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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제약산업] 위기 넘을 신약 만든다

[국내 제약산업] 위기 넘을 신약 만든다


한국 제약산업에 전운이 감돈다.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제약 선진국이 키운 다국적 제약기업이 저렴하고 효과가 뛰어난 신약으로 국내 소비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제약업계에서는 보험약가가 낮아 견디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이런 상태면 제약산업 기반이 무너질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한국 제약업계는 현재 글로벌 시장 진출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몰락이냐, 부상이냐 기로에 놓인 한국 제약산업의 현황과 전망을 취재했다. 신약 출시 경험이 있는 국내 9개 제약사 연구개발 현황을 조사·분석했다. 아울러 해외 다국적 제약회사의 아시아 진출 현황을 분석해 보고 세계시장의 흐름 속에서 한국 제약산업이 나갈 방향을 모색했다.

“약을 무엇으로 만드냐”는 질문에 제약사는 “돈으로 만든다”고 답한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면서 끝없이 연구비를 쏟아부어야 겨우 신약 하나가 나올까 말까 한다. 특출한 약효를 가진 물질을 발견하면서 시작되는 신약 개발은 평균 8년이 넘는 동안 지루하게 이어진다. 화학적으로 약효가 드러난 뒤에도 3~5년 동안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을 거쳐야 한다. 아무리 효능이 좋아도 일부 환자에게서 부작용이 발견되면 신약 개발은 실패한다. 엄청난 분량의 임상시험 자료 더미와 함께 출시 예정된 약은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거기서 만에 하나 문제가 발생하면 그 약은 상품화될 수 없다. 긴 여정을 거친 약 중 극히 일부만이 약국에서 소비자와 만난다.



복제약에 강한 한국 제약사에 기회제약협회 김선호 홍보실장은 신약 개발 산업을 석유 시추에 비유한다. “지면에 수많은 구멍을 뚫어 그중 딱 한 개에서만 유정이 터지면 나머지 모든 탐사비용을 뽑아내는 것처럼 개발에 성공한 신약 하나가 나머지 무수히 실패한 실험의 R&D(연구개발) 비용을 모두 보상할 수 있기 때문에 신약 개발은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분야지만 그 열매는 달다. 일단 약으로 인정받은 상품은 비교적 간단한 공정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특허권을 강력하게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대가는 R&D에 성공한 일부에만 배타적으로 돌아간다.

제약업계에 따르면 신약이 출시되기까지는 대략 10년 이상 소요되고 그동안 국내에서만 1000억원 내외의 연구개발비가 든다. 글로벌 신약으로 개발하기 위해서는 세계 각국에 나가 해당 국가 국민에 맞춰 임상시험을 따로 다시 해야 한다. 각국의 까다로운 규제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글로벌 신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8000억~9000억원 정도가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제약산업은 현재 큰 변화를 앞두고 잰걸음을 하고 있다. 글로벌 제약시장이 변화하고 있고, 다국적 제약사의 공략도 막아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제약 선진국의 대형 제약사와 경쟁하다 밀려나면 국내시장마저 잃을 수 있지만 괜찮은 신약 몇 개가 세계적으로 히트 치면 글로벌 시장을 먹을 수도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발행한 2010년 3분기 누적 국내 주요 제약기업의 경영실적 분석에 따르면 이 시기 매출 순위 20대 제약사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13.1% 성장했다. 이에 따라 영업이익률은 2.6%포인트 성장했다. 전체 처방약 시장은 소폭 증가했다. 백신 제품류와 관절염 치료제 바이오시밀러(바이오 복제 의약품) 제품 등에서 두각을 드러낸 일부 제약사가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이에 더해 판매관리비는 전반적으로 3%가량 감소했다. 제약사가 리베이트를 대 가며 약을 팔러 다닐 필요가 줄어들었다는 의미다. 제약산업이 R&D를 중심으로 건전해지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제약사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은 R&D에서 나온다. 매출액 대비 R&D 비율은 상위 5대 제약사가 0.7%포인트씩 증가했다. 차상위 회사의 비율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큰 회사일수록 R&D 투자를 점점 늘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20대 제약사 매출액 대비 R&D 비율은 2009년 3분기 6.3%, 2010년 같은 기간 7.35%로 크게 늘었다. 제약사 규모별로 살펴보면 상위 5대 제약사가 14.5%, 차상위 10대 제약사가 12.9%, 차상위 20대 제약사가 13.1%의 성장률을 보였다. 규모가 큰 회사의 성장이 두드러져 역피라미드 모습의 산업구조가 가속되고 있다.

