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식 경제개방 구도 가닥 잡았다
북한식 경제개방 구도 가닥 잡았다
“평양의 개혁·개방 물결을 차단하라!”
1990년대 중반 북한이 ‘고난의 행군’ 선언을 통해 흔들리던 주민을 다잡으며 경제난을 극복하고자 할 즈음, 세계의 관심은 북한이 언제 어떤 방식의 경제재건 노선을 취하느냐로 모아졌다. 전문가들의 판단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방향은 중국식, 시기는 미정.
그러면서 그들은 북한 지도부가 닫힌 체제를 부분적으로 열되 영토의 심장부까지 자본주의의 바람에 술렁이게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바로 ‘평양의 북한 자주노선 사수’ 의지는 지속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북한 영토의 네 귀퉁이, 즉 평양에서 가장 멀면서 대외개방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곳에 시장경제를 도입해 실험할 것이라는 분석으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15년가량 지난 6월 8일, 북한은 중국과 함께 압록강 하류 황금평(黃金坪)경제지대 개발 착공식을 가졌다. 이 지역은 중국 단둥(丹東)의 압록강 철교에서 강변도로를 타고 하구 쪽으로 12㎞쯤 달려 만나게 되는 평야지대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압록강 하중도(河中島·강 중간의 섬)인데 중국과는 사실상 땅으로 연결되고 북한 쪽에서는 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북한 영토다.
황금평경제지대 개발은 한강의 여의도(8.4㎢)보다 조금 큰 11㎢의 땅에 중국 주도로 외자기업을 유치해 상업센터와 정보산업, 관광문화산업, 현대시설농업, 가공업 등 4대 산업단지를 조성함으로써 고용을 창출하고 궁극적으로는 ‘리틀 홍콩’을 탄생시키는 것으로 짜여 있다. 이 사업이 성공작으로 갈 경우 방향을 압록강 상류 위화도(약 12㎢)로 틀어 경제지대 개발을 가속화할 계획이기도 하다.
소식통들은 북한이 황금평을 중국에 50년간 빌려주고, 중국은 투자 수익금 일부를 떼 임대료로 5억 달러(약 5100억원) 상당의 식량·현물을 제공할 것이란 말을 전하고 있다.
8년 전 실패했던 도로확장 곧 완결지난해 흘러나왔던 ‘북·중 정상회담에서의 100억 달러 규모의 경협 논의’는 아직 설 수준이다. 게다가 황금평 투자사업을 주도하는 중국의 신헝지(新恒基)그룹과 가오징더(高敬德) 이사장의 의향도 아직은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황금평경제지대가 갖는 의미는 상당하다.우선은 이로써 북한은 영토의 네 귀퉁이를 사실상 경제개방특구로 배치했다는 점이다. 1991년 두만강 최하류 인접지역에 나선(羅先:나진·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를 선포했던 북한은 이후 금강산국제관광특구(1999년), 개성공업특구(개성공단, 2002년) 등으로 개방 의지를 구체화해 오다 이번에 황금평특구의 구체적 모습을 내보임으로써 영토 사방의 문호를 개방한 셈이 됐다.
특히 이는 2002년 9월 북한이 ‘신의주경제특구’를 지정하고 초대 장관에 중국인 양빈(楊斌)을 발탁했으나 그해 10월 중국이 양빈을 비리 혐의로 구속해 무산된 이후 근 10년 만에 이뤄진 것이라 의미가 더하다. 북한으로서는 신의주가 평양의 중국 쪽 관문이라는 점에서 좀 외진 황금평을 특구로 개발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머지 하나는 황금평특구로 인해 2007년 이명박 대통령이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나들섬 프로젝트(강화도 북쪽과 교동도 동북쪽의 한강 하구에 약 900만 평의 인공 섬을 조성, 남북한 경제협력을 위한 특별구역으로 건설한다는 계획)가 완전히 물 건너갔다는 사실이다. 특히 황금평은 개성공단 활성화에도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더한다.
이뿐만 아니라 북한은 황금평특구 착공 다음날인 6월 9일, 나선자유경제무역지대에서 다른 행사를 하나 가졌다. 일부 언론은 이를 나선특구 착공식이라고 보도했지만 그것은 오류이며, 정확히는 중국 훈춘(琿春)과 나선을 잇는 도로망 개·보수 및 확장사업에 대한 뒤늦은 세리머니 정도로 이해함이 옳다.
