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폭염에 운다] 공사 늦어져 금융비용 눈덩이(건설업체 사장), 손님들 발길 뜸해 긴 한숨만(재래시장 상인)
- [폭우·폭염에 운다] 공사 늦어져 금융비용 눈덩이(건설업체 사장), 손님들 발길 뜸해 긴 한숨만(재래시장 상인)

중견 건설업체 A사는 지난해 10월부터 서울 강남 10만㎡(약 3만 평) 부지에 지하 2층·지상 20층 규모의 빌딩을 짓고 있다. 건축비만 2000억원이 넘는 제법 큰 공사다. 착공한 지 10개월 남짓 흘렀지만 이제야 기초공사를 마무리했다. 갈 길이 멀지만 공사 진척률은 목표치를 한참 밑돈다. 예년보다 빨리 찾아온 장마 탓에 공사를 못 한 날이 많아서다.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6월 16일부터 7월 17일까지 한 달여 동안 공사한 날은 고작 11일뿐이다.
장마가 주춤하자 이번엔 폭염이 몰려왔다. 기온이 갑자기 오르면 건설현장에선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 회사 김민석(51·가명) 사장은 “공사 속도를 무리하게 끌어올리지 마라”고 주문했다.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공사를 서두르다 인명사고가 나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다. 7월 27일에는 ‘물폭탄’이 공사현장을 강타했다. 시간당 최대 100㎜라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그는 “7월 마지막 주에는 공사를 접어야 할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 사장에게 공정 진행 속도는 곧 돈이다. 그는 건물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금융권 PF(프로젝트 파이낸싱)로 3000억원을 빌렸다. 금리는 15%. 매달 37억5000만원이 이자로 나간다. 하루라도 빨리 공사를 마쳐야 금융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지금으로선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 김 사장은 “목표보다 두 달 정도 (완공이) 늦어질 듯하다”며 “70억원이 넘는 이자를 더 물어야 할 판”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구멍이 뚫린 듯 비를 쏟아내는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 “제발 비가 그쳤으면 좋겠어요. 여름이 끝나면 찬바람이 불 게 뻔하잖아요. 가을이 사라졌으니까요. 지난해처럼 혹한이 몰아치면 공사는 더 늦어질 수밖에 없어요.” 김 사장의 고민은 오늘도 깊어진다. 모든 게 날씨 탓이라 원망할 사람도 없다. 긴 장마, 폭염, 그리고 폭우. 한국 여름이 이상하다. 7월 27일 살인적 폭우가 내려 서울 강남 일대가 아수라장이 됐다. 학생이야 방학이라도 있지만 직장인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높은 습도와 굵은 빗발 때문에 내근도, 외근도 버겁다. 도로는 툭하면 주차장으로 돌변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쉽지 않다. 바깥 생활만 그런 게 아니다.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주부도 머리가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긴 장마 후 치솟은 물가 탓에 ‘밥상 차리기’가 쉽지 않다.
긴 장마, 폭염, 폭우 겹쳐경기도 일산에 사는 주부 최희숙(48·4인 가족)씨는 요즘 가계부 쓰기가 무섭다. 고물가 탓이다. “상추요? 먹어 본 지 한 달이 넘었어요. 긴 장마 때문인지 상추가 금(金)추가 됐다니까요.” 최씨는 지난해 가족의 일주일치 필수품을 사는 데 10만원을 썼다.
요즘은 20만원이 넘게 든다. 그는 “두루마리 휴지·고무장갑 등 정기적으로 사야 하는 물품 가격이 1년 전보다 두 배가량 올랐다”며 “요즘 마트에 가면 제품 몇 개만 사도 금세 20만원이 넘는다”고 털어놨다. 그는 “올해는 장마까지 겹쳐 채소 등 농산물 가격이 폭등했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최씨는 요즘 남편과 두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지 않는다. 폭등한 농산물·식품 가격을 감당하기 어려워서다. 아이들은 호박무침을 좋아한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인 6월 초만 해도 950원이면 호박 두 개를 샀다. 지금은 호박 한 개 값이 1500원에 달한다. 남편이 잘 먹는 수박은 같은 기간 1만3000원에서 2만원으로 54% 올랐다. 상추 한 봉지(200g)를 사는 것도 부담이다. 상추 값이 지난해보다 세 배가량 올라 3000원이 됐다.
최씨의 남편은 중견 건설사에 다닌다. 물가는 올랐지만 남편 월급은 비슷하다. 최씨는 “가족의 미래를 위해선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여름철 식탁 메뉴를 확 바꿨다. 날씨에 영향을 덜 받는 멸치볶음·젓갈 등을 주로 산다. 잡채를 만들 땐 값비싼 시금치 대신 부추를 넣는다. 수박·참외 등 제철 과일은 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남편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지 못해 마음이 편치 않지만 가계를 꾸리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최씨는 벌써 추석 걱정에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매년 추석이면 전북 익산에 있는 시댁에 내려가는데, 그의 담당은 과일이다. 그는 “지금 과일 값을 생각하면 즐거워야 할 명절이 되레 무섭다”고 걱정했다.
농산물 가격이 올랐다고 농부가 떼돈을 버는 건 아니다. 농부도 긴 장마·폭염·폭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올여름에 진저리를 친다. 김덕진(43)씨는 잘나가는 금융인이었다. 대형 보험사에서 5년 연속 ‘최우수 실적상’을 탔다. 그러나 심신이 지쳤다. 2009년 처와 두 아이를 데리고 충북으로 내려갔다. 1억원을 투자해 양계장을 열었다. 닭 1000마리를 사고, 사육장·관리동을 만들었다. 양계장 사업은 예상보다 잘됐다. 지난해 7000만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아이들도 시골 생활에 행복해했다. 그는 “귀농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올여름, 그의 희망은 무너졌다. 6월 내린 폭우로 충북 일대에 산사태가 났는데, 하필 그의 양계장을 덮쳤다. 닭 1000마리 중 70%가 땅에 묻혔다. 양계장을 복구하려면 최소 1억원이 필요하다. 닭을 사야 하고, 사육장과 관리동도 다시 지어야 한다. 김씨는 “올해 손실은 2억원에 달할 전망”이라며 “날씨 때문에 내 꿈이 엉망진창이 될 줄은 몰랐다”고 한탄했다.
