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mpany] 애플 이어 퀄컴까지 잡은 작은 거인

국내 반도체 패키지 업체 ‘시그네틱스’가 세계 통신용 칩세트 분야 1위 기업인 미 퀄컴에 올해 7월 1일부터 반도체 패키지 제품을 공급한다. 국내 반도체 패키지 업체가 퀄컴에 제품을 공급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시그네틱스 김정일(59) 사장은 “퀄컴에 공급하는 반도체 패키지 제품 규모는 연 1720만 개, 금액은 연 156억원”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패키지란 제작이 완료된 칩에 전기연결을 하거나 칩이 외부 충격에 손상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반도체 제조업체로부터 칩을 받아 패키징한 뒤 공급한다. 반도체 패키지 작업을 하지 않은 칩에는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 깨질 가능성도 크다. 그래서 반도체 칩에는 PCB(인쇄회로기판)를 붙이고 포장해야 한다. 이런 공정을 거친 제품이 반도체 패키지다. TV나 PC에 장착된 반도체 칩은 그냥 칩이 아니라 패키지 제품이다. 시그네틱스 손정환 부장은 “반도체 칩의 완제품이 패키지 제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애플 아이폰4에 제품 단독 납품시그네틱스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역사가 있는 기업이다. 국내 최초로 외국 업체가 투자한 반도체 기업이 시그네틱스다. 1966년 미 시그네틱이 설립했다. 이듬해인 1967년 시그네틱스의 경영권은 글로벌 기업 필립스로 넘어갔고, 시그네틱스는 필립스에 납품되는 반도체 제품을 패키징했다. 그러던 1995년 필립스가 한국에서 철수하자 이번엔 거평그룹이 인수했다. 이때부터 시그네틱스의 얄궂은 경영사가 시작됐다. 거평그룹은 시그네틱스를 인수한 지 3년 만인 1998년 외환위기 폭풍을 맞고 해체됐다. 시그네틱스도 워크아웃(기업재무구조개선) 기업에 선정돼 3년 동안 채권단의 관리를 받았다.
대표 채권단인 산업은행의 공개매각으로 시그네틱스는 2001년 영풍그룹에 인수됐지만 역경은 계속됐다. 때마침 글로벌 반도체 경기가 침체됐기 때문이다. 시그네틱스는 뼈를 깎는 인력 구조조정을 감수해야 했다. 워크아웃 약정에 따른 차입금 상환을 위해 회사의 상징이었던 서울 염창동 공장까지 매각했다. 2003년 6월에는 화의절차에 돌입하기도 했다. 2007년 6월 4년 만에 화의를 졸업한 시그네틱스는 그제야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장형진(65) 영풍그룹 회장은 역경의 세월을 함께 헤쳐나간 시그네틱스 직원에게 ‘성장’이라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는 “시그네틱스를 성장시키려면 전문가형 CEO가 필요하다”고 결론내렸다. 서둘러 CEO를 찾았다. 수개월 동안 사람을 수소문하고 다녔다. 그러던 중 한 교수가 추천한 CEO가 있었는데 바로 김 사장이었다.
그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반도체 패키지 전문가다. 1981년 미 IBM 왓슨연구소에 들어간 뒤 10여 년간 반도체 패키지를 연구했다. 1993년에는 반도체 패키지 업체 아남산업(현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의 글로벌 품질보증담당 부사장을 지냈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반도체 패키지 장비기업 파이컴(현 TSC멤시스)의 총괄사장을 역임했다.
2009년 1월 두 사람은 영풍그룹 회장실에서 처음 만났다. 장 회장은 김 사장에게 “시그네틱스를 반석 위에 올려 달라”며 CEO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장 회장은 또 다른 이유도 들었다. “시그네틱스를 통해 영풍그룹 IT계열사도 함께 키우고 싶습니다.” 영풍그룹은 서점 업체로 알려져 있다. 영풍문고 때문이다. 하지만 시그네틱스를 비롯해 인터플렉스(PCB제조업체)·코리아써키트(PCB제조업체)·영풍전자(전자부품업체)·테라닉스(PCB전문업체) 등 IT계열사도 많다.
김 사장은 장 회장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수락 이유는 간단했다. 워크아웃·화의절차 등 숱한 역경을 훌륭하게 극복한 직원들의 힘을 믿었다. 기술력을 보완한다면 글로벌 반도체 패키지 업체와 겨룰 수 있다고 믿었다.