나선자유경제무역지대는 창춘(長春)~지린(吉林)~투먼(圖們), 일명 창지투 개발 프로젝트와 연계해 북한을 성장시키는 카드의 핵심이다. 중국으로서는 나선을 통해 동해로 직접 빠지는 출구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강조되는 지역개발사업이기도 하다.
문제는 훈춘~취안허(圈河)~원정리~나선으로 이어지는 93㎞의 길(특히 원정리~나선 53㎞ 구간)이 일부 비포장과 포장의 부실 등으로 그동안 제구실을 못했다는 점이다. 이를 먼저 간파한 중국 옌볜(延邊)자치구의 이철호 선호기업집단 총사장은 이미 1993년에 사비를 들여 도로 포장공사에 나섰다가 재원 부족으로 도중하차한 이후 진척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해 중국 지린성 정부의 지원을 받은 훈춘시 둥린(東林)경제무역유한회사, 랴오닝(遼寧)성의 지원을 받은 촹리(創力)그룹 등 3개사가 참여해 자본과 설비를 투입, 거의 새 길을 닦다시피 한 수준으로 공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올해 말 포장 및 확장공사가 매듭되면 나선특구는 중국 창지투 연계공단으로 각광 받을 여지가 많다. 현재까지 나선특구에는 200여 개의 중국 기업이 진출해 3억7000만 유로(약 5800억원) 이상 투자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북한의 이번 나선특구 행보는 도로 개·보수 작업을 계기로 새 활력을 부여하려는 계산이다. 특히 북한은 얼마 전 맺은 ‘조·중 라선경제무역지대 공동개발’ 요강에 근거, 나선특구에 원자재공업, 장비공업, 첨단기술공업, 경공업, 서비스업, 현대 고효율 농업 등 6대 산업을 육성할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릴 필요도 있는 터였다. 이런 흐름을 타고 최근에는 중국의 이치(一汽)자동차 등 대기업들도 투자를 고려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남쪽 좌우 특구는 활력 잃어가반대로 북한 영토의 남단 좌우측 개방특구는 에너지를 잃어가는 모습이 확연하다.
개성공단은 지난해 5·24 조치(천안함 사건과 관련, 우리 정부가 취한 남북경협 전면 중단 조치)로 현상유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당초 1단계 100만 평에 필지에 순차적으로 220개 기업이 모두 입주해 활기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됐지만 현재 122개 기업, 4만5000명 전후의 근로자가 생산활동에 임하고 있다는 게 공단 측 잠정 집계다.
향후 전망도 그리 밝지 못하다. 정치·군사적 현안과 경협을 분리해 개성공단에 활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 현재로선 없어 보인다.
금강산국제관광특구 사정은 악화일로다. 6월 초 북한은 현대그룹의 금강산 관광 독점권을 제한하고 북측 지역을 통한 금강산 관광을 가능하게 하는 법을 제정, 한국뿐 아니라 외국 기업과 개인에게도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앞서 4월 북한은 금강산국제관광특구에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하겠다고 발표했다.
쉽게 설명하면 이는 현대그룹에 대한 독점적 사업권을 폐기처분하고 북한이 독자적으로 금강산사업권을 갖고 운영하겠다는 의미다. 이미 북한은 지난해부터 중국 여행사를 통해 금강산단체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지만 숫자는 월 200명이 넘지 않는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북한이 금강산 지역에 있는 현대그룹의 자산을 중국 기업에 매각할 것이라는 얘기까지 흘러 다닌다.
결국 변수는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피격사건 이후 만 3년이나 중단된 금강산관광사업이 재개의 실마리를 어떻게 찾아내느냐는 점이다. 우리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북한 당국의 공식 사과 및 북핵 문제 해결이 걸림돌인데 이에 관한 한 현대그룹이 독자적으로 할 일은 거의 없다.
정리하면 북한은 황금평특구 착공으로 개방의 4대 축을 구축한 셈이 됐다. 영토의 핵심부를 피한 변방의 시장경제체제가 북한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변화시킬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지금 미약해 보이는 바람이 언젠가 북한 전역을 휩싸면서 경제 정상화는 물론 체제변화를 초래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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