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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 거실 줄여 놀이 공간을 만들다

[Art & Culture] 거실 줄여 놀이 공간을 만들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리빙엑시스 사무실 나무계단에 앉아 포즈를 취한 최시영 대표.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 리빙엑시스는 서울 성북동 언덕배기에 있다. 이 회사 최시영 대표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겸 건축가다.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 경기도 파주 헤르만하우스, 부산 퀸덤 등 고급 주택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맡았다.

올 초 경기도 청평댐에 위치한 갤러리 ‘류미재’로 세계 3대 디자인상 중 하나인 ‘IF 디자인상 커뮤니케이션상’도 수상했다. 절벽에 가까운 경사면에 붙어 있는 듯한 이 건축물은 자연 속에서 숨바꼭질하는 느낌을 준다.

6월 10일 리빙엑시스 사옥을 찾았다. 최근 유행하는 MBC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의 음악을 틀어놓고 10여 명의 직원이 설계 도면을 그리고 있었다. 최 대표는 건물 1, 2층을 오르내리며 작업을 점검했다. 사무실은 월요일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바쁘다고 했지만 차분한 분위기였다. 갤러리 같은 사옥 내부 인테리어 때문인 듯하다.

3년 전 2층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사무실은 아틀리에 같은 느낌을 준다. 1층엔 자연으로의 회귀 본능을 드러내는 초현실주의 작가 제리 율스만의 사진 작품 3점이 걸려 있다. 이 작가는 독특한 아날로그 사진 합성 기술로 작업하기로 유명하다.

국내외 미술품과 빈티지 가구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다. 독일 부부 조각가 쿠바흐-뷜름젠과 쿠바흐-크롭의 대리석 오브제, 프랑스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리에그르의 소파 등이 그것이다.

최 대표가 착용한 안경도 독특했다. ‘Opt Galle’라는 프랑스 브랜드다. 렌즈의 가로·세로 길이가 39㎜·27㎜에 불과한 작은 안경알이 눈에 띈다. 그는 자신의 얼굴형에 잘 어울리고, 코받침의 착용감이 좋아 애용한다고 했다. 요즘 트렌드인 알이 큰 디자인과는 정반대다. 국내 포털 사이트에서 ‘최시영 안경’이라고 검색하면 그의 안경 낀 사진이 블로그에 포스팅된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의 팬들이 올려놓은 것이다.

그는 타자와 마우스보다 연필과 자를 선호한다. 컴퓨터로 도면을 그리기보다 직접 드로잉한다. 기계치라서다. 책상엔 그에게 온 e-메일을 출력해 놓은 종이가 수북이 쌓여 있다. 직원이 출력해 가져다 놨다. 유일하게 문자만큼은 빨리 작성한다고 자랑했다. 손가락 움직임을 스마트폰도 못 따라올 정도라고 했다. 그는 자신을 ‘아날로그형 디자이너’라고 소개했다.



쓸모없는 공간 남기는 것 못 참아그는 해외 디자인 박람회에 가 본 지도 꽤 됐고, 인터넷으로 정보 검색도 잘 안 한다. 요즘엔 인문학 서적을 읽으며 디자인 영감을 얻는다. 최근엔 네덜란드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 를 읽고 있다. 인간의 삶에서 노동만큼 놀이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담은 책이다. 그는 저자의 생각이 자신의 작업 방식과 비슷하다고 했다. 최 대표는 국내 최초로 주택에 엔터테인먼트 개념을 도입했다.

몇 평형에는 방이 몇 개, 화장실이 몇 개라는 한국인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 주택에서 취미 생활을 할 수 있는 패밀리 룸을 도입한 게 시작이었다.

“요즘 넓은 거실에서 아버지랑 아들이 TV 보는 집 거의 없습니다. 각자 내 손안의 TV(스마트폰)를 갖고 다니는 시대니까요. 넓은 거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죠.” 넓은 거실을 줄이고 음악 감상실, 서재 등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는 방들을 만들었다. 2002년 완공된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가 대표적이다.

