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판매 부진한 한국 찾은 도요다 아키오 사장
[issue] 판매 부진한 한국 찾은 도요다 아키오 사장
세계 자동차 업계 1위인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아성이 흔들리고 있다. 지난해 미국발 리콜 사태를 시작으로 이후 1000만 대에 달하는 리콜이 이어졌다. 올해는 지난 3월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부품 공급이 제대로 안 돼 석 달간 일본 내 생산이 전년 같은 기간 대비 60%에 그쳤다.
이런 두 가지 악재가 겹치면서 올해는 3년 만에 세계 자동차 판매 1위를 미국 GM에 내주고 2위로 주저앉을 거라는 예상도 나온다. 지진 여파가 더 심해져 자동차 생산이 위축되면 폭스바겐그룹에 이어 3위까지 추락할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올 정도다. 1949년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인한 경제위축에 과잉 생산이 겹쳐 부도를 낸 이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6월 초 국내 자동차 업계는 도요타의 아키오 사장의 전격 방문이 화제에 올랐다. 그는 도요타 그룹 창업 일가의 3세다. 도요타자동차를 창업한 기이치로의 장손자이자 현 쇼이치로 명예회장의 장남이다. 아키오는 6월 4일 주말을 이용해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역대 최악의 판매부진으로 딜러들이 동요한다고 도요타코리아 나카바야시 히데오 사장이 요청해서다. 나카바야시 사장은 아키오 사장이 중국 및 해외영업 담당 부사장일 때 직접 모셨던 인연도 있다. 그는 2006년 해외영업 총괄 부사장 시절 서울에서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과 오찬을 하기도 했다.
올해 도요타코리아는 2001년 한국 진출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글로벌 리콜 영향으로 판매가 급감해 첫 적자를 냈다. 설상가상으로 올해는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차량 공급이 제때 안 돼 1∼5월 3737대를 팔았다. 전년 대비 13%나 감소한 수치다. 더구나 렉서스는 공급 부족으로 차가 없어 못 팔고 있다.
연 매출 400조원의 도요타그룹을 이끄는 아키오는 1년 스케줄이 꽉 차 있다. 이번에도 주말을 이용해서야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는 방한 기간 동안 어려움에 처한 딜러와 도요타코리아 직원들을 격려했다. 놀랍게도 수행원은 오직 세 사람이었다. 비서와 홍보담당, 아시아 판매부장이 동행했을 뿐이다. 한국 재벌 회장의 떠들썩한 해외 출장과 비교되는 모습이다.
도요타 딜러 관계자는 “올해 유럽 수입차에 급격하게 밀려 도요타의 존재감이 위태로운 상황”이라며 “미국에서 만든 다양한 도요타 모델을 한국에 조속히 출시해 달라는 의견을 아키오 사장에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이에 아키오는 “그동안 한국 시장에 대해 자만했다.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다. 이어 “도요타는 딜러와 동반성장한다. 30년 미래를 보고 사업하자”며 “딜러와의 신뢰 관계는 도요타의 역사이자 뿌리”라고 창업 정신을 강조했다.
1927년 도요다방적기의 자동차사업부(당시 벤처기업)로 시작한 도요타는 1940년대까지 적자가 이어져 언제 망할지 몰랐다. 창업자인 기이치로 사장은 “회사가 망하더라도 딜러와 부품업체까지 함께 망해서는 안 된다. 3개월 어음 결제 대금은 꼭 준비해 놔야 한다”며 경리부의 다짐을 받곤 했다. 이처럼 도요타는 처음부터 딜러·부품업체와 돈독한 신뢰를 쌓아갔다.
그는 납품업체에 대한 철학도 남달랐다. 도요타의 생산대수가 증가하더라도 불필요하게 구매처를 늘리거나 가격 인하에 눈이 멀어 납품업체를 쉽게 변경하지 않도록 했다. 항상 일정하고 안정된 거래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부품업체를 전문화할 수 있는 ‘육성과 지도’를 강조했다.
“자동차 회사는 자동차를 잘 조립하는 것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특히 협력업체와 함께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과 달리 물건을 만드는 것이다.”
그가 남긴 이 말은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도요타가 납품업체와 상생하는 유전자로 계승돼 도요타 생산 시스템을 완성하는 밑거름이 됐다.
도요타코리아 요청으로 방한도요타는 1949년 노사분규 및 판매 악화로 파산했다. 이때 도요다 일가는 주식 대부분을 금융권에 내놓고 돈을 빌려야 했다. 이때는 딜러들이 나섰다. 어음 결제를 연기하며 도요타를 도왔다. 이후 도요타는 ‘판매의 신’으로 불리는 가미야 쇼타로가 사장을 맡고 한국전쟁 특수까지 겹치면서 60년간 흑자를 이어왔다. 물론 당시 도요타 딜러들이 지금껏 일본 지역 판매를 장악하고 있다.