한국 제약사에 글로벌 제약산업 시장 전망은 밝다. 전체 경제가 성장하는 가운데 보건의료기술이 발달한 데다 고령화가 이들 약 수요를 받쳐주고 있다. 이들 시장은 주로 제네릭 의약품(복제약)이나 바이오시밀러가 떠받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 제약사가 주로 노리는 것은 해외 블록버스터 신약의 특허 만료다. 올해는 리피토(동맥경화 치료제), 플라빅스(동맥경화 치료제), 자이프렉사(정신분열병 치료제), 세로켈(우울증 치료제) 등이, 2012년에는 아빌리파이(정신분열증 등 치료제), 싱귤레어(알레르기 치료제) 등 블록버스터 신약의 특허가 만료된다.

이에 따라 많은 제네릭 의약품이 상용화될 예정이다. 이들 제품의 오리지널 제약기업의 매출 손실이, 제네릭 제품의 매출 상승이 예상된다. 미국과 유럽의 대형 제약사와 비교해 극히 영세한 한국 제약사가 경쟁을 시도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다. 한국 제약계는 이번 기회에 기술이 있어도 만들 수 없었던 블록버스터 약을 특허 만료와 동시에 출시해 글로벌 시장에 진입하겠다는 전략이다. 신약 개발에 비해 R&D 비용이 저렴하고 시간도 많이 들지 않기 때문에 이 분야 제약시장의 급성장이 예상된다.

2009년 기준 세계 제약시장 규모는 약 8000억 달러로,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연평균 7%씩 꾸준히 성장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향후 세계 제약시장은 파머징 마켓(pharmerging market·의약품을 뜻하는 ‘pharm’과 신흥시장을 의미하는 ‘emerging’이 결합된 용어로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멕시코, 터키 등 의약품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국가를 의미)이 견인할 것으로 예상한다. 전통적 최대 약 소비시장인 미국만 보면 전체 제약시장 규모(2009년 기준)는 약 3000억 달러에 달한다. 세계시장의 35% 비중이다. 블록버스터 신약의 특허가 만료되고,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의료개혁에 따라 제네릭 의약품 공급이 가속화되고 있다. 메디프론디비티의 이창식 이사는 “이제 한국 제약사는 제네릭을 중심으로 미국 시장에 진입,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제네릭과 신약 개발, 쌍두마차로신약 개발 비용은 매년 증가하고 있지만 신약 승인 건수는 줄어들고 있는 ‘Pharma Innovation Gap’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 일본, 유럽 등 제약 선진국은 제네릭 의약품 활성화 정책을 취하고 있다. 미국 내 오리지널 기반의 다국적 제약 기업보다 제네릭 제약 기업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 인도 등 파머징 마켓이 성장함에 따라 전문가들은 2014년 세계 제약산업 시장 규모가 1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세계 1위 제약사는 화이자다. 572억 달러 매출로, 2위 머크(390억 달러)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대규모 인수합병을 통해 세계적 초대형 제약업체가 탄생했다. 2000년 와머-램버트를 인수해 세계 14위였던 화이자가 1위로 올라선 것이 좋은 예다. 세계 10대 제약사 매출 비중은 1990년 32.5%에서 2009년 45.1%까지 확대됐다. 키움증권의 제약업계 분석에 따르면 최근에도 바이오제약 기업이나 제네릭 의약품 전문기업의 전략적 제휴, 인수합병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상위 10대 제약기업의 매출 비중이 이제 절반 가까이로 확대된 상태다.

그러나 제네릭이 전부는 아니다. 근래 제약사를 살펴보면 신약 개발보다 제네릭 생산에 집중한 나라의 제약산업은 붕괴됐다. 글로벌 제약사의 위력적 신약 공급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은 제네릭과 신약 비율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고, 일본은 이미 제약 선진국으로 진입한 상태로 경쟁 부담을 주지 않는다. 한국 제약업계는 연구인력 면에서 강점을 지녀 지금이 세계 톱 클래스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한국 제약업계는 제네릭으로 글로벌 제약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글로벌 신약으로 북미시장에서 치고 나가겠다는 복안이다.

