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 외환관리 고삐 죈다
금융당국, 외환관리 고삐 죈다

금융당국의 선제 대응일 뿐일까, 아니면 낌새가 심상치 않은 걸까. 금융당국 수장들이 잇따라 외환문제에 대해 강한 우려를 나타내면서 금융권이 우리나라 외화유동성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7월 23일 기자들과 만나 “올해 안에 외환건전성 문제를 1번(최우선)으로 하겠다”며 외환문제를 금융정책의 가장 시급한 문제로 손꼽았다. 권혁세 금감원장도 7월 27일 “유럽 재정위기가 확산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포함해 (금융권의) 스트레스테스트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금융당국은 이미 12개 주요 은행을 참여시켜 금융회사 외화유동성 특별점검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이들 은행에 대해서는 비상시 외화자금 조달계획을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앞서 금융당국은 7월 7일 여신전문금융회사에 대해 ‘원화용도’ 외화차입을 점진적으로 축소할 것을 지시했다. 원칙적으로 원화용도의 신규 외화차입은 허용하지 않도록 하고, 기존 차입분은 만기가 되는 대로 갚아버리라는 것이다. 이 같은 금융당국 수장의 발언이나 조치 수준은 사실상 금융위기에 준할 정도로 높다는 것이 금융권의 평가다.
유럽 위기 확산 시 외화유동성 비상금융당국은 “사전 예방적 조치”라며 선을 그은 상태다. 당장 외환수급 상황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할 뿐이라는 것이다. 지난 저축은행 사태 이후 금융당국이 금융시스템 리스크에 대해 선제대응체제로 들어선 만큼 외환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는 설명이다.
금융권에서도 드러난 지표로 보면 아직은 외화유동성에 대해 우려를 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중론이다. 5월 말 현재 국내은행의 단기 외화차입 규모는 339억 달러로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8월 말 460억 달러보다 적다. 국내은행이 빌려온 외화차입 전체와 대비해서 보면 5월 말 현재 단기 외화차입 비중은 28.9%로 2008년 8월 말 43.8%의 절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국내은행의 외환건전성 비율(3개월 외화유동성)도 안정적이다. 6월 말 현재 국내은행의 외환건전성은 100.3%로 지도기준인 85%를 15%포인트나 넘고 있다. 또 다른 외환건전성 비율인 7일갭 비율이나 1개월갭 비율도 지도기준을 웃돌고 있다.
PIIGS(포르투갈·아일랜드·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 국가가 우리나라에 투자했거나 빌려준 자금의 규모도 그다지 크지 않다. 우리나라 금융사의 PIIGS 국가에 대한 익스포저(위험노출액)는 3월 말 기준 26억3000만 달러로 총 해외 익스포저의 4.4%에 불과하다. PIIGS 국가가 국내 증시에 투자한 금액은 6월 말 현재 15조9000억원 정도다. 전체 외국인 투자 규모의 3.6%다. PIIGS로부터 은행이 빌린 차입금도 해외에서 빌린 총 차입금의 0.7%인 8억2000만 달러에 그치고 있다. PIIGS 5개국이 국가부도에 이르는 상황을 맞더라도 금융권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현시점에서의 얘기일 뿐이고 금융당국이 주목하는 시나리오는 다르다. 남유럽 재정위기가 유럽 전체로 확산되는 사태를 예견하면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PIIGS 국가들이 국가부도 사태로 접어들면 이들에게 많은 대출을 해준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들도 덩달아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여기에다 ‘달러 공급책’인 미국이 부채의 덫에 허덕이면서 추가적으로 돈을 찍을 여력이 없는 상태다. 일본은 대지진에, 중국은 물가상승에 허덕이고 있어 어느 국가 하나 마음 놓고 손 벌릴 곳이 없다는 것이 금융당국의 판단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설마 그렇게까지는 가지 않겠지만 대외여건 중 우리에게 유리한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가 아니냐”며 “유럽 전체로만 위기가 확산돼도 우리가 받을 타격은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우리 금융권이 유럽에 물려 있는 비중은 3분의 1 정도 된다. 국내 금융회사의 대유럽 익스포저는 141억6000만 달러로 총 해외 익스포저의
23.5%에 달한다. 특히 유럽에서 국내은행이 빌린 차입금은 전체 외화차입금의 35.6%다. 규모로는 418억9000만 달러에 이른다. 유럽이 국내 증시에 투자한 규모도 전체 외국인의 33.7%다. 금액으로는 147조8000억원이다. 이런 자금이 일시에 빠져나간다면 국내 금융이 덜컥 내려앉을 수밖에 없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외환위기 이후 국내 자본시장을 외국인에게 활짝 열어젖힌 까닭에 외국계 자본이 빠져나갈 때 막을 방법이 거의 없다”며 “외국인끼리 일으킨 문제로 우리 금융시장이 들썩일 수 있다는 잠재적인 우려를 정책당국자들은 항상 갖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이 바짝 긴장하는 이면에는 ‘우리나라 외환대란은 5∼6년에 한 번씩 발생한다’는 외환위기 주기설이 있다. 단기 외화자금 부족으로 국가부도 사태를 맞았던 외환위기는 1997년에 발생했다. 6년 뒤인 2003년에는 SK글로벌 분식회계 사태와 제2차 북핵 사태가 터지면서 국내로 들어오는 외화자금이 경색됐다. 5년이 지난 2008년에도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문제가 터지며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외화 마련을 위해 발을 동동 굴렀다. 주기설이 맞다면 그 다음 외환대란은 2013년께 온다. 2013년은 대선이 끝나고 새 정부가 출범하는 시점이다. 금융관료 교체가 이뤄져 국내적으로도 금융감독에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
외환위기 5년 주기설 대비금융위의 또 다른 관계자는 “1997년에는 기업부채, 2008년에는 가계부채 문제로 외환경색이 발생했다”며 “2013년은 가계부채와 기업부채에다 정부부채가 동시에 발생할 수 있는 시점으로 그 경우 우리가 극복할 수단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800조원이 넘는 가계부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국가부채, 부동산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채권 등 여전히 정리되지 않는 기업부채가 쓰나미처럼 2013년에 덮칠 수 있다는 얘기다.
고대사에 관심이 많은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이런 역사적 관점을 피해갈 리 없다. 김 위원장이 정치권에서 난색을 표한 가계부채 대책에 손을 대는 이면에는 ‘가계부채-기업부채-국가부채’로 얽힌 고리를 끊겠다는 복심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반기 들어 한국 국채(5년물)에 대한 CDS 프리미엄(채권 부도에 대비한 보험금으로 국가신용도가 높을수록 낮다)이 슬금슬금 상승하자 금융당국의 ‘와칭(경계 수위)’도 강해지고 있다. 6월 평균 CDS 프리미엄은 101bp로 80∼90bp 수준을 유지하던 2009년과 2010년 연평균 수준을 어느새 웃돌고 있다.
정은보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은 “우리 금융위기는 항상 외환 쪽에서 시작됐는데 위기는 갑자기 발생하고 해결도 가장 어렵다”며 “금융당국의 외환대책을 넋 놓고 있지 말고 대비 잘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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