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ILM] 앨런 그린스펀의 ‘결함’

2008년 가을 세계경제가 만신창이가 되면서 금융 시스템 전반에 공황이 확산됐다. 당시 앨런 그린스펀 전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의회에 나가 상상하기 힘든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의 세계관에 ‘결함’이 있어서 미국 역사상 최악의 신용위기를 예견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금융위기의 발단을 다룬 데이비드 싱턴의 새 다큐멘터리 ‘결함(The Flaw)’은 그렇게 시작된다. 지난주 런던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최근 몇십 년 사이 미국 자본주의의 성격이 변하면서 불평등이 사회안정을 흔들 만큼 심화되고 자유시장에 뛰어난 자율조정 능력이 있다는 그릇된 믿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줬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결함’이 주로 주택시장에 초점을 맞춰 월스트리트를 비판하는 강도는 ‘인사이드 잡(Inside Job)’보다 훨씬 약하다. ‘인사이드 잡’은 2010년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찰스 퍼거슨의 다큐멘터리다. 하지만 두 영화가 묘사하는 그린스펀의 역할은 비슷하다. 바로 미국경제 실패의 많은 부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뉴스위크가 워싱턴 DC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아가 인터뷰를 했다.

하지만 그린스펀을 겨냥한 비판이 계속 쏟아지는 건 상당부분 그의 FRB 시절 업적보다 최근의 정치적 논평 때문이다. 그는 2008년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지만 자유방임형 경제가 옳다는 굳건한 믿음은 대체로 흔들림 없다. 그는 정부의 경기부양책과 최근의 금융규제를 반대한다. 의회는 장기적인 재정지출과 복지제도의 미래를 둘러싸고 정쟁을 계속한다. 이런 상황에서 바로 그런 완고한 자유방임주의가 비판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런 탓에 그의 유산에 다시 조명이 비춰진다.
5년 전 그린스펀이 은퇴할 당시 그의 명성은 흠잡을 데 없는 듯했다. 그는 한때 급진적인 자유방임주의 저술가 에인 랜드의 제자였다. 따라서 90년대 초 그가 보수적인 이념으로 FRB를 이끌어가리라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대(버클리)의 경제학자 브래드 드롱에 따르면 뚜껑을 열고 보니 그는 실용주의자이자 대단히 성공적인 기술관료였다. FRB의 두 가지 우선적인 과업 중 하나가 물가안정과 고용확대다. 1987~2000년 양 분야에서 그린스펀은 뛰어난 업적을 올렸다고 그의 친구, 전 동료 심지어 비판자까지 인정했다. “앨런 그린스펀이 의장을 맡은 기간 동안 전례 없는 성장과 물가안정을 누렸다”고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이 말했다.
그린스펀이 의장으로 일한 첫 10여 년 동안 잠재적인 재앙이 잇따르기도 했다. 하지만 1987년 주가폭락으로부터 1990년대 후반 아시아 외환위기에 이르기까지 그는 타고난 능력에 운까지 따라주며 미국경제가 좌초되지 않도록 능숙하게 이끌어 갔다. “엄청난 찬사를 받을 만하다”고 후버 연구소 선임 연구원으로 그린스펀의 가장 저명한 비판자 중의 한 명인 존 테일러가 말했다.
한동안 칭찬이 계속됐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하지 않은 일까지 그의 공으로 돌렸다. 한번은 어떤 여성이 다가와 원래 회사가 지원하는 기업연금 401(k)에 대해 그에게 고마움을 나타냈다고 그린스펀은 돌이켰다. 2000년이 시작될 무렵에는 그린스펀과 호황기 그의 역할을 둘러싸고 신격화가 시작됐다. 찬사가 얼마나 거창했던지 온라인 매체 ‘더 어니언’은 2001년 “비명을 지르며 몰려든 일본 여학생들로 그린스펀의 버스 전복”이라는 제목의 풍자기사를 실었다.
요즘 그린스펀에 관한 우스갯소리는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다. “그는 신 같은 존재에서 모든 일을 망친 인물로 전락했다”고 FRB 부의장을 지낸 앨런 블라인더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교수가 말했다. “둘 다 지나친 과장이다.”
더 진지한 비판 중에는 억지에 가까운 주장도 있다. 2000년대 초 FRB의 저금리 정책에 힘입어 투자자들이 과도한 위험을 부담하게 됐다는 비판이 많이 제기됐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당시는 분명 디플레이션(통화수축)을 우려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금융시장 붕괴를 두고 월스트리트의 지나친 탐욕을 추궁하는 대신 FRB의 저금리 정책에 많은 책임을 돌린다면 실수로 집 뒷문을 열어둔 사람을 잡아넣고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해 모든 사람을 벗겨먹은 도둑을 용서해주는 격이다.

그린스펀을 둘러싸고 별의별 얘기가 많지만 이번 금융위기에서 특이한 점은 사기의 증거가 상당한데도 월스트리트의 사기꾼들이 거의 기소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규제 분야에선 그린스펀이 많은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결함’은 경제사를 아주 날카롭게 분석하면서도 이 부분은 대체로 스쳐가듯 언급했다. FRB는 금융시스템의 감독을 담당하는 주요 연방기관 중 하나다. 모두가 어느 시점엔가 실수를 했지만 아마도 경제에 관한 한 미국에서 그린스펀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은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일이 대단히 잘 풀렸다”고 FRB 부의장을 지낸 도널드 콘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연구원이 말했다. “우리는 현실에 만족했다. 우리나 그나 자만에 빠졌다.” 실제로 그린스펀이 수십 년에 걸쳐 광적으로 규제를 반대한 탓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한”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블라인더가 말했다. 몇 달 전 미국 정부의 금융위기위원회가 결론지었듯이 FRB는 주택담보대출시장에 사기가 판친다는 경고를 들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실상 위기를 맞기 10여 년 전에 의회는 FRB를 성장하는 비우량주택담보대출 시장의 일차 감시기관으로 지정했다.
이 같은 규제 측면에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린스펀의 유산은 전체적으로 플러스라고 보는 경제학자가 많다. 초창기의 성공 덕분이다. 그리고 콘과 블라인더 같은 일부 학자는 금융정책에 관한 그의 전반적인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실상 가장 혹독한 비난 중 일부는 그의 실제 경제운용 성과보다는 도드-프랭크 금융규제법안에 대한 그의 반대의견과 더 관계가 깊다. 존 캐시디는 뉴요커 잡지의 블로그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럼 다음은 뭔가?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이 전후 계획을 공격하기라도 하려나?”
인터뷰를 하는 그린스펀의 목소리는 신경질적이었으며 짙은 테 안경 너머 그의 눈은 지쳐 보였다. 그는 자신의 유산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했다. 대신 신중하고 장황하게 이야기하며 자신을 향한 비판에 초연한 듯 보이려 애썼다. “누구나 실수는 하게 마련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그가 말했다. “그러나 큰 부담을 느끼지는 않는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그의 억양에 마음의 동요가 묻어났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민감하다. 그러나 비판은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다.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는 정도는 나도 분명히 알며 그런 판단에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반항심(그가 지닌 이념의 결함만큼이나) 때문에 그의 실제 유산이 계속 빛을 못 보는지도 모른다. 그의 유산은 금융위기 외에도 다양한 측면에서 평가 받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번역 차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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