국내 제약사의 글로벌 진출 전략은 대웅제약의 인도 진출에서 엿볼 수 있다. 대웅제약은 2009년 국내 제약사 가운데 처음으로 인도 하이데바라드에 의약연구소를 설립했다. 2006년 8월부터 인도로 연구원을 지속적으로 파견하며 준비한 결과다. 국내 제약사의 해외 연구소는 해당국 임상시험을 위해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한다.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 자료를 확보할 수 있어 해당국 보건당국의 승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는 중국과 더불어 세계 최대 의약품 소비시장으로 부상하고 있어 한국 제약사로서는 놓쳐서는 안 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대웅제약 관계자는 “인도 연구소에서 의약품 개발 초기 단계에서부터 자체적 허가 서류 작성까지 완료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인도는 영어권이며 R&D 인력 풀이 풍부한 편이어서 수많은 글로벌 제약사가 앞다퉈 진출하는 나라다. 인도에서 풍부한 임상시험을 마친 의약품은 2~3년이 지난 뒤 미국 FDA의 허가를 받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져 있기도 하다.

한국의 제약산업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진행되면서 수입 원료로 완제 의약품을 제조할 수 있는 제약 기초기술을 확립하는 단계에 들어갔다. 1970년대 들어 원료 의약품을 합성, 수입 의약품을 대체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랐다. 1980년대에는 안전하고 우수한 의약품을 공급하기 위해 KGMP시설 투자가 확대돼 한국 제약산업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신약 개발사업은 1987년 물질특허제도가 도입되면서 시작됐다. 특허를 보호 받게 되자 각 제약사가 신약 개발 투자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97년 SK케미칼이 항암제 선플라주를 내놓아 국내 신약 1호를 기록했다. 2003년에는 LG생명과학이 팩티브로 미국 FDA의 신약 허가를 받아 한국 제약의 글로벌 시장 진입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한국은 세계 10대 신약 개발국으로 부상했다. 현재 국내 신약 15개, 개량 신약 10개, 천연물 신약 4개가 허가를 받아 국내 시판되고 있다. 신약을 개발한 국내 제약사는 14개사다. SK케미칼이 1999년과 2007년 한 개씩 허가 받아 2관왕을 기록했고, 나머지 13개사는 한 개씩을 내놨다. 식약청에 따르면 현재까지 신약, 개량 신약, 천연물 신약을 포함해 700여 개 신약 후보가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 중 대부분은 국내 임상시험이 진행 중인 약제로 본허가를 통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신약 개발 신청이 미미했던 과거에 비하면 국내 제약사의 신약 개발 열기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해외 연구소 통해 글로벌 신약 기대정부도 앞장서 신약 개발을 독려하고 있다. 대표적 사업이 ‘콜럼버스프로젝트’와 ‘범부처전주기신약 개발사업단’이다. 콜럼버스프로젝트는 보건복지부가 주관하는 국내 보건의료산업의 북미시장 진출 특화 전략 프로젝트다. 정부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국내외 보건의료산업 네트워크를 구축해 기업이 개별적으로 접근하기 힘든 정보를 제공할 예정이다. 보건복지부는 제품의 우수성과 경쟁력, 시장성을 심사해 올 3월 지원대상 업체를 선정했다. 41개 업체 중 제약 분야 기업은 동아제약, 한미약품 등 21곳. 선정된 기업은 북미에서 R&D를 진행할 때 임상시험 등을 지원 받고, 모의실사나 교육 등을 실시하며 현지 인허가 컨설팅 도움도 받는다. 선정되지 못한 기업이라도 해외 수출입 정보, 인허가·특허 전문가 교육 참여 등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범부처전주기신약 개발사업단은 7월 8일 창립총회를 열고 정식 출범했다. 그동안 신약 개발과 관련해 교육과학기술부는 초기 연구단계에서, 보건복지부는 의약품 임상 진행과 허가 과정에서, 지식경제부는 이를 통한 산업 발전에서 각각 분절된 역할을 맡아 했다. 이번 사업단 출범은 신약 개발 과정에서 단계별로 주관부서가 달라 연결되지 못한 점을 해결하겠다는 의미다. 올해 예산은 정부 부처 세 곳이 50억원씩 예산을 투입한다. 보건복지부 보건산업기술과 하태길 사무관은 “올해는 출범 초기이고 하반기에만 진행되기 때문에 예산이 많지 않다”며 “내년부터 본격적 투자가 시작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사업단에는 향후 9년간 총 1조원 규모의 예산이 투입될 예정이다.

제약산업은 R&D 투자 비중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다. IT산업이 새로운 시장에 진입해 집중적 R&D 투자를 흡수해 발달한 것과 달리 제약산업은 과거부터 꾸준히 R&D만으로 오늘날까지 성장한 산업이다. 영국 기업혁신기술부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산업별 R&D투자에서 제약 및 바이오 산업은 연간 126조원으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가진 것이라곤 오로지 성실한 연구인력뿐이라는 국내 제약업계는 큰 기대를 안고 글로벌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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