김 사장은 2009년 2월 취임한 직후 사내 분위기부터 바꿨다. 직원들에게 넥타이를 풀도록 했다. “시그네틱스 직원들은 우여곡절을 많이 겪어서인지 스트레스가 많았고, 무언가 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어요. 그것부터 없애는 게 관건이었죠. 넥타이를 처음 풀자고 했을 때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어요. 지금은 너무 자유로워서 걱정입니다.(웃음)”

분위기만 바꾼 게 아니다. 연구소 인력은 45명에서 80명으로 늘렸다. 연구영역은 반대로 좁혔다. 개발할 수 있는 기술에만 자금과 인력을 투입한 것이다.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시그네틱스 연구진은 실패를 거듭하던 플립 칩(flip chip)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기존엔 반도체 칩과 PCB를 얇은 와이어로 연결했는데, 플립 칩 기술은 이를 사용하지 않는다. 플립 칩 기술로 만든 제품은 그래서 가볍고 효율이 높다. 플립 칩 반도체 패키지 제품을 대량 양산할 수 있는 국내 업체는 시그네틱스가 유일하다.
2개 이상의 칩을 쌓는 스택 다이(stacked die) 기술도 김 사장이 취임한 후 개발됐다. 시그네틱스는 1.2㎜ 두께의 반도체 패키지 제품 안에 칩을 8개까지 쌓을 수 있다. 세계 최고 기록이다. 쌍방향 소음제거(noise removal) 기술도 마찬가지다. 이 기술로 만든 반도체 패키지 제품은 애플 아이폰4에 독점 공급된다. 공급 규모는 연 9000만 개, 금액은 연 168억원이 넘는다.
기술력 향상은 시너지 효과도 냈다. 덩달아 품질이 개선된 것이다. 시그네틱스의 불량제품 비율은 현재 0.03%에 불과하다. 리드타임은 3일로 줄었다. 모두 글로벌 기업 수준이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도 이 회사의 품질은 인정한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올 1분기 실시한 R & R(role & responsibility) 평가에서 이 회사는 국내 반도체 패키지 업체 중 1위에 올랐다. 지난해 4분기에 이어 2분기 연속 1위다. R & R 평가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에 제품을 공급하는 업체의 기술력·가격·불량률을 종합적으로 따져 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시그네틱스 반세원 CFO는 “김 사장이 취임하면서 기술개발에 거듭 실패해 의기소침하던 연구소에 활력이 돌았다”며 “시그네틱스의 기술력과 품질이 향상된 데는 김 사장의 공이 컸다”고 말했다.
글로벌 기업 퀄컴에 시그네틱스의 제품이 공급된 비결은 기술력과 품질이다. 실제로 퀄컴은 시그네틱스가 미 반도체 시스템 업체 애서로스에 공급하던 FBGA(Fine Ball-Grid Array) 패키지 품질에 반해 제품공급을 먼저 제안했다. FBGA는 반도체 칩에 붙어 있는 핀(가시처럼 생긴 것) 대신 작은 볼을 장착해 전기가 흐르게 하는 하이테크 기술이다. 김정일 사장은 “FBGA 반도체 패키지 제품에 이어 플립 칩으로 만든 제품을 퀄컴에 공급하기 위해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이를 진짜 승부로 본다. “퀄컴에 플립 칩 반도체 패키지 제품을 공급하는 업체는 글로벌 기업 엠코와 스테치 칩팩입니다. 두 회사와 경쟁해 공급권을 따내야 하죠. 승부가 가능할 것 같아요.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에서 우리가 낫기 때문입니다.”
장형진 회장이 영입한 김정일 사장김 사장의 노력으로 시그네틱스의 실적은 해마다 개선된다. 그가 취임하기 직전인 2008년 1890억원을 기록했던 시그네틱스의 매출은 2010년 2387억원으로 26% 커졌다. 당기순이익은 같은 기간 14억원에서 196억원으로 13.9배가 됐다. 반세원 CFO는 “올해 사상 최고 실적을 기록할 수 있을 것”이라며 목표 매출액을 3200억원이라고 밝혔다.
김 사장은 “6월 말부터 일본 소니·도시바, 대만 마크로닉스, MS(마이크로소프트)의 칩 제조사인 미 TI와 반도체 패키지 제품 공급 관련 협상을 진행할 예정”이라며 “알찬 열매를 맺어 아시아·북미시장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겠다”고 말했다.
김 사장의 꿈은 시그네틱스를 ‘직원과 그들의 가족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기업’으로 만드는 것이다. “2015년까지 매출 5000억원대 중견기업으로 키우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그가 뛰어넘고 싶은 기업은 IBM이다. 시그네틱스 CEO를 수락하면서 장형진 회장에게 밝혔던 목표도 이것이었다. 지금까지 성적은 합격점이다.
이윤찬 기자 chan487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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