캐는 현장이 나타났다.

최 회장은 석탄덩이를 들고 하루 생산량이 얼마인지, 석탄의 품질 수준은 어떤지, 좋은 석탄을 어떻게 구별하는지 등을 물었다. 3시간여 동안 이곳저곳을 살피고서야 밖으로 나온 그는 “다른 세상을 봤다”며 “많은 공부를 한 신선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바로 직전 일정으로 간 브라질의 노천 철광산에서도 채굴에서 운송까지 전 과정을 꼼꼼히 메모해 현장 근무자들이 긴장했다고 한다.

이런 최 회장의 현장체험은 2007년 10월 페루의 카미시아 가스전에서 시작됐다. 이때도 그는 밀림 한가운데를 직접 돌아다녔다. 수행원들은 그의 작은 몸짓에도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카미시아 가스전은 페루 수도 리마에서 소형 헬기를 타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1시간 이상 날아가야 나오는 아마존 밀림 한가운데에 있다. 풍토병이 심해 현지인도 꺼리는 지역이다.

하지만 예방주사 한 대로 무장한 최 회장은 밀림 깊숙한 곳에서 현장을 자세히 둘러봤다.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아마존 밀림도 오너가 발로 뛰어대기업 오너가 직접 오지에 뛰어들어 사업 내용을 챙기는 일은 흔치 않다. 최 회장은 “자원개발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사업이기 때문에 대주주 경영인이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발로 뛰는 경영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가서 위험한 곳이면 직원들에게도 똑같이 위험하다”는 것이 직접 현장을 방문하는 이유다.

SK그룹은 올해 자원 영토를 넓혀 국가의 부를 늘리겠다는 뜻으로 ‘자원부국’ 경영전략을 새롭게 내세웠다. SK그룹 관계자는 최 회장이 “기업이든 국가든 미래 경쟁력의 원천은 자원이다. 에너지를 책임지고 있는 기업으로서 자원 없이 미래 경쟁력을 기대할 수 없다”며 자원 개발에 대한 투자와 조직 확대를 강하게 주문했다고 전했다.

중국 중심이었던 그의 출장은 남미·중동 지역으로 확대됐다. 올해 초 설 연휴까지 반납하고 스위스-브라질-호주로 이어진 일정을 소화한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1월 30일 브라질 최대 자원기업 EBX그룹의 아이크 바티스타 회장과 만나 자원협력 방안을 협의하고, 곧바로 호주로 가 앙구스 탄광과 LNG 전문기업 산토스를 방문했다.

그는 쉬지 않고 비행기를 탔다. 3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터키를 찾았다. 사우디 국영석유회사 아람코, 쿠웨이트 페트롤리엄의 CEO를 만나 역시 자원 협력과 관련한 얘기를 나누었다. 터키에서는 산업 기반시설 건설에 참여할 수 있는지 검토했다.

SK의 자원부국 경영의 출발은 1970년대 고(故) 최종현 선대 회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종현 회장은 당시 석유 파동을 경험하며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는 ‘석유에서 섬유까지’ 사업의 수직 계열화를 이루겠다는 계획을 세워 73년에 선경석유를 설립한다. 70년대 후반에 제2차 석유파동을 겪고 나서 대한석유공사(현 SK㈜)를 인수하고, 82년에 자원기획실을 설치해 석유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다.



대를 이은 자원부국 의지

이때 최종현 회장은 “회사는 이익의 15% 이상을 매년 석유개발 사업에 투자해야 한다. 설사 실패한다 해도 참여한 직원을 문책해선 안 된다. 석유개발 사업은 1~2년 내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 10~20년 동안 꾸준히 노력해야만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게 석유개발 사업”이라는 말로 자원개발 사업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드러냈다.

열정은 있었지만 시장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83년 미국 코노코사와 공동으로 300만 달러를 인도네시아 카리문 광구에 투자했지만 석유개발에 성공하지 못하고 1년 만에 개발권을 인도네시아 정부에 반납했다. 84년 미국 옥스코사와 함께 아프리카 모리타니 광구 개발에 투자했을 때도 성과 없이 개발권을 돌려줬다. 실패에 지칠 때쯤 북예멘 마리브 광구에서 석유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87년 마리브 알리프 유전에서 하루 15만 배럴 원유 생산에 성공한다. 두드리면 열린다는 진리를 확인한 셈이다.

