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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iness] 10년 가꿔서 최상급 작품 만든다

[Business] 10년 가꿔서 최상급 작품 만든다

정읍시 인근 어디에서나 소나무 재배농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곧고 높게 우뚝 서 푸른 하늘과 절묘한 조화를 빚어내는 금강송, 팔레트에서 물감이 번지듯 비스듬히 누워 가지를 사방으로 뻗은 와송, 굳어진 산길처럼 매끄러운 곡선을 뽐내는 해송…. 소나무는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는 조경수로 널리 쓰인다. 도심 빌딩 주변이나 공원, 골프장 조경의 방점은 소나무로 찍게 마련이다.

이런 조경용 소나무의 40%가 전라북도 정읍에서 커 전국 각지로 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정읍이 조경수 재배지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건 일제 강점기 때다. 조선에서 향나무를 길러 일본으로 반출하려던 일본인이 군산항에서 가까운 정읍에 자리 잡으면서다. 그 후 어떤 수종이든 조경수로 활용되는 나무는 일단 정읍에서 조형 과정을 거쳐 전국 각지로 나갔다. 조선에서 손꼽히는 조경 기술자도 정읍에 구름같이 몰렸다. 멋진 나무를 구하려는 조경업자들도 정읍부터 찾았다.



시장 가격 없어 부르는 게 값다양한 조경수를 기르던 정읍은 현재 소나무를 집중적으로 키우고 있다. 경제개발이 어느 정도 물이 오른 1980년대 초부터 부유층 사이에서 조경수가 관심의 대상이 됐다. 조경수 가운데 한국을 대표하는 나무인 소나무가 각광 받기 시작했다. 정읍에도 다른 수종을 제치고 소나무가 반입되기 시작했다. 고급 정원을 가꾸려는 유력 인사들이 저마다 경쟁하듯 멋진 소나무를 찾기 시작하자 정읍의 일부 소나무 재배 농민은 보통 직장인은 상상도 하지 못할 비싼 가격을 받고 ‘작품’을 팔기 시작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정읍의 수려한 소나무가 대거 서울 잠실로 옮겨졌다. KBS가 새 건물을 지을 때도 이곳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팔려 나갔다. 한때 인천공항에 비싼 가격으로 소나무 한 주를 팔아 아파트 여러 채를 산 농민도 나왔다. 2002년 이후 수도권에 아파트 단지가 속속 조성되면서 소나무 조경수 사업은 봇물 터지듯 커졌다.

정읍 사람치고 소나무 몇 그루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나무 사업은 인기를 끌었다. 2004년부터는 묘목부터 기르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해 현재 정읍에는 700여 농가가 소나무를 기르고 있다. 정읍 소나무 산지는 정읍시 일대와 고창 일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조경용으로 키우는 소나무는 1000만여 주에 이른다. 관계 공무원들도 소나무의 정확한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조경용 소나무는 ‘작품’으로 취급 받기 때문에 부르는 게 값이다. 실제 한 농민은 수도권 한 골프장에 그루당 1억원씩 받고 소나무를 팔았다. 시장 가격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 그냥 부른 값이 1억원이었고, 멋진 소나무를 본 골프장 주인이 다른 골프장에 빼앗길까 싶어 선뜻 현금 1억원을 주고 샀다.

소나무 재배 농민은 인근 산을 돌아다니며 작가가 오브제를 찾아다니듯 쓸 만한 소나무를 고른다. 10여 년 정도 잘 가꾸면 멋진 모습이 만들어지겠다 싶은 나무를 골라 줄기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흰색 천을 둘러둔다. 임야 주인과 협의한 뒤 가격이 맞으면 자신의 농장에 나무를 옮겨 심는다. 수령 150여 년의 소나무 10여 그루가 5000만원 정도에 거래된다. 야생 소나무를 사온 농민은 8~9년 동안 소나무를 가지 치고, 뒤틀고, 누이는 등 갖은 기법을 동원해 소나무 형태를 다시 만든다.

모든 나무가 비싼 가격을 받는 걸작이 되지는 않는다. 일부 나무는 옮겨 심는 과정에서 말라 죽어 장작 신세가 된다. 나무가 농민의 의도대로 크지 않으면 사온 가격보다 낮게 책정되기도 한다. 수많은 나무 중 단 몇 그루만이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그 몇 그루가 수없이 실패한 나무 값을 보상한다.