이런 창업자의 정신은 도요타 판매점에도 전승돼 내려온다. 판매점마다 붙어 있는 액자에는 ‘첫 번째 소비자, 두 번째 판매자, 세 번째 생산자’ 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판매점에서 철저히 소비자의 요구를 조사해 생산 부문에 전달하라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이 글은 ‘판매의 신’으로 불렸던 쇼타로 사장(도요타판매 사장 역임)이 남긴 말이지만 창업자 기이치로의 정신이 서려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오늘날 도요타를 대표하는 경쟁력인 고객만족과 판매(마케팅) 우선주의는 기이치로의 창업 이념에서 시작됐음을 엿볼 수 있다.
2008년 여름, 도요타의 국내 딜러 모집은 재계의 화제였다. 대기업들이 앞다퉈 도요타 딜러를 신청했다. 결과는 LS·효성·신라교역 등 대기업들이 선정됐고 각각 1000억원 이상을 투자해 전시장을 냈다. 하지만 올해 판매 부진으로 모두 적자를 면치 못할 지경이다. 그동안 수입차 업체는 판매가 좋을 때 본사 경영진이 방한하는 게 관례였다. 어려울 때 최고경영자가 현장을 찾아 딜러와 신뢰를 다지는 도요타의 창업 정신은 ‘상생’이 이슈인 지금 한국 대기업에 새로운 교훈으로 다가온다.
창업 일가의 정신, 아키오의 역할은?아키오는 게이오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27세에 도요타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미국 도요타로 건너가 GM과 합작한 누미공장 부사장을 맡았다. 2000년 44세에 임원으로 승진해 중국총괄, 구매, 해외 및 국내 영업본부장을 역임한 뒤 2009년 6월 사장에 올랐다. 1995년 도요다 다쓰로(쇼이치로 명예회장의 동생) 사장이 물러난 이후 14년 만에 창업 일가에 경영권이 돌아온 것이다.
당시 도요타는 금융위기로 판매가 급감한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도요다 창업 일가의 경영 복귀는 그룹의 구심력을 높이는 또 다른 승부수였다. 현재 도요다 일가는 주식 지분율 2%로 오너가 아닌 창업 일가다. 이들은 100년 그룹 역사에 단 한 번도 비자금 사건이나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위기 때마다 그룹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도요타는 2007년 2조2703억 엔(약 30조원)의 영업이익을 냈다가 불과 1년 만인 지난해 4610억 엔(6조2000억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적자는 1950년 이후 처음이다.
아키오 사장은 도요타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주로 미국 도요타에서 30대를 보냈다. 그는 스포츠카를 좋아하고 자동차 레이싱을 즐긴다. 도요다 일가는 자손 가운데 능력 있는 사람만 도요타에 입사시켜 경쟁하는 룰을 지켜온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처럼 창업자의 자손 모두가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
1990년대 말 한국에서 IMF 관리체제를 불러온 원인 중 하나는 경쟁력 없는 2, 3세의 승계였다. 도요다 가문은 능력이 떨어지는 친족은 경영에서 배제한다. 이런 원칙이 창업 일가 내부에서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 특이한 점은 도요다 일가의 경우 경영권을 놓고 싸우거나 내 몫을 떼어 달라며 그룹에서 분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친족이 모두 결집해 그룹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부분이다.
아키오는 사장 취임과 함께 전 세계 36만 명의 도요타 직원들의 구심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올해 6월 23일로 임기 3년째로 접어들지만 금융위기와 리콜에 따른 판매 부진, 지진으로 인한 생산감소 등 위기를 해결하는 명확한 해답과 비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더구나 그가 사장에 오른 이후 도요타에서는 1960년대 ‘3K 악덕(惡德)’이 부활했다는 말도 나온다. 과거 3K는 ‘게리(경리), 고바이(구매), 고베상대’ 출신이 주요 요직을 장악한 것을 비꼬는 말이었다. 지난해 퇴직한 도요타의 한 간부는 “과거 3K 가운데 고베상대 대신 아키오 사장의 출신교인 게이오대학이 새로운 K로 등장했다.
이들 출신이 주요 보직을 독식하면서 도요타의 위기를 아키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부 비판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아키오는 사장 취임 이전 구매본부장과 재무 담당을 경험했다.
필자는 그와 여러 번 만났다. 처음 만남은 2005년 중국담당 본부장 시절 중국에서다. 2009년 10월 도쿄 모터쇼에서는 사장 취임 이후 처음 만났다. 당시 화려한 조명 속에 등장한 그는 “와타시와 도요다노 혼모노데스(저는 진짜 도요다입니다)”라며 농담을 던지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금융위기 이후 도요타의 전략을 묻자 “하이브리드카에 주력해 판매를 늘리고 이익을 내겠다”고 답하기도 했다.
도요타의 현재 의사결정에는 아키오 사장 외에 사장을 지냈던 조 후지오 회장, 상담역으로 물러난 오카베 히로시 전 회장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인사나 판매 등 일반 사항은 아키오 사장이 결정하지만 대규모 투자나 이번 리콜과 같은 중대 결정은 3인 합의 이외에 쇼이치로 명예회장이 최종 결정한다. 이런 섭정 체제 때문에 아키오의 역할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동정론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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