최종현 회장이 내건 ‘무자원 산유국 프로젝트’의 바통은 아들에게 이어졌다. 자원개발 부문에서는 실패해도 문책하지 않는다는 원칙 역시 그대로 이어받았다. 최 회장은 2004년에 석유개발사업부를 해외자원 개발사업을 총괄하는 R&I(Resource & International) 부문으로 승격하고 자원개발에 공격적으로 투자할 것을 지시했다. 지난해에는 미국 휴스턴에 자원개발 관련 전문 연구기관인 ‘E&P 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석유개발 기술 역량을 강화하고 남미 중심의 석유탐사를 확대하는 플랫폼 역할을 하게 된다.

최 회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언급한 ‘붕정만리(鵬程萬里)’는 붕새를 타고 만리를 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장기 프로젝트인 글로벌 자원개발에 투자하겠다는 최 회장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내수에서 수출기업으로 이미지 변신2011년 SK그룹의 투자계획을 보면 전체 투자액 10조5000억원 가운데 자원개발 예산이 1조7000억원이다. 2004년 1000억원 수준에서 17배로 늘어났다. 오너의 강한 의지에 실적도 상승세다. 자원개발 관련 매출은 2003년 1000억원 수준에서 2010년 1조원을 넘어섰다. 그룹에서 석유개발 사업을 담당하는 SK이노베이션은 최근 5년 동안 지분 원유 생산량이 3배 이상 늘었다. 현재 SK그룹이 보유한 원유량은 5억 배럴가량이다. 회사 측은 2015년 지분 원유 보유량을 현재의 두 배 수준인 10억 배럴까지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6월 최태원 회장이 페루 LNG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알란 가르시아 페루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지난해 SK이노베이션의 수출액은 26조원을 넘었다. 이는 현대자동차의 수출액보다 많은 것이다. 삼성전자에 이어 두 번째로 최근 5년 동안 100조원 규모를 수출한 기록도 세웠다. 내수시장 중심의 한계에서 못 벗어난다는 시장의 비난은 옛말이 됐다.

조승연 HMC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SK이노베이션에 대해 “올 1분기 1조원 가까운 영업이익과 연간 3조5000억원 내외의 이익이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곽진희 SK증권 애널리스트는 SK이노베이션이 저평가됐다며 정유주 가운데 최선호주로 꼽았다.

최 회장은 “세계경제가 함께 성장하고 치열하게 전개되는 국가 간 자원 전쟁을 해결하는 길은 자원 협력이 핵심”이라고 강조해왔다. 자원 국가에 SK의 주특기인 에너지·화학·정보통신·건설로 기여하고, 자원 국가는 SK의 자원 확보에 협조해 서로 상승효과를 낸다는 전략으로 세계를 공략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6월 준공한 페루의 LNG(액화천연가스) 공장은 페루 56·88 광구에서 나오는 천연가스를 가스관으로 끌어온 뒤 액체 상태로 만들어 북미 지역에 수출한다. 생산 규모는 연간 440만t에 이른다. SK이노베이션은 이 사업에 20%의 지분을 참여했다.

SK네트웍스는 지난해 9월 EBX그룹의 철광석 업체 MMX의 수데스테 철광석 광산에 7억 달러를 투자했다. 이 광산에서는 연간 700만t의 철광석이 생산된다.

호주에서는 최 회장이 직접 둘러본 앙구스 광산뿐 아니라 클라렌스, 샤본, 스프링베일 석탄 광구에 1억3000만 달러를 투자해 광구별로 5~25%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이곳에서 얻는 연간 생산량은 200만t이다. 올해 2월에는 SK건설이 19억 달러 규모의 사우디 아람코 와싯 가스플랜트 공사를 수주했다.

국제 무대에서 최 회장의 행보도 SK그룹의 자원부국 경영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최 회장은 2005년 아태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 중국, 페루, 베트남, 러시아, 인도네시아 같은 자원부국 정상들과 만나 에너지 산업에 대해 논의하는 등 오래전부터 적극적으로 민간외교를 펼쳐왔다. 올해 1월에 열린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는 에너지 서밋 세션에 참여해 기술발전 동향 등과 관련해 에너지 기업 CEO들과 의견을 나눴다. 지난 4월 14일 중국 하이난다오에서 열린 보아오 포럼에는 공식 스폰서로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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