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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반도체 성공 신화 LCD로 다시 쓴다

[CEO] 반도체 성공 신화 LCD로 다시 쓴다

한국반도체협회 총회가 열린 7월 1일. 권오현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사장이 기자들의 질문 세례를 받았다. 세계 1위를 달리는 반도체 사업의 수장인 터라 평소에도 기자들을 많이 몰고 다닌 그였지만 이날의 분위기는 확 달랐다. 삼성이 그룹 차원에서 삼성전자의 부품사업을 한데 묶은 DS(디바이스 솔루션)총괄을 신설하고 권 사장을 대표로 선임한다는 발표를 해서였다. 삼성전자의 간판인 반도체와 LCD(액정표시장치)를 그가 관할한다는 이야기는 시장의 반향을 일으켰다. D램 값이 떨어지고 LCD 가격마저 바닥을 헤매는 상황에서 권 사장의 DS총괄 카드는 삼성전자로선 승부수나 다름없었다.



“사양산업 있지만 사양회사 없다”그에게 “DS총괄로서의 사업구상이 뭔가”란 질문이 쏟아졌다. 권 사장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곤 “주말에 공부 좀 해야겠다”고 짧게 답했다. LCD가 어렵다는데 대책이 있느냐는 물음에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는 “사양산업은 있지만 사양회사는 없다”며 “디스플레이는 지금은 어렵지만 잘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삼성전자에서 부품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43.6%. 삼성전자는 지난해 154조원에 이른 매출 가운데 67조5538억원을 부품사업에서 올렸을 정도로 부품의 힘은 막강하다. D램과 낸드플래시, LCD 사업 모두 세계시장의 톱을 차지할 정도로 삼성전자는 업계의 큰손이다. 그만큼 DS총괄이란 자리의 파워 역시 막강하고 막중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리의 무게만큼 그가 해결해야 할 현안 역시 수두룩하다. 먼저 애플을 다독이는 일이다. 애플과 삼성은 스마트폰 시장에서 서로 칼끝을 겨눈 경쟁자다. 하지만 권 사장이 이끌고 있는 부품사업에서 애플은 삼성의 최대 고객이다. 지난해 기준, 삼성전자 매출의 4%대를 애플이 차지할 정도다. 권 사장은 신종균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사장이 애플과 명운을 건 특허전쟁을 벌일 때 동시에 애플의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장원기 삼성전자 LCD사업부장의 자리도 대신해야 한다. LCD는 평생 반도체에 몸담았던 그에겐 낯선 사업이다. 그가 DS총괄에 선임되던 첫날 “공부를 해야겠다”는 발언을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LCD시장이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도 그에겐 도전이다. 그가 취임하기 직전 서울행정법원이 삼성전자 반도체 라인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근로자 2명에게 산재 인정 승소 판결을 내린 것도 부담이었다(권 사장은 7월 14일 경기도 용인시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에서 열린 ‘반도체 근무환경 재조사 결과 발표회’에 참석해 “근무환경에 이상이 없다”고 밝혔다).

1985년 미국 삼성반도체연구소에 입사한 이래 삼성전자에서 그에게 붙은 수식어는 한결같았다. ‘김광호-이윤우-황창규를 이을 IT(정보기술) 리더’.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사업의 중흥을 이끈 역대 수장들의 계보를 이어갈 사람을 이야기할 땐 늘 그가 첫째로 꼽혔다. 그가 반도체사업부장에 선임되던 첫해도 그랬다. 2008년 ‘황의 법칙’으로 유명한 황창규 사장이 물러나자 그의 이름이 거론됐다. 업계에서 “삼성전자가 황의 법칙을 포기할 것”이란 말이 나온 것도 그때였다.