전북 부안의 농민 유정민(55)씨 신세도 처량하긴 마찬가지다. 그는 고교 졸업 후 농부의 길을 걸었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환경 때문이었지만 고향에서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 있다는 점이 맘에 쏙 들었다. 어느덧 35년째.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농부다. 6만㎡(약 1만8000평)의 농지를 갖고 있다. 연 300가마(1가마 80㎏·일반미)를 생산해 평균 4500만원이 넘는 소득을 올렸다. 고소득은 아니지만 아이들 교육비 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행복했다.
그러나 올해는 막막하다. 6월 장마 때 40%의 논을 잃었다. 장마가 끝난 뒤에는 폭염·폭우가 잇따라 나머지 논에서도 품질 좋은 쌀을 기대하기 어렵다. 유씨는 “보름 후면 벼 이삭이 나오는데, 그때 가 봐야지 손실 규모를 알 수 있다”며 “지금으로선 좋은 쌀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농부만 날씨의 영향을 받는 건 아니다. 바다에서 일하는 어부도 생계를 위해 장대비와 폭염에 맞서야 한다. 인천 후포항의 심현모(43)씨는 16년 경력의 어부다. 봄철에는 병어와 꽃게, 가을에는 젓새우를 잡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5~6월 병어철이 지나면 5000만원가량 벌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병어가 눈에 띄게 줄었다.
하루 200㎏은 거뜬하게 잡을 수 있었는데 올봄에는 100㎏을 채우지 못했다. 봄 기온이 예년보다 떨어져서다. 병어는 동중국해 남쪽에 주로 서식하다가 5월께 북상해 6월에 알을 낳는다. 이때 서해안에선 본격적인 조업이 이뤄진다. 올해는 평년보다 5월 수온이 낮아 병어가 많이 올라오지 않았다.
6월 장마에 논 40% 잃어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해는 비까지 많이 내려 조업일수가 줄었다. 심씨는 “본격적 병어철이 시작되면 한 달에 25일은 바다에 나갔지만 올해는 20일도 조업하지 못했다”며 “비 오는 날 조업해 봐야 기름값에 인건비만 날리기 일쑤”라고 털어놨다. 그는 “올해 소득은 지난해 절반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아이들 학비를 대야 하는데 눈앞이 깜깜하다. 그는 “중학생 자식이 둘이라 돈 들어갈 일은 많은데, 날씨 때문에 갈수록 힘겹다”고 했다.

그는 요즘 별의별 생각을 다한다. ‘다른 어종을 잡으러 북한이나 중국으로 불법 어업을 가 볼까’라는 마음마저 생긴다. 급변한 이상기후 때문에 돈 벌기가 예년 같지 않아서다. 정부의 천편일률적 정책에도 불만이 많다. 가령 꽃게는 정부 정책에 따라 6월부터 잡지 못한다. 공식 금어기(禁漁期)다. 하지만 이상기온 때문에 6월에 잡지 못하면 꽃게를 팔 수 없다. 심씨는 “한창 꽃게 조업을 해야 하는데, 금어정책 때문에 못 했다”며 “날씨가 변하면 정부 정책도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내비쳤다.
인천 후포항에는 100여 명의 어민이 살았다. 고깃배가 30척이 넘을 정도로 제법 규모 있는 어촌이었다. 하지만 올 들어 어민 세 명이 마을을 떠났다. 고기는 잡히지 않고 기름값과 인건비는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심씨는 “날씨만 맑으면 그나마 살 수 있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긴 장마와 폭염, 폭우 때문에 시름에 잠긴 사람은 어부와 농부만이 아니다. 어부가 잡은 물고기와 농부가 재배하는 채소·과일을 파는 도시 재래상인의 한숨도 길어진다. 재래상인은 “도통 손님이 오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청과상을 운영하는 정종균(65)씨는 “요새 같아선 장사할 맛이 안 난다”고 힘없이 말한다. 30년 동안 장사를 했지만 올해처럼 힘든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시시때때로 내리는 장대비 때문에 고객이 크게 줄어서다.
정씨는 “과일 도매가격이 워낙 상승해 소비자에 팔 때는 값을 올려 받을 수밖에 없다”며 “예년보다 비싸게 과일을 떼오는데 손해 보고 팔 수는 없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그런데 이게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장대비를 뚫고 재래시장을 찾는 손님이 줄어든 데다 기껏 방문한 손님마저 ‘비싼 가격’에 놀라 발길을 돌릴 때가 많다. 정씨는 “지난해 장마 기간에는 하루 평균 10명의 손님이 왔는데 올해는 5명도 채 오지 않는다”고 울상이다.
그는 “빨리 비가 그쳐 시장에 활기가 넘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쏟아진다. 이번엔 우동 면발 같은 비다. 장마가 끝난 뒤 조금씩 늘던 손님의 발걸음은 다시 끊겼다. 그는 내일이, 아니 미래가 걱정이다. “올여름은 특히 힘들어요. 한국 기상이 변했다면 내년에도 힘들 걸로 보여요. 나 참~.” 정씨는 멍하니 청과상 옆에 뿌리를 내린 제비꽃을 봤다. 장대비가 아픈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정씨도 고개를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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