그는 미국 건축가 ‘루이스 칸’을 존경한다. 이 건축가는 작업할 때마다 벽돌 한 장을 든 채 질문한다고 한다. “넌 어떻게 쓰이길 원하니?”라고. 최 대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디자인이 쓸모없는 공간이 돼버리는 것을 끔찍하게 여긴다. 그가 업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1. 경기도 청평에 위치한 갤러리 류미재. 2. 경기도 파주에 있는 헤르만하우스. 3. 모로코 리야드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인테리어. 창원 더 시티 세븐 자이에 적용했다.

최 대표는 주택 디자인에 모로코 리야드 문화를 도입했다. 리야드에는 ‘눈높이를 맞춰 대화해야 진심을 나눌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는 소파를 상대적으로 낮게 만들고, 가운데에 작은 테이블을 놓는 등 인테리어에 리야드 정신을 반영했다. 이는 사람 간의 거리가 좁아져 자연스럽게 가족 간 스킨십을 유도하는 효과를 낳는다. 부산 퀸덤, 창원 더 시티 세븐 자이가 대표적이다. 두 아들을 둔 그는 서울 한남동 자택도 모로코 스타일로 꾸몄다.

그는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아트 디렉터로도 활동했다. 1990년대 말 평택 북시티, 인천공항의 아트 디렉팅 등에 참여했다. 현재는 2012년 여수 세계박람회 돌산지구 내 웰컴센터, 테라스하우스, 콘도미니엄 등의 작업을 맡았다.



다른 설계사 세 배 가격 불러도 줄 선다“전 운 좋은 사람입니다. 시대를 잘 타고났죠. 물론 첫째 아들이 태어나기 1주일 전에 7억원 상당의 부도를 맞아 알거지가 된 적도 있지만요.(웃음)”

최 대표는 현찰을 먼저 건네주지 않으면 작업에 착수하지 않는다. 시공도 안 한다. 어음을 못 막아 부도를 맞은 이후부터다. 당시 분만실에 들어간 아내를 기다리며 산부인과 병동을 울면서 빙빙 돌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됐다.

부도 1년 만에 어음을 다 갚았다. 다른 설계사보다 세 배 넘는 가격을 불러도 그를 찾아 줄을 선 건설 업체들 덕분이었다. 1998년 분양가 자율화로 건설업체들은 앞다퉈 대형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기회였다. 당시 고급 주택을 설계할 수 있는 건축가는 손에 꼽히는 게 국내 현실이었다. 부르는 게 값이었다.

건설회사들은 디자이너 최시영을 브랜드로 걸고 아파트를 분양했다. 타워팰리스를 비롯한 몇몇 모델하우스에는 그의 사진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그는 ‘나는 시대를 잘 타고났다’고 했다.

최 대표는 가격을 비싸게 부른다는 것도 시인했다. 하지만 어떤 고객도 꼼짝 못하고 돈을 지불하도록 만든다. 제시한 가격에 반기를 들면 ‘디자인 비용이 비쌀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서너 시간씩 설명한다. 그는 디자인 시안을 여러 개 준비해 클라이언트의 사인을 받지도 않는다.

“나한테 맡겼으면 내가 다 결정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내가 충분히 고민해 딱 하나만 보여줍니다.”

20년 전 그는 집안에 그림과 조각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안 곳곳에 그림을 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간접 조명을 디자인하자고 했다. 건설업체들은 하나같이 벽에 그림을 거는 사람도 드물고, 신문 읽기에 침침한 간접 조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반대했다. 그는 굽히지 않았다.

그는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직접 구입한 포스터를 판화 작업을 해 바닥 장식에 이용했다. 예술을 건축에 접목하고자 한 것이다. 한술 더 떠 판화 전문 화랑도 오픈했다. 1990년대 초 서울 압구정동에 문을 연 갤러리 May가 그것이다. 판화를 선택한 이유는 작품을 여러 장 찍어낼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이다. 자신이 디자인하는 주거 공간에 활용할 수 있는 최적의 예술품이라는 것. 경영난으로 금세 문을 닫았지만 아직도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이 디자인한 집에는 그림과 조각을 배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그가 요즘 디자인에서 강조하는 것은 격(格)이다. 순환과 정화의 의미를 담은 물, 아날로그 감성이 느껴지는 책 등을 소재로 활용한다. 하지만 디자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 게 있다고 했다.

“사실 공간보다 중요한 건 사람입니다. 어떤 품격을 가진 사람이 그 공간에 서 있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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