정읍에서 조경용 소나무를 30년간 길러온 우봉농장 이경무(66) 농장주는 “과거 이식기술이 안 좋을 때는 5500만원을 주고 10그루를 사왔다가 한 그루만 살아남은 적이 있었다”며 “1999년 이후 기술이 발전해 이제는 소나무가 죽는 일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는 “1998~ 2004년 수도권 인근 골프장에 소나무를 공급할 때는 재미를 좀 봤다”며 “요즘은 건설이 강을 파는 데만 집중돼 있고 아파트 건설은 부진해 괜찮은 소나무를 보낼 곳이 없다”고 아쉬워했다.

보통 골프장에 이식될 만한 괜찮은 소나무는 5~10년에 걸쳐 한 그루 나올까 말까 한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수백 그루를 심어 작품을 만들어낼 확률을 높인다. 정읍 인근에서 소나무를 키우는 농지 70~80%가 임대토지다. 임대료는 교통과 토질에 따라 연간 평당 1000~1200원 수준으로 나뉜다. 2만 평 땅(75% 임대토지)에 3000주의 소나무를 키우는 한 농민은 임대료로 매년 1600만원 정도 낸다. 여기에 소나무를 사올 때 든 종잣돈을 생각하면 연간 2억원 정도를 팔아야 손익분기점을 맞춘다. 어떤 이유에서든 나무를 1회 옮기는 데 인건비가 10만~12만원이 드는데, 생육조건상 나무 간 거리를 조정하다 보면 나무를 옮기는 일이 제법 잦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든다고 한다.



1년에 2억원어치 팔아야 손익분기점정읍 주변 야산에는 좋은 소나무가 별로 없다. 정읍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농장은 경북과 강원 접경에 산재한 10~15m 높이의 금강송이나 안면도에 산재한 자생종처럼 유명한 소나무를 옮겨 심어 인공적으로 소나무 재배지를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정읍이 소나무 주산지가 된 것은 넓고 평평한 황토 지형과 고속도로에 인접한 교통환경 덕이 크다. 야산 경사지에서 나무를 옮기는 것에 비해 이식 비용을 10분의 1로 줄일 수 있고 오랫동안 나무 형태를 조형하기에는 평지가 편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고속도로가 가까워 소나무 물류비용이 싼 것, 800여 명에 달하는 조경 관련 인력이 집중돼 있는 것도 정읍이 ‘소나무몰’로 자리 잡은 이유다.

전북 산림환경연구소 대아수목원에서 소나무 생육을 연구하는 박준모 박사는 “소나무는 한국 어디에서나 잘 자라기 때문에 정읍의 기후나 토질이 생태적으로 특별히 재배에 유리한 것은 아니다”며 “변산반도 부안 해변이나 군산, 내장산에서 좋은 소나무를 쉽게 옮겨올 수 있고 키워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에 유리한 고속도로를 끼고 있는 등 지리적으로 유리한 조건 때문에 정읍이 조경용 소나무로 유명해졌다”고 설명했다.

2006년 소나무 재선충 문제로 전국이 들썩일 때도 정읍만은 피해를 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읍 소나무 산지는 아직까지 유지될 수 있었고, 다른 소나무 재배지가 몰락하는 와중에도 살아남아 최대 산지로 부각됐다. 전북대 산림과학부 한상섭 교수는 “당시 재선충을 옮기는 솔수염하늘소가 영남에서 시작해 임실이나 광양, 순천까지 들어오는 데 그쳤고, 정읍은 다행스럽게도 당시 소나무를 반출은 했지만 반입은 하지 않아 재선충 피해를 전혀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읍지역 조경업자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나무를 심으면 배부르진 않아도 굶지는 않는다.” “나무보다 돈에 관심을 기울이면 나무도 잃고 돈도 잃는다.” 그러나 최근 정읍 소나무 단지는 위기를 겪고 있다. 소나무가 돈이 된다는 소문을 듣고 너도나도 소나무 재배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50년간 정읍에서 조경사업을 해오며 소나무 조형법을 전수해온 최성수(74)씨는 지난해 봄 큰 소나무만 남겨놓고 묘목 25만여 주를 벌목해버렸다. 묘목은 최소한 3~4년간 길러 팔아야 하는데, 새 정부가 들어선 4년 전부터 갑자기 많은 사람이 묘목사업에 뛰어들어 공급 초과 현상이 나타나서다. 최씨는 “반세기 넘게 조경수 재배를 해왔지만 이번과 같은 침체는 처음”이라며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을 때쯤이면 중산층도 집에 소나무 한두 그루 정도는 심고 싶어할 것으로 보여 사정이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면서 그는 “소나무는 적어도 10년을 보고 키우는 거라 있는 듯 없는 듯 잊고 지내며 길게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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