권 사장은 자신의 스타일대로 과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메모리 사업에만 쏠려 있던 관심을 ‘시스템LSI’라는 비메모리 사업으로 돌려놨다. 자신도 있었다. 1997년 시스템LSI 제품기술실장을 시작으로 8년간 비메모리 사업을 이끌어왔기 때문에 비메모리 시장의 흐름을 꿰뚫고 있었다. 2002년 디스플레이 구동칩을 세계시장 1위에 올려놓았던 자신감도 있었다. 2008년 그는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의 흐름을 비메모리로 바꿔놓으면서 D램과 낸드플래시라는 메모리 시장이 가격 폭락에 시달릴 때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가 기대 이상의 실적을 낼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과 맞서 싸울 수 있도록 한 데에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와 같은 비메모리 사업을 키워놓았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외부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인생은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 사장은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뒤 KAIST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길에 올라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가 처음으로 문을 두드린 곳은 미국 현지에 있는 삼성반도체연구소였다. 당시 반도체 업계에서 삼성전자의 존재는 미미했다. 삼성전자는 당시 본격적으로 4메가 D램 개발에 착수한 상태였다. 4메가 D램은 일본 도시바와 미국의 IBM 정도만 개발에 성공한 상태였던지라 후발주자인 삼성전자로서는 필사의 노력이 필요했다.



LCD사업에서도 친정체제 구축삼성전자는 1988년 10월 공장 건설에 들어갔지만 어떤 방식으로 생산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반도체 집적도를 높이기 위해선 입체설계 기술이 필수적이었다. 당시 선택은 오로지 두 가지. 반도체 주원료가 되는 웨이퍼 표면을 파내 지하층을 만드는 방식으로 집적도를 높이는 트렌치 공정과 웨이퍼 표면에 층을 쌓아 집적도를 높이는 스택이었다. 미국과 일본 업체들이 트렌치와 스택으로 양분될 정도로 당시 업계에선 기술 논란이 벌어졌다. 삼성전자는 연구팀을 둘로 나눠 기술 개발에 들어갔다. 권 사장이 맡은 건 스택방식.

그는 연구 끝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게 스택을 선택하자는 보고를 했다. ‘트렌치가 초등학생 수준이라면 스택은 대학생 수준’이라는 내용이었다. “구멍을 뚫어야 하는 트렌치는 구멍 속을 볼 수 없어 하자가 발생했을 때 속수무책이지만 스택은 아파트처럼 위로 쌓기 때문에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건희 회장은 권 사장의 설명을 믿어줬다. 그리고 얼마 후 트렌치 방식을 선택했던 업체들이 대량 생산의 문제점을 들어 모두 스택방식으로 옮겨오면서 삼성전자는 4메가 D램 경쟁에서 치고 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6메가 D램을 내놨을 땐 시장 1위에 오를 수 있었다. 1987년 권 사장은 그해 삼성그룹 기술대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부장으로 승진했다. 이후에도 그는 64메가 D램 개발에 주역으로 참여해 1992년 삼성그룹 기술대상을 받았다.

권 사장의 사무실엔 윤종용 삼성전자 고문의 휘호인 ‘격물치지(格物致知)’가 걸려 있다. 중국 사서 중 하나인 『대학』에 나오는 말로 ‘실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해 지식을 완전하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경영 스타일도 이를 빼닮았다. 실용을 중시한다. 예컨대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직원이 의전을 한답시고 엘리베이터 대기 버튼을 누르고 있으면 불같이 화를 낸다. 해외출장 때도 직원이 공항 마중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걸 끔찍이 싫어한다. 일이 많을 땐 햄버거와 같은 간단한 패스트푸드를 찾는다. 의사결정은 신중한 편이지만 한번 결정을 낸 사안에 대해선 강하게 밀어붙인다. 직원들과는 격의 없이 토론하는 걸 즐긴다. 임직원에게 책 선물도 한다. 미국 유학시절 몸에 익혔던 습관이 남아 식당에서 밥을 남기는 법도 없다. 빈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도 지나치지 못한다. “사소한 것을 아끼고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야 큰 원가절감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입에 올린다.

삼성전자는 7월 20일 LCD사업부 부사장을 모두 교체하는 후속 인사를 했다. DS총괄 LCD사업부 제조센터장에 박동건 부사장, 개발실장에 이윤태 전무를 각각 임명했다. 7월 초 장원기 사장이 물러나고 권오현 사장이 LCD사업부장을 겸임한 이후 단행한 인사다. 박 부사장은 20여 년 이상 D램 개발과 차세대 반도체를 연구해왔다. 이 전무는 시스템LSI사업부 LSI개발실장으로 일했다. 둘 다 반도체 출신 임원이다. 권 사장이 친정체제를 구축했다는 평가다. ‘모든 사람이 당연히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문제점을 제기하고 파고드는 승부사 기질을 갖고 있다’는 평을 듣는 그가 반도체는 물론 LCD사업에서도 성공 신화를 이어갈